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정치’에서 진보개혁의 ‘희망 찾기’

2009. 5. 16. 13:58파놉틱 정치 읽기

‘일상의 정치’에서 진보개혁의 ‘희망 찾기’

- 바보야, 문제는 바로 일상이라고,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


* 이글은 2008년 5월 14일 작성되었고, PNC 오픈리포트(www.pncreport.com)에 게시된 글이다.


‘쇠고기 정국’이 뜨겁다. 예측하지 못한 현실 앞에 정치권과 언론은 허둥대기 바쁘고, 변화하는 현실을 규정하기에 급급해 하고 있다. 급기야 이명박 대통령은 "소통문제에 있어 다소 부족한 점이 있지 않았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MBC 뉴스데스크 2008.5.13)"라며 ‘정치의 실패’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25%의 지지율 앞에서 배겨낼 재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세상이 너무나 빨리 변화하고 있으나, 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정치권에게 지금의 현실은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일상일 수밖에 없다. 인터넷과 문자로 무장한 10대들의 외침은 생경스러운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무엇이 다른가? 20~40대까지 인터넷과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선과 국회의원 선거과정에서 그 무수한 문자와 인터넷을 통한 메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10대들이 사용하는 인터넷․문자와 20~40대가 사용하는 인터넷․문자가 다른가?

 

문제는 소통의 내용과 문화다. 코드화 된 매체의 상이성이 아니라 소통의 내용과 문화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소통은 일상의 문제를 네트워크 속에서 공유하는 공동체의 문화다. 구조와 조건으로 재단된 한계 내의 소통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상력과 의견 개진을 통한 놀이의 광장이 바로 그들의 소통의 장이다.

 

그들의 자율적인 행동을 규정하여 박제화 된 단어로 표상하려는 언론과 지식의 욕구는 중단되어야 한다. X세대, N세대, 88만원 세대, 이제는 2.0세대라는 단어의 상자 안에 이들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즐거운 소통의 문화를 가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몫은 10대들에게 사회의 구조와 조건을 인내하고 감수하며 살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386세대의 ‘격세유전’으로 지금의 세대를 지칭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수도권에 출마한 386 출신들은 유권자로부터의 ‘인정투쟁’에서 ‘백전 구십패’였다.

 

지난 P&C Report 첫 글에서 진보개혁진영의 ‘새로운 정치의 구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 방향은 ‘대중의 일상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치’이며, 이를 위해 진보개혁진영 내에 깊숙이 뿌리박힌 습속(habitus)을 ‘해체’하고, 정당정치의 복원을 주장했다. 정당정치의 복원을 위해 첫째, 가치와 실천을 둘러싼 치열한 토론을 전개하는 의견그룹의 활성화를 통한 ‘공론의 정치’ 즉 공화제 원리의 구현, 둘째,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균형적 융합을 위한 ‘개별사안인준투표’ 방식의 도입을 통한 정체성의 확립, 셋째, 정당연구소의 강화를 통한 진보개혁진영의 인프라 구축을 제안했다.

 

필자는 지속적으로 ‘일상의 정치’에 주목해야 함을 강조했다. 지난 글을 환기하면, “대중의 일상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활발하게 권력을 ‘가로지르고, 단절시키고, 뒤틀고, 꼬이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대중의 일상을 반영하지 못하면 (권력은)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에 불과하다. 대중은 일상 속에서 그렇게 권력과 지배를 ‘전유’(appropriation)하며 새롭게 구성하는 존재다.”


일상의 정치' : 뉴타운(newtown)과 AI(Avian Influenza)를 지나 쇠고기 협상까지


우리는 최근 2개월 동안 일상의 문제가 정치를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명증하게 확인할 수 있다. 4월 총선의 핵심이슈는 정치가 아닌 뉴타운이었다. 수도권 선거의 향배는 뉴타운 공약으로 좌우되었다. ‘거짓공약’으로 드러났지만, 그것이 서민의 삶 증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일상의 대중들은 이것에 열광했고 개발을 ‘메시아’로 받아들였다.1) 삶의 곤궁함 속에서 유일한 출구는 개발을 통한 소득의 증진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개발이 아니라 바로 소득의 증진, 그 문제였다. 하루하루 나아지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 좀 더 나은 미래를 갈구하는 욕망이 개발이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터져 나온 것이다.

