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공간과 만나면 11-2) 유대인 박물관: 얼굴들과 쇠 마찰음

2009. 5. 20. 14:02공간 일상 담론

기억이 공간과 만나면

 

11-2) 유대인 박물관: 얼굴들과 쇠 마찰음

 

구불거리며 유대인의 삶을 살펴보는 길

 

*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humanpark.com

 

그들의 삶이 구불구불 힘든 궤적이었듯이, 이 곳 건물 내부의 계단은 가파르고 험난하다. 천장을 잇는 기둥들의 모양도 직선이 아니라 사각으로 서로 얽힌 듯 배치되어 있다. 건물 내부를 설계했던 사람들의 그 긴장감이 느껴진다. 다른 건물과는 다른 배치, 다른 설계, 다른 접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만큼 설계자는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이것을 뇌리에 구상했을 것이다.

 

이 계단을 걸어 올라가려면 숨이 찬다. 유대인의 삶의 궤적을 보기 위해서는 이런 숨이 찬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암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곳을 살펴보는 시작은 계단 꼭대기부터 시작되었다. 맨 위층부터 아래층으로 서서히 유대인들의 삶을 볼 수 있도록 전시가 되어 있다. 이 삶을 보기 위한 정상 오르기는 힘든 여정이었지만, 그들의 실질적 삶의 궤적을 보는 과정은 평면을 걷는 안락함으로 바뀐다. 그렇게 가파름 속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려오는 과정에서 그들의 삶을 고민 속에 밀어 넣는다.

 

슬픈 얼굴들

 

*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humanpark.com

 

슬픈 얼굴들이 다가온다. 일상의 평온함으로 가득찬 유대인들의 표정에서 슬픈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렇게 다른 이들과 비슷하게 때로는 웃음에 때로는 슬픔에 때로는 노여움으로 둘러싸인 일상에서 그들은 웃고 울고 깔깔대고 우울해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것이다. 때로는 욕망에 사로잡힌 방황하는 인간으로, 때로는 윤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간으로, 때로는 남에게 부정을 하기도 하고 선을 베풀기도 하면서,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것이다.

 

*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humanpark.com

 

어둠 속에 빛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어둠은 그들을 짓눌렀던 학살의 역사이며, 그 빛은 각 개인이 자유롭게 삶을 향유하고자 했던 열망이었을 것이다. 아이에서부터 청소년 청년 장년 노년에 이르는 삶의 연대기 속에서, 개인 가족 친구에 이르는 연대의 공간 속에서 전개되는 삶의 관계망들은 광폭한 학살의 기획 속에서 갈기갈기 해체되어버렸다. 어둠이 빛을 이겼고 빛을 통해 드러나는 그들의 모습은 어둠이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다.

 

누가 학살의 주범인가? 히틀러인가 괴벨스인가 나치당인가 나치친위대인가 나치에 부역한 독일인들인가? 그들에게 학살은 어떤 의미였을까? 유토피아로 가는 열쇠로 인식했을까? 아니면 그저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너무나 두려워서 방관해버리는 현실이었을까? 아니면 저항이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알아버린 절망이었을까?

 

*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humanpark.com

 

내 발 아래로 밟히는 무수한 얼굴들…. 모두들 웃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나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쇠로 만들어진 얼굴모양이 무수하게 깔려 있다. 이들은 희생당한 유대인들 한명 한명을 상징하는 것일게다. 그리고 그 당시 많은 이들이 또한 나와 같이 그들의 삶을 밟으며 나의 삶을 보전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길을 걷는 것 자체가 비틀거림이며 휘청대는 것이다. 걷기조차 힘들고 걸을 때마다 나는 쇠 마찰음을 들어야만 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 쇠 얼굴들 위로 빛이 밝게 들어온다. 비틀거리는 걸음, 걸을 때마다 나는 마찰음, 그리고 차가운 질감, 내려오는 빛이 만들어내는 이 느낌은 무엇일까?

 

나는 왜 길을 걸어보려고 했던 것일까? 이곳에 이것이 있으니까. 알지도 못하면서 밟았던 나의 행동이 당대의 행동은 아니었을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아니 당연한 것처럼 지나쳐왔던 것이 당대의 행동은 아니었을까?

 

갑자기 최근에 읽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중 일부 내용이 생각난다.[함규진 옮김,『유동하는 공포』(서울: 산책자, 2009)] 공포에 대한 내용들이다. 그 중에 섬뜩한 공포가 드러난다. 관료체제가 내장하고 있는 공포말이다.

 

나치 독일 당시 친위대 중령으로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이히만이란 자가 패망 후 남미로 망명했다가 이스라엘 정보부에게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재판과정에서 전개된 아이히만과 그 변호사의 대표는 공포 그 자체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동기는 오직 일을 잘 처리하려는 것-즉, 상관들이 만족하게끔 하려는 것-뿐이었음을 법정에서 피력하려 했다. 그의 동기는 자기 행동의 대상들이 갖는 본질이나 운명과는 전혀 무관했다. 말하자면 아이히만 개인으로서는 유대인에게 악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며-그와 그의 변호사는 그가 아무런 악의도, 증오도 갖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 상황 자체가 악의와 증오의 구현일 수밖에 없었지만 - 그 개인으로서는 집단학살은커녕 한 건의 살인조차 지켜볼 만한 배짱도 없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아이히만과 그의 변호사는 6백만 명의 죽음이 단지 자기 책임을 다 하려는 과정에서 빚어진 부수적 효과일 뿐이라고 밝혔다.…“악의는 없었다”는 말인즉슨, 최선의 효과를 노리고 자기책임에 따라 행동할 때는, 즉 다른 누군가의 의도, 조직 상급자의 의도를 대행할 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말이다. 반대로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잘못’이다.” 위의 책, pp. 104~105.

 

공포스럽다. 그 학살 실행자들의 궤변이 살기 위한 변론인지 아니면 실제 그런 정신상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공포스럽다. 주어진 명령을 실행하면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해야 할 일이라는 것. 만약 현장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거부할 수 있었을까? 거부는 명령 불이행을 의미하고 그것은 또 다른 죽음을 암시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학살은 진행되었다.

 

아이들의 일상과 유대인박물관

 

*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humanpark.com

 

이 슬픈 역사 탐방 속에서도 피곤함은 만사를 귀찮게 한다. 다리는 천근만근이고 몸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전시물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너무나 미안한 행동인 줄 알면서도 빨리 지나쳐서 나가고 싶다. 그런 와중에 유대인박물관을 찾은 견학 온 학생들의 모습은 천태만상이다. 어떤 학생은 하나라도 더 보고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무언가에 정확히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태만의 무리들은 인솔교사들과 해설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몇몇 낙오자들은 아예 질펀하게 앉아서 졸음에 겨워 헤매고 있다. 이런 모습들이 아마 우리네 일상일 것이다.

 

아무리 그것이 의미 있고 알아야 할 역사라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그런 것은 아니다. 지나간 역사의 회상을 통해 앞으로의 미래를 만들려는 교사들의 프로그램도 다양한 학생들의 일상적 행위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 얼마나 피곤하고 따분했을까. 그 학생들에게는 지겨운 여정일 뿐이리라. 어쩌겠는가 일상이 그런 것인데….

 

이렇게 우리의 2박 3일 베를린 일정은 마무리되어 갔다.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해 준 짧지만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제 우리는 통일 이전 동독지역으로 이동한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라이프찌히’다. 그곳에도 또 아픈 역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게다.

 

*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w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