김정은 국무위원장이나 트럼프 대통령이나 만나자고만 했지 구체적인 장소 얘기를 하지 않았다. 관례나 경호 등을 고려할 때 북·미 정상회담 장소는 평양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다른 곳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워싱턴으로 날아갈 수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4년6개월 전 바로 그런 시도가 있었다.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면 패턴이 비슷하다.
![]() |
ⓒ연합뉴스 3월6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대북 특사단이 기념 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김정은 국무위원장, 서훈 국정원장, 천해성 통일부 차관, 김상균 국정원 2차장. |
당시 북한은 베이징에 나와 있는 대미 채널을 통해 “김정은 제1비서(당시 직책)가 방미한다면 미국이 전세기를 보내줄 수 있는지” 타진했다. 북한 국적기를 사용하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에 가면 NBA 농구도 보고 싶고 미국이라는 사회를 잘 구경하고 싶다”라는 김정은 제1비서의 뜻을 미국 측에 전달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파격적 제안은 성사는커녕 표면화조차 되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가 이를 중재할 안목이나 능력이 없었다.
이제는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노련한 중재자’가 운전석에 앉았다. 또한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올해 초부터 시작된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간 ‘공조’를 충분히 확인했다. 그래서 김 위원장은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는 확인과 함께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 카드를 던진 것이다.
![]() |
ⓒAP Photo 3월9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백악관 웨스트윙 앞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은 서훈 국정원장, 오른쪽은 조윤제 주미 대사. |
북한의 초기 전략은 ‘접촉 통한 변화’
물론 남북 접촉이 시작되기 전 세운 전략이었다. 동·서독 관계에서도 확인된 ‘접촉을 통한 변화’는 몇 달간의 극히 짧은 접촉에서도 빛을 발했다. 북한에게 시간 끌기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남북관계는 한반도 정세 변화의 진원지이자 동력이 되었다. 3월5일 대북 특사 방북으로 남북이 합의한 6개 항목은 그동안 접촉이 가져온 변화의 결과물이었다. 한·미 양국 정상의 굳건한 신뢰도 한몫했다. 지난 1월4일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통화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에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일시 중단하자고 제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기꺼이 수용하며 “남북 대화 과정에 우리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알려달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100%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한다”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문재인 대통령을 도왔다. 한 소식통은 “미국 관료들이나 백악관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 폼페이오 CIA 국장 등은 평창올림픽을 통해 돌파구를 열어보려는 우리 정부를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달랐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트럼프 대통령과 껄끄러운 문제를 풀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연합뉴스 2월10일 문재인 대통령이 방남한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오른쪽)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 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북한의 변화가 가시화됐다. 물론 1월9일 남북 고위급회담 전부터 남북 사이 물밑 조율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 <아사히 신문>이 보도했듯 남측 관계자가 비밀리에 북한에 들어가거나 해외에서 만나는 식은 아니었다고 한다.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의 아랍에미리트 방문 건으로 홍역을 치른 탓이다. 3월7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여야 5당 대표와의 오찬 때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유독 이 점을 캐물었다. 배석한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이 한마디로 답변했다. “판문점에서 했습니다.”
![]() |
ⓒ정리 전혜원기자 디자인 최예린 기자 |
북·미 고위급 접촉은 불발되었지만 펜스 부통령의 방한은 한·미 양국 간 공조를 다지고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한 계기가 됐다. 펜스 부통령은 미국 내 강경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미국 강경파들은 남북관계 진전에 의구심을 가졌다. 한국이 국제적인 대북 제재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었다. 펜스 부통령은 방한 기간에 문 대통령과 두 차례 면담하며 이 같은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었다고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밝혔다. 문 대통령은 펜스 부통령에게 “북한이 단지 대화에 나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비핵화를 위한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할 때에만 경제·외교적 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란 점을 북한에 분명히 밝히겠다”라고 확신시켰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펜스 부통령이 문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는 평창 이후의 대화 국면에 대해 양국 의견이 조율되지 못한 상태였다. 만남 뒤 ‘한국이 먼저 북한과 대화하고 미국도 북한과의 대화에 동참할 수 있다’는 쪽으로 정리됐다. 펜스 부통령은 이 정책을 ‘최대의 압박과 관여의 병행(maximum pressure and engagement at the same time)’이라고 불렀다. 우리 측은 이제 남북 대화와 북·미 대화를 동시 병행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 집중했다.
