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공간과 만나면 10-1) 장벽 전시관 안으로: 기억할 뿐 돌아가지 못할

2009. 5. 6. 16:24공간 일상 담론

기억이 공간과 만나면

 

10-1) 장벽 전시관 안으로: 기억할 뿐 돌아가지 못할 시간

 

포스트모던 한 전시관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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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근처에 작은 규모의 전시관이 있다. 그 전시관에서 장벽과 함께 했던 기억들을 따라가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앞의 장벽 따라가기 부분에서 설명했듯이, 이 전시관의 찻길에 면한 부분에는 커다란 사진이 붙어 있다. 그리고 그 면을 옆으로 입구가 있다. 현대적인 모습의 디자인을 한 건물을 보면 왠지 균형적이지 않다. 베를린장벽의 역사를 설명하기에는 뭔가 일치하지 않는 것 같은 모양의 전시관…. 한 눈에 이 건물이 베를린장벽을 기록하는 공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 면에 커다란 사진이 아니라면 누구도 눈치 챌 수 없었을 모습이라고 할까.

 

그곳에 들어서면 관련 책들과 설명 자료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판매원은 그저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이 전시관에서 기념품을 파는 것과 같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다. 뭔가 허전하다. 베를린장벽의 기억을 회상할 수 있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2층으로 올라가야 그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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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올라갔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인테리어로 만들어진 작지만 아담한 전시 공간…. 포스트모더니즘에 어울리는 것 같은 전경이다. 어쩌면 모더니즘의 사고로는 담아낼 수 없는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 사라지지 않는 이성에 대한 강박관념, 자기 것만이 중심이 되고 나머지는 것은 부차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들만의 진보, 획일과 극단을 강요했던 모더니즘의 역사, 이념의 도그마로 넘쳐흘렀던 광기…. 이런 사고로 베를린장벽을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대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선과 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끊어짐이 없는 디자인, 그것은 분단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욕망일지도 모른다. 그 선 사이에 기억들이 전시되어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그러나 기억해야만 하는 기억들이 그 선과 선의 이어짐에 매달려 있다. 그 사이 사이의 넓은 공간은 소통을 의미하지만, 그 공간에 놓인 선은 철책을, 경계를 의미한다. 뚫려 있지만 막혀 있는 공간, 그것이 베를린장벽이었던 것일까?

 

공간을 위한 공간, 인간 없는 공간

 

공간은 삶은 규정한다. 인간이 만든 인위적 공간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만 어느 순간 인간을 소외시키는 공간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화의 공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한 건물 안에 동일한 공간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곳은 소통의 공간이 아니라 장벽의 공간이다. 아파트라는 공간은 서로를 배제하고 가로막는 장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동체의 삶은 존재하지 않고 동일하게 구획된 공간을 따라 사람들이 그저 살아갈 뿐이다.

 

위층에서 조금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는 피곤한 소음일 뿐이다. 우리는 아래층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행동을 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싸워야 한다. 그 싸움 과정에서 어이없게도 서로를 죽이는 일들이 발생한다. 조금만 두껍게 층을 설계하고 시공했다면 발생하지 않을 일들이 일어난다. 왜 그럴까? 사람을 위한 건축이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건설사의 부를 올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또 샛길로 빠진 것 같다. 독일의 공간 속에서도 한국의 공간이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는가 보다. 한국이 익숙하다 보니, 독일의 공간도 한국의 공간을 통해 투사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곳엔 장벽의 슬픔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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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하고 들여다보고 손을 흔들고…. 그곳엔 만남과 소통이 있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만남과 기다림과 눈 마주침이 있다. 그래서 일상은 권력을 균열내고 가로지르고 해체하고 전유하는 것이다. 장벽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의 평범한 사람들이 나누는 악수에 연대의 일상이 시작되는 것이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장벽 넘어 엿보기가 서로를 알아가는 앎의 일상이 시작되는 것이고, 장벽 넘어 서로를 마주보며 흔드는 손 인사에서 화해의 일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일상의 힘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은 이제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전승된다. 일상의 경험이 기억으로 전승되고 전승된 기억은 일상의 진일보된 실천으로 확대된다. 권력은 그런 일상의 경험들을 방지하기 위해 방벽을 쌓는다. 아예 경험마저 사라지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기억이 남아 있다면 그 기억을 거세하기 위해 개입한다. 그 수많은 법과 제도를 통해, 강권과 폭력을 통해 그렇게 사라지게 만들려고 분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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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강압에 의해, 아니면 생계를 위한 벌이를 위해 사람들이 장벽을 쌓는다. 그리고 그 장벽을 지킨다. 사람들이 지나가지 못하도록, 그들이 대화하지 못하도록, 그들이 눈 인사 하지 못하도록…. 하지만 그 경계와 감시 속에서도 장벽을 쌓는 사람들은 건너편을 볼 수 있으며, 그 장벽을 쌓는 사람들은 대화할 수 있으며, 그 장벽을 쌓는 사람들은 눈 인사를 보낼 수 있다.

 

경계는 가로막는 선이면서 서로를 잇는 선이다. 모순적인 경계는 근대를 획정 짓는 가장 간명한 단어였지만, 그 경계는 또한 근대를 해체하는 희미한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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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엄한 군인의 눈초리를 보라. 권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자세를 보라. 그의 모습엔 권력의 근엄함이 삼엄한 경계의 눈빛이 가득하다. 그 뒤엔 그저 일상의 평범한 일인 듯이 사병들이 벽을 쌓고 있다.

 

이 평범함과 독특함의 불균형적이며 균형적인 한 컷의 사진…. 이것은 장벽의 역사가 무엇이었는지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갈라놓으려고 했던 장벽건설의 욕망은 근엄하지만, 사방을 경계해야만 했던 권력의 유약함을 보여준다. 허름한 복장의 사병들, 그들은 아무런 힘도 없는 로봇 같은 존재로 보이지만 실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끝내 그 장벽을 허물었다.

 

이곳에 걸려 있는 사진들은 슬픈 그림들의 상징적 집합이다. 인위적으로 떨어져야만 했던 슬픈 역사를 한 컷의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는 상징이다. 그 헤어짐의 역사 위에 눈물이, 핏자국이, 땀방울이 배어 있다. 그 시련의 시간이 장벽에 균열을 내고 서서히 무너뜨리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지금의 소통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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