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인용] 'R의 터널' 나오면 'J의 늪' 빠져드나

2019. 11. 6. 18:15lecture

'R의 터널' 나오면 'J의 늪' 빠져드나

박은하 기자 입력 2019.11.05. 06:02 

[경향신문] ㆍ긴급 진단 - ① 경고음 커지는 한국 경제
ㆍ세계경제 하향·국내 인구 감소, 저투자·저고용·저물가 악순환
ㆍ장기불황 대비 정책 전환 필요



일본의 ‘잃어버린 25년’이 한국에서도 재연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표상으로는 경기가 바닥을 다지고 있다는 신호가 일부 포착되고 있지만 궁극적인 경기회복에 대한 희망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통과하고 있는 ‘짧은 터널’을 빠져나가도 곧 ‘더 길고 어두운 터널’이 나타날 것이라는 비관이 시장에 확산되고 있다. 짧은 터널이 ‘경기침체(Recession)’라면 더 길고 어두운 터널은 1990년대부터 25년간 일본에서 벌어졌던 ‘일본형 장기불황(Japanification)’이다.

일본형 장기불황 ‘J의 공포’가 막연한 우려가 아닌 이유는 과거와 같은 세계 경제의 고성장을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는 대외적 요인뿐만 아니라 고령화에 따른 소비 위축, 기술 혁신에 따른 고용 감소, 신성장동력 발굴 실패 등 한국 사회·경제의 대내적 요인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경제주체들의 불안을 다독인다면서 “괜찮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경제정책 방향이 경기침체 대응에서 일본형 장기불황 대비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4일 경남 창원시의 한 자동차 부품회사 경영자 ㄱ씨의 말에서는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묻어나왔다. 그는 “내년 투자계획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투자를 줄이고 유동성을 확보한다는 큰 방향만 잡아놨다”고 말했다. ㄱ씨 회사는 원청과 안정적 거래를 유지하고 있는 1차 협력업체로, 재무구조도 탄탄한 편이지만 내년에는 허리띠를 더 졸라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는 “일단 세계 경제가 너무 좋지 않다. 거래처들도 정확한 내년 생산 대수를 결정하지 못했다고 들었다”며 “다들 채용도 줄이고 있다. 지금의 안 좋은 경제상황이 ‘일시적’이라는 정부의 해석이 와닿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인식도 다르지 않다. 재계 서열 5위 롯데그룹은 지난달 30일 “향후 발생 가능한 외환 및 유동성 위기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며 ‘비상경영’을 선포했다. 유가 상승과 일본 수출규제 등의 여파로 지난 2분기 1015억원의 영업적자를 낸 대한항공은 창립 50년 만에 처음으로 ‘단기 희망휴직’을 실시했다. 이마트는 2011년 법인 분리 이후 처음으로 지난 2분기 영업적자를 냈다.

골목상권은 더 비관적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달 19개 골목상권 업종 상공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매출액이 올해 13.7%, 내년에는 15.8%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됐다.

이대로라면 ‘기업이익 감소→저투자→저고용→저소비→저물가→기업이익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펼쳐진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런 상황이 2분기 이상 지속되면 ‘불황(R)’으로 진단한다. 이 같은 현상이 10~20년 장기 지속되는 현상을 두고는 ‘일본형 장기불황(J)’이라고 표현한다.

지난 3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전 분기 대비 0.4% 증가에 그치면서 올해 한국 경제는 1%대의 낮은 성장률을 기록할 가능성이 커졌다. IMF 외환위기(-5.5%)나 글로벌 금융위기(0.8%) 때처럼 외부 충격이 있는 상황을 제외하면 가장 낮은 수치이다. 정부는 미·중 무역갈등으로 인한 세계 교역의 위축을 낮은 성장률의 주된 원인으로 꼽고 있다.

