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⑧ 한스 요아스

2009. 5. 16. 13:53theory & science

창조적 분투로 역사의 진보에 개입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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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⑧ 한스 요아스

Hans Joas

 

1948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같은 대학 교수를 거쳐 지금은 막스 베버 연구소(MWK) 소장과 미국 시카고대 교수를 겸하고 있다. 미국 뉴욕 뉴스쿨(NSSR)의 테오도어-호이스-교수, 스웨덴 고등사회과학원(SCASSS)의 에른스트-카시러-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세계사회학회(ISA) 부회장을 맡고 있다. 프래그머티즘과 해석학, 비판사회학의 다양한 흐름들을 결합하는 사상과 학문 세계를 발전시켜 왔다. 저서로 <행위의 창조성>, <가치의 생성>, <전쟁과 근대>, <사회이론>, <전쟁의 억압> 등 10여 권을 출간했고, 이 가운데 <행위의 창조성>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사회 규칙과 규범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경우 행위자들은 새로운 행위습성과 관계 맺는 방식을 세우기 위해 분투하게 된다. 위기 상황에서 행위의 창조성은 최고조에 달한다. 진보주의자가 할 일은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자로 역사과정에 개입하는 것이다.

 

» 한스 요아스

한스 요아스는 사회 정의와 보편적 인권, 평화와 민주주의의 실질적 구현을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구해온 진보적 지식인이다. 그는 클라우스 오페, 악셀 호네트 등 비판적 학자들과 함께 학문 활동을 해왔을 뿐 아니라, 노동조합과 진보 정당, 시민사회의 흐름들에 관계하면서 사회 현실에 참여해왔다.

 

요아스의 학문 세계는 서구의 다양한 지적·이념적 전통들을 독특하게 결합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평등과 정의라는 사회주의적 가치와 그에 상응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흐름들, 그리고 인간의 삶의 체험과 해석으로부터 생성되는 의미 세계를 이해하려는 해석학적 전통을 진지하게 수용했다. 또한 근대 독일의 정신과학과 역사학에서 발전된 역사주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해 소박한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사회이론을 역사적 관점에서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발전 과정 전체를 관통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듀이·미드·제임스·퍼스 등으로 대표되는 프래그머티즘의 전통이다. 프래그머티즘은 인간 행위의 내적 복잡성과 역동적 과정을 규명하는 것을 철학과 사회과학의 핵심 과제로 설정했다. 여기서 모든 인간은 사회구조적 환경과 문화체계 안에 놓인 존재로서, 그러나 그 자신의 지성을 통해 주어진 상황과 창조적으로 대결하는 행위자로 인식된다. 요아스는 이런 프래그머티즘의 정신이야말로 민주적 이념을 단지 정치체제의 원리로서가 아니라 철학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있다고 본다.

 

1970~80년대 요아스는 호네트 등과 함께 프래그머티즘, 마르크스주의, 비판이론, 역사적 인간학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사회학적 행위이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후 호네트가 헤겔 철학을 미드의 사회심리학과 결합해 인정이론을 체계화하는 방향으로 나갔다면, 요아스는 듀이·미드의 프래그머티즘 행위이론에 기초해 마르크스주의와 생철학, 현상학의 다양한 현대적 흐름들을 결합한 ‘행위의 창조성’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이론은 도구적 합리성에 갇혀 있는 합리적 선택 이론이나, 인간 행위를 내면화된 사회규범의 산물로 이해하는 규범주의적 관점, 구조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인간의 의식과 행태를 결정한다고 보는 구조결정론 등이 포착할 수 없는 인간 행위의 역동성을 규명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개인과 집단의 행위양식이 습관화(habitualization)되고, 특정 국면에서 기존의 행위 습성이 붕괴되며, 새로운 행위습성이 재건(reconstruction)되는 과정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법·제도·상징 등의 형태로 존재하는 사회 규칙과 규범은 오직 구체적 상황 속에서 행위자들의 행위습성으로 실현되고 있는 만큼만 현실적이다. 그것이 행위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경우 기존의 행위습성은 붕괴되고, 행위자들은 새로운 행위습성과 관계 맺는 방식을 재건하기 위해 분투하게 된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행위의 창조성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하지만 옛것이 붕괴된 자리에 창조되는 것은 사회개혁일 수도 있고, 혁명이나 파시즘일 수도 있다. 따라서 창조성은 동시에 무거운 실천적 책임의식을 요구한다는 게 요아스의 주장이다.