 

전국적으로 AI가 창궐하고 있다. 그 핵심원인은 근본적으로 환경문제에 대한 정부 인식의 부재와 함께 국가방역체계의 부실함이었다. 전국의 축산 농가는 FTA 체결 이후 삶의 희망을 상실했고 AI 창궐에 의해 정성들여 키운 닭과 오리를 생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 아닌 공간은 이제 ‘배제의 공간’이 되어 가고 있다. 농촌의 일상은 희망 없는 하루하루의 삶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지경에 빠졌다. 수도권에서도 AI가 발생했다. 특히 주목되는 곳은 송파구 문정지구이다. 개발의 욕구가 수도권에서 AI를 만들었다.2) 개발 앞에서 어떠한 고려도 필요치 않았다. 부동산을 통해 이익을 창출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서민들은 그마저 없어서 ‘합리적인 행동’을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제 일상의 문제는 ‘쇠고기 협상’ 문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먹는 문제에 대한 정부 무능에 대한 총체적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그 시발은 10대의 중․고등학생들이었다. ‘죽음의 트라이앵글(수능, 내신, 논술)’, 그리고 ‘0교시’, ‘영어사교육’으로 이어지는 지옥 같은 일상을 버티는 힘은 바로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희망이었다.3) 또 이들은 급식세대(1995년부터 급식 실시)이기도 했다. 초등학교부터 같은 반 친구들과 한 끼 식사를 매일매일(휴일은 빼고) 같이 해왔다. 광우병의 공포는 감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 버텨왔던 학교생활에서 이제 광우병 고민까지 하게 되다니... 그들의 인터넷과 문자에 ‘쇠고기’ ‘광우병’이라는 단어가 터져 나온 것은 당연하다.

 

대중들의 일상은 먹고 자고 입고 살아가는 반복이다. 가장 원초적이며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일상 속에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의식주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것의 반영물인 문화였다. 이 문제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변화해왔지만 그 본질의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 ‘보리 고개’의 문턱에서 새마을운동을 통한 산업화․근대화는 배고픔의 일상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었고, 집 없는 설움에서 청약통장은 작은 보금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일상의 희망이었고, 양극화의 시대에 개발과 성장의 담론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일상의 희망이 되고 있다.

 

이 모두 부질없는 것이라고, 위정자와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항변한들 그 항변으로 서민과 중산층의 일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민주화운동, 시민운동, 제3의 다양한 운동들이 시대의 뒤틀린 과녁을 조정하며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 과중한 역할을 수행해 왔지만, 그것이 실질적인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 역사의 궤적이 진보개혁진영의 정치력 부재, 철학과 가치의 부재로 드러난 것이다. 이제 서민과 중산층의 일상의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 그것이 진보개혁진영 정치력의 보고로, 새로운 철학과 가치의 토양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일상의 주역인 서민과 중산층이 진보개혁진영의 탄탄한 주도 및 지지 세력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역동적인 역사의 주체들이었기 때문이다.4)

 

아래로부터 분출하는 서민과 중산층의 일상의 분노와 슬픔, 애환과 고통, 청원과 고발을 정치화 해야 한다. 진보개혁진영을 대표하는 당(?)의 핵심역량은 이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교육, 부동산, 일자리, 환경 등 핵심 의제를 당의 철학과 가치에 전면적으로 담아내야 한다. 번수입에 대한 공평 과세와 국민이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분배체계를 통한 전반적인 소득의 개선도 이제 진지하게 고민되고 구체적인 제도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구조적으로 변화되고 있는 계층의 분화와 이에 따른 사회의 변화에 조응한 당의 지지세력 재구축 문제도 진보개혁진영의 중점적 과제일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이 변화의 과정이 ‘당의 재창조(reinvent new party)’로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고민의 방향과 세 가지의 전술