![]() |
ⓒ연합뉴스 2015년 12월10일 경기도 연천군 한탄강에서 열린 한·미 연합 도하작전 훈련 모습. |
북한이 ‘김여정 특사’ 파견 및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한 배경과 관련해 몇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핵무력 완성에 따른 자신감의 발로라는 주장이 그 하나다. 북한은 지난해 11월29일 화성 15호 발사 당일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최근 <노동신문>에는 북한이 이미 미국·중국·러시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인 전략국가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미국 뉴아메리카 재단의 수전 디매지오 국장은 북한이 이미 미국과 핵균형을 이뤘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핵·미사일 양산과 실전 배치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것이 결정적 요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최대 압박 작전, 특히 군사적 움직임에 따른 위기감을 느꼈다.
실제로 1월14일자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미국 네바다 주 상공에서 제82공수사단 소속 병사 119명이 C-17 수송기에서 낙하훈련을 했다. 지난해 8월 워싱턴 주의 훈련센터에서 이미 C-130 19대와 C-17 13대 등 수송기 30여 대로 주일 미군 기지를 거치지 않고 본토에서 직접 이동하는 훈련을 하기도 했다. 또 워싱턴 정가에는 북한에 대한 제한적 선제공격을 뜻하는 ‘코피 전략(bloody nose)’이라는 군사옵션 용어가 퍼졌다.
특히 2월16~18일 독일에서 열린 뮌헨 안보회의(MSC)에서 있었던 일은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유럽 최대 규모 국제안보회의인 MSC에 제임스 리시 공화당 상원의원이 참석했다.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근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반테러 소위원회’ 위원장인 그는 “김정은이 지금 하고 있는 일(미국 본토에 도달하는 ICBM 개발)을 계속한다면 전쟁을 초래할 것이다. 제한적 대북 타격 구상인 코피 전략이 아니라 전면전(all-out war)에 직면할 것이며, 문명사상 가장 재앙적 사건이 될 것이나 매우 빨리 끝날 것이다”라는 ‘폭탄 발언’을 하고 퇴장했다. 공화당의 신주류로 차기 상원 외교위원장에 낙점된 그는 평창올림픽 폐막식 때 이방카 백악관 보좌관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트럼프 정부의 메시지가 실려 있는 의도적인 ‘해프닝’으로 보인다. 미국은 또한 북한 정권의 수뇌부 제거와 미사일 발사대를 정밀 타격할 신형 무인기를 3월부터 군산 미 공군기지에 배치할 계획이었다. 배치 시기가 한·미 연합 군사훈련 재개 시점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북한으로서는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었다. 무인기 부대는 바로 전면전으로 이어지는 창 끝에 해당한다.
김정은, 한·미 연합 군사훈련 전격 수용
이렇게 미국은 ‘최대 압박과 관여’ 전략에서 최대의 압박, 즉 나쁜 경찰(배드 캅) 역할을 극대화하는 중이었다. 미국이 북한을 압박할 수록 북한은 남한이라는 방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문재인 대통령의 노련한 중재가 빛을 발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이 남북관계 뒤로 그냥 숨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과 마주 앉아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예정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꺼내려 하자, 김 위원장이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이 마치 숙제를 풀듯 남북 합의 6개 항목을 한꺼번에 다 얘기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에게 숙제를 내준 이가 바로 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김여정·김영철 면담 때 남북관계나 남북 정상회담, 비핵화, 북·미 대화, 한·미 연합 군사훈련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소상히 밝혔다. 3월7일 문 대통령은 여야 5당 대표와의 청와대 오찬 때 본인이 직접 그 내용을 밝혔다. “남북 정상회담이나 남북 간 대화 진전은 말하자면 비핵화와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과 북한의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속도를 내야 한다.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연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얘기했다.” 즉 남북 대화와 정상회담을 선행하며 미국의 예봉을 피하고, 시간을 번 뒤 위력을 과시하겠다는 북측의 구상을 꿰뚫어보고 남북관계와 비핵화, 북·미 대화를 동시에 병행해야 한다고 북측 특사에게 못 박은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합의하고 펜스 부통령이 동의한, 남북이 먼저 대화하고 북·미 대화가 바로 뒤를 잇는 구상을 북한에도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실제로 문 대통령과 김여정·김영철의 면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통일부를 비롯한 정부 내에서 “남북 간에 신뢰가 쌓이면 비핵화도 논의할 수 있겠다”라는 희망적인 분위기가 생겼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고 온 대북 특사단이 발표한 6개 항목 가운데 미국은 대화 기간 중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하겠다는 점에 주목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메시지에서는 “향후 어떠한 핵 또는 미사일 실험도 자제하겠다”라며 표현이 한층 강화됐다.
미국이 그동안 중국이나 러시아에 이것만이라도 자제시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수차례 부탁했지만 현실화되지 않았던 조치가 남북 접촉에서 이뤄진 것이다. 미국이 앞으로 북한을 설득하는 데 중국이나 러시아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측면에서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중국이나 러시아의 도움 없이도 한반도 정세를 주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