 

행위의 창조성 이론은 거시적 수준에서 이른바 ‘구성이론’(constitution theories)의 관점으로 이어졌다. 이것의 핵심 주장은 사회적 규칙과 제도의 존속·변형·붕괴·창조를 철저하게 행위자들의 행위와 그들간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아스의 구성이론은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와 알랭 투렌, 앤서니 기든스, 랜들 콜린스 등의 사회이론과 많은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의 거시 사회이론의 또하나의 핵심 개념은 ‘불확정성’(contingency)이다. 이 개념에는 사회변동에 대한 요아스의 비목적론적 이론이 응축돼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역사의 전개는 사회를 구성하는 부분 요소들 각각의 고유한 동학과 그들간의 복합적 상호작용에 달려 있다. 현대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차원들(자본주의·국민국가·국가폭력·민주주의·민족주의·문화다원주의 등)은 각각의 제도적 경로의존성과 변동의 다이내믹을 갖는데, 역사와 사회변동은 이들간의 상호작용과 결합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확정성은 진보의 필연성에 대한 일체의 믿음을 배신한다. 따라서 진보주의자가 할 일은 진보의 필연성을 입증하고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자로서 역사과정에 개입하는 것, 이를 통해 불확정적 역사 운행의 방향키를 돌리는 데 참여하는 일이다.

 

이런 실천적이고 행위중심적인 사회이론은 요아스의 역사적 문제의식과 분리될 수 없다. 요아스는 2차 대전이 종식된 직후에 태어났지만, 그가 겪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광기, 나치 체제의 만행은 평생의 사유세계에 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전쟁과 파시즘이 단지 일부 악마적 집단에 의해 자행된 예외적 사건, 평화로운 현대사를 잠시 궤도 이탈한 일시적 막간극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현재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나의 부모 형제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왜 나치가, 파시스트가 되었는가. 왜 그들은 독재자를 지지하고, ‘빨갱이’를 테러하고, 홀로코스트를 묵인했는가. 전쟁은 사람들의 일상을 어떻게 바꿔놓았고, 그 흔적은 어떻게 또다른 테러와 전쟁을 불러왔는가. 무엇이 이 비극의 재현을 막을 수 있는가. 사회 정의와 인권, 평화와 민주주의가 생명 없는 문자와 관념이 아니라, 사람들의 박동하는 심장 속에 살아 있는 신념과 가치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런 질문들은 요아스의 삶과 사유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수세기에 걸친 현대의 서구 사상과 사회이론에서 발견한 것은 놀랍게도 근대의 폭력을 체계적으로 외면해온 역사였다. 현대 사상과 사회과학의 역사는 이런 문제들과 의식적으로 대면하는 것을 억압하고, 그것을 어떤 일탈적이고 병리적이며, 악마적 현상으로 기이하게 만듦으로써 사유의 주변부로 추방해왔다. 하지만 요아스는 집단적·국가적 폭력이 모더니티의 중핵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경찰폭력과 테러, 파시즘, 독재, 전쟁 같은 폭력은 범죄학이나 군사사회학이 다루는 특수 현상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제도와 문화, 일상을 구성하는 중심적인 요소의 하나라는 얘기다.

 

역사의 불확정성에 대해 의식하고 있는 자라면, 그와 같은 폭력이 민주적 통제를 벗어나 인권과 민주주의, 헌정질서를 붕괴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결코 배제해선 안 된다.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막을 수 있는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믿고 열망하면서 역사에 대한 멜리오리즘(meliorism·세계개선론)적 개입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요아스는 말한다.

 

신진욱/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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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욱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한스 요아스의 지도 아래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로 있다. 사회학적 권력론과 폭력론, 프래그머티즘과 해석학적 방법론, 정치담론과 이데올로기, 사회운동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시민>, <상징에서 동원으로>(공저)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참여사회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사등록 : 2009-05-15 오후 10:38:16 기사수정 : 2009-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