고민의 방향 :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적 가치의 실현(사회적 책임에서 사회적 연대까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요구는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다중의 욕망일지도 모른다. 사회경제적 구조의 압박과 이로 인해 억눌린 자아 속에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욕망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개인의 자유를 도덕적 윤리로 강압할 수 없다. 일상을 살아가는 대중들의 욕망을 도덕주의적 담론으로 가로막을 수 없다. 개인의 자유와 대중의 욕망은 지속적으로 정치의 장에서 표출되어야 한다. 새로운 가치로 무장한 ‘뉴레프트 노선’은 이렇듯 개인과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공동체를 위해 사회적 연대를 실현하는 새로운 철학과 가치를 구성할 필요성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번 촛불집회는 이런 모습을 형상화한 좋은 선례라고 생각된다. 다양한 방식의 개인적 가치의 표출은 국민 건강권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책임과 연결되었고,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수정하기 위한 실천의 행동은 조직 동원 방식이 아닌 자연스러운 사회적 연대로 구체화되었다.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 책임으로 연결되고,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사회적 연대로 결실을 맺는 촛불집회의 모습, 그것을 정치로 전환시켜는 지혜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적 연대는 강령과 같은 구호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자리에서 밝혀진 촛불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파업현장의 연대가 단지 노동자의 권리장전의 강령으로 실현된 것이 아니라, 노동으로 단련된 동지의 어깨를 보면서 확인되는 것처럼 말이다.

 

좌우의 이념을 넘어서자는 것도 과거적 발상이 아닌지 되물어봐야 한다.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경전을 둘러싼 ‘해석투쟁’의 연장이 아닌지 말이다. 변화된 현실은 개인적 자유의 확대라는 욕망으로 분출되고 있다.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일상의 고통은 다중의 불특정한 연대의 촛불을 통해 분출되고 있다. 이제 21세기 진보개혁진영은 사회적 책임부터 사회적 연대까지를 아우르는 그래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가치가 동시에 구현되는 새로운 길을 구성하는데 본격적으로 착수해야 한다. 그것이 진보개혁진영의 향후 방향에 대한 핵심화두가 되어야 한다.


세 가지 전술5) : 소통, 미디어(media), 일상


소통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소통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서 소통은 핵심적이다. 국민 또는 지지자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세력은 그 순간 정당의 정통성을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명박 현 대통령도 국민과의 소통에서 실패했다고 자인했다. 정치권력은 지속적으로 국민과의 소통에서 실패를 지속하고 있다.

 

권력은 결코 개인의 고유특성이 아니라, 집단에 속하는 것이고 집단이 함께 가지고 있을 때 존속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간(間)주체성을 의미한다. 어떤 세력이 권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다수의 사람으로부터 다수의 이름으로 행동하도록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위임된 권력인 것이다. 그것이 국민이라면 국민의 이름으로 위임된 것이 대통령 또는 정부의 권력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는 권력을 획득하는 순간 권력의 간주체성은 잊어버리고 권력의 현상인 지배만을 행사한다. 그것은 ‘강권(폭력)’일 뿐이다. “촛불집회 주동자를 구속하겠다”, “인터넷 괴담을 퍼뜨린 네티즌을 조사하겠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권력을 위임한 국민의 다수는 쇠고기 문제를 재협상하라고 하는데도 말이다.

 