■ 인구구조 20년 격차 ‘일본화’…혁신해도 고용·성장은 ‘정체’

세계경제 성장세로 바뀌어도

경제 기초체력 약해 ‘저성장’

“불안감 해소할 구조개혁 필요”

세계 경제는 순환주기상 지난해 하반기부터 하강할 것이라고 예측돼왔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 간 벌어진 관세·환율 전쟁은 세계 경제를 예상보다 더 빠르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세계 교역 증가율은 2017년 5.4%에서 지난해 3.8%로 줄었고, 올해는 3%대 초반으로 예상된다. 한국뿐 아니라 독일도 2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 1%를 기록하는 등 대외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미·중 무역분쟁이 해결되고 세계 경제가 상승세로 돌아서더라도 한국 경제의 앞날이 밝지 않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국 경제성장률은 이미 추세적으로 낮아져왔다. 한국의 성장률은 1991~1997년 평균 8%에서 2001~2008년 4.9%, 2010~2018년에는 3.4%를 기록했다. 특히 잠재성장률이 낮아지고 있다. 잠재성장률은 자본과 노동의 완전고용이 일어날 경우를 전제로 한 성장률로, 경제의 기초체력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추산에 따르면 한국은 외환위기 이전인 1996년만 해도 잠재성장률이 7.5%였지만 2000년대 초중반에는 4~5%대를 나타내다 금융위기 시기인 2008년(3.9%)에 3%대로 하락했다. 결국 올해부터는 2%대로 내려앉았다. 성장의 힘 자체가 약화된 것이다.

한국 인구구조가 20년을 사이에 두고 일본의 형태를 따라가고 있는 점도 우려가 된다. 일본의 장기불황은 1991~1992년 부동산 버블 붕괴가 신호탄이었지만 1995년부터 생산연령인구(15~64세)의 감소가 시작된 것이 결정타였다. 한국의 생산연령인구도 지난해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 혁신을 통해 생산성이 높아진다 해도 생산인구가 감소한다면 경제 전체의 규모는 성장할 수 없다. 홍성국 전 대우증권 사장은 “미·중 무역갈등이 세계 경제 저성장의 원인이라기보다 세계 경제가 고령화 등 여러 요인으로 저성장의 늪에 빠진 결과”라고 설명했다.

정보기술(IT) 혁신으로 투자가 일어나더라도 과거처럼 많은 규모의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전자상거래의 발달로 골목상권이 죽는 ‘아마존 효과’에 마땅한 대응책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 경제가 신성장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도 심각하다. 한 4대 그룹 관계자는 “우리나라 기업들은 자동차, 디스플레이, 석유화학 등 기존 주력 산업에서 확실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산업도 제대로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며 “미·중 무역갈등이 타결되더라도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세계 경제가 앞으로는 폭발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적다는 점도 문제다. 하버드대 교수인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가 ‘구조적 장기침체(secular-stagnation)’에 들어섰다고 주장해왔다. 고령화와 저금리 현상이 맞물려 저축은 늘고 투자는 줄어든다. 돈이 부동산으로 쏠리고 물가는 낮아지며 채무부담은 높여 소비마저 줄이면서 경기는 침체한다. 고령화와 약화된 산업경쟁력에 더해 대외여건까지 나빠지면서 장기불황의 조건에 가까워져 있는 모습이다.

단기적으로는 경제가 회복될 것이라는 지표가 나오고 있다. 9월 산업활동동향에서 앞으로의 경기를 예측하는 선행지수 순환변동치가 상승했으며 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3개월째 떨어지지는 않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9월 경제동향(그린북)을 발표하면서 내년부터는 D램과 낸드플래시의 가격과 물량 모두 상승하며 반도체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착시’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추세적으로 성장률이 계속 낮아진다는 점을 봐야 한다”며 “시야를 장기적으로 가져가야 한다. 지금 핵심은 불황이 10~20년 넘게 장기화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정준호 강원대 교수는 “다음번 반등기에 경기가 조금 오르는 듯하다가 다시 하강 국면으로 들어선다면 그때가 바로 ‘일본화’로 돌입한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내년도 513조원이 넘는 ‘슈퍼 예산안’을 제출해 경기에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불안감에 싸여 있는 기업과 가계가 소비와 투자를 줄이고 이것이 다시 경제를 위축시켜 기업·가계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악순환을 차단하려면, 이 불안감을 깰 과감한 구조개혁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상준 일본 와세다대 교수는 <불황터널 진입하는 일본, 탈출하는 한국>에서 “한국도 과거처럼 높은 성장률은 이제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낮은 성장률하에서 내실을 다지는 것이 낫다”고 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