소통의 방식과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진보개혁진영이 대안세력으로 국민 앞에 등장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소통의 부재를 의미한다. 다시 한번 제기하건데 진보개혁진영의 정당은 대의민주주의 하에서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도입․실행해야 한다. 그것은 당내 ‘의견그룹의 활성화’와 핵심 의제에 대한 전당원의 ‘개별사안인준투표’ 방식의 도입이다. 예를 들어, 민주당의 경우 이제 제발 좌․우 이념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의 중단이니, 질서 있는 토론을 하자는 식의 제한적 소통방식을 지양해야 한다. 이념을 둘러싼 논쟁이 소모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상의 문제와 무관하기 때문이며, 질서 있는 토론을 전개하자는 것은 당 기득권 세력의 영토 내에서만 토론하라는 것으로 밖에는 달리 들리지 않는다. ‘백가쟁명’ 식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하며, 무한한 상상력이 분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민주당에 당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열린 마당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국민들과는 미디어를 통한 일상적 소통의 구조의 만들어야 한다. 미디어와 여론조사는 이제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가 되어버렸다.6) 미국은 ‘영구 캠페인’(permanent campaign)으로 지칭되는 미디어정당의 시대에 이미 돌입해 있다. 방송, 신문, 인터넷 등 대중매체를 통한 지속적인 소통과 정당의 캠페인이 쉼 없이 작동하고 있다. 미국 예비선거에서 ‘파워 블로거’들은 중요한 손님으로 초청되고 있다. 이제 진보개혁진영의 정당도 미디어정당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즉 정당은 미디어정당(당 조직)과 정치․정책정당(원내와 연구소)을 중심으로 재편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통해 당원․국민들과 쌍방향 소통이 일상적으로 전개되는 지속 혁신하고 새롭게 변모된 정당(‘당의 재창조’)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계속 강조한 일상의 문제이다. 당의 핵심 의제 구성의 중심을 국민의 일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세력에 열광하는 국민들은 자신을 대변하는 권력을 몸으로 지켜낸다. 2004년 탄핵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치세력에 대한 일상의 불신이 축적되기만 하면, 국민들은 어느새 권력을 횡단하고, 뒤틀고, 우회하며 권력이 실행하려는 기획을 아래로부터 허물어간다. 파병, 대연정, FTA로 내달린 참여정부는 30%대의 지지율로 아무 것도 실행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바 있다. 역대 최대의 격차로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이렇게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대중들의 소통은 이렇게 삽시간에 번지고 퍼져나간다. 일상에 천착하지 못하는 정당은 그것이 얼마나 지고지순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한들 현실에 발 딛을 수 없다. 따라서 일상의 문제를 전담할 수 있는 특단의 구조와 대책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단, 조직 하나 만든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구성해가는 것이다. 국민들은 지속적으로 정당의 궤적을 추적하고 있다. 특히나 미디어와 인터넷이 발전된 대한민국에서 정당의 행위는 일거수일투족이 일상의 그물망에 걸려들게 된다. 국민은 과정을 중시할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구성해나가는 가에 대한 것이다.

 

이제 ‘일상의 정치’에서 진보개혁진영의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 “일상, 그거야 항상 고민하는 것 아니야”라고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 전쟁의 영웅 아버지 부시를 이긴 클린턴의 캠페인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고 일갈한 것이었다. 대중의 욕망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천착하는 정치가 절실하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 상황의 캠페인은 “바보야, 문제는 바로 일상이라고,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이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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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도권에서 야당 출신들이 당선된 지역을 보면, 대체로 과거 재개발의 폭탄 속에서 서울을 떠나야 했던 서민들이 새롭게 정착한 지역들이었다. 이들에게 재개발은 소득의 증진이 아니라 삶의 터전의 박탈이었기 때문이다.


2) SH공사는 작년 9월 11일 문정지구에서 닭 등의 가축을 키우는 축산업자에게 분양상가 입주권이나 16.5㎡(5평) 이하의 상업용지 지분권을 공급한다고 밝혔다. 공사의 보상 근거는 토지보상법 시행규칙 제49조에 나와 있는 닭 200마리, 토끼 150마리, 오리 150마리 등을 키우는 허가받은 축산업자다.『스포츠조선』, 2008. 5. 14일자.


3) 이것도 희망 없는 희망이다. 위계적 피라미드로 구조화 된 대학서열체계 최상으로의 진입은 소수에게만 가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4) “우리는 단순히 수동적인 수신자들이나 소비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적 세계로부터 부단히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어내고, 지배적인 메시지에 저항하며, 새로운 사회적 표현 양식들을 개발해 낸다. 우리는 지배 문화의 사회적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그 세계의 권력들을 단순하게 묵묵히 따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배문화 내부로부터 우리는 대안적인 하위문화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새로운 집단적인 표현 네트워크들을 창조해 낸다.” 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조정환․정남현․서창현 옮김,『다중』(서울: 세종서적, 2008), p. 316. 우리는 최근 아마도 촛불집회를 통해 대안적인 하위문화를 목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5) 전술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추후의 글로 기약할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기본적인 방향성 차원에서만 다룬다.


6) 미디어와 여론조사는 모순적 역할을 한다. 선거는 정해진 임기에 따라 투표를 통해 권한이 위임된다면 미디어와 여론조사는 일상적인 대의(代議)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역으로 미디어와 여론조사는 다수의 의견에 순응하게 하거나 조작적으로 이용되는 문제점도 동시에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