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5. 23:18ㆍtheory & science
미완으로 끝난 ‘10월 혁명 가치’의 재발견 | ||||||
[Dossier] 착취와 억압을 넘어 혁명으로 4 볼셰비키혁명은 권력 쟁취가 아닌 권력 창출 스탈린 체제, 차르 유산 동원하다 몰락 자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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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9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 후 2년 동안 다른 공산주의 국가도 도미노처럼 차례로 붕괴했다. 20세기에 우리가 경험한 이 중대한 사건은 빈곤과 억압이라는 흐릿한 기억만을 남겨둔 채 미디어들로부터 다시금 외면당하고 있다. 이 사건은 과장과 미화를 넘어 해방의 역사 속에 새로운 가능성이자 한계로서 다시 자리매김돼야 한다. 그 작업을 볼셰비키혁명에서부터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10월 혁명은 20세기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1) 10월 혁명은 수많은 논쟁과 이데올로기적 주장을 낳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삽화적인 사실이나 무자비한 비난을 현실과 혼동했다.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을 장악한 사건으로 각인된 10월 혁명의 이미지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총체적인 격변과 혼란이 1917년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군대와 경찰, 국가기구, 경제, 정치의식과 여론이 모두 혼돈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소비에트라는 무대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그 무대 장식이나 대사와는 무관한 것들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놀라움으로 가득 찬 역사가 펼쳐졌다. 이 역사의 무대는 폭력적으로 구체제를 해체하려는 힘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체제를 구성하려는 힘이 공존하는 위기의 공간이었다.
모든 체제들은 과거든 현재든 스스로를 개혁하고, 체제의 위협 요소를 제거하면서 역동적인 새 활력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체제의 이데올로기는 자화자찬에 만족해버릴 때 자주 맹목적으로 변한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현 체제가 사회적·경제적 요인들로 인해 알맹이는 텅 비어버리고 껍질만 남아버린 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끔 만든다. 마치 극중에서 무대배경과 전혀 무관한 사건이 펼쳐지는 것과 같다. 다른 시대에 다른 극을 위해 세워진 무대에서 그와 상관없는 연기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게다.
위기와 해체는 그 자체로 온전히 역사를 구성한다. 한 시대, 한 체제에 자주 종언을 고하기도 하는 위기와 해체는 만약 내적·외적 힘이 구비되면 때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기도 한다. 상당수 지식인들은 볼셰비키에 의해 ‘완수된’ 혁명을 언급하면서 암암리에 혁명에 대한 그들의 ‘책임’을 묻고 있다.
‘혁명’ 비판은 역사 읽기의 무지
이러한 방식의 역사 읽기는 문제가 있다. 이들의 역사 읽기는 1917년 9월과 10월에 러시아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들에 대한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고 권력은 완전히 무능 상태에 빠져 있었다. 러시아 전체가 대규모 농민 폭동과 내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한마디로 완전한 혼돈이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혁명은 이처럼 점점 더 격렬해지는 혼돈과 민족국가로서 러시아의 완전한 소멸이라는 전망에 대한 당연한 응답이었을 뿐이다.
요컨대 위기를 촉발한 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다른 세력들이 절망적으로 상황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다가 오히려 위기를 심화하는 과정에서 볼셰비키혁명이 근본적 위기를 해소한 것이다. 몇몇 알려진 상식과는 반대로, 1917년 2월 차르 체제의 몰락 후 들어선 임시정부로 대변되는 당시의 공식적인 정치 체제는 단지 무대배경에 불과했다. 이미 ‘힘이 다한’ 임시정부는 무능력했다. 당시 국가권력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국가권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볼셰비키가 누군가로부터 ‘권력을 쟁취했다’고 말하는 건 현실에 대한 완전한 무지만을 보여줄 뿐이다. 쟁취할 권력 자체가 애초부터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새롭게 권력을 창출해야 했다. 레닌이라고 불리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가 썼듯이, 초기에 볼셰비키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사회주의’, ‘혁명’, 특권과 작위(귀족과 관료) 폐지 같은 슬로건만 있었을 뿐이다. 성공의 열쇠가 있다면, 그들이 농민에게 자신의 땅으로 여기고 경작하고 있던 토지를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는 점이다. 만약 임시정부가 자신들이 채택한 이런 조처를 취했더라면 몰락의 길을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주 대표들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갔다. 임시정부는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정확한 상황 판단에서 잘못된 결론이 도출된 셈이다.
물론, 확실히 사회주의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역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1917년 2월에서 11월 사이 동맹을 맺은 정당 사이에 빚어진 비극의 드라마는 이런 몰이해에서 비롯됐다. 정국의 혼란은 더욱 확산됐다. 정당들은 더욱 악화되기만 하는 상황을 이해하고 통제할 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행동을 개시하거나 권력을 쟁취하는 정당은 엄청난 위기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임시정부에 대항해서 군주제를 옹호하는 백군이 세력을 결집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총체적 변동이 심각한 위기와 격변을 몰고 온 탓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에서 관료 체제로
결국 승리를 거둔 볼셰비키는 초반에는 간판만을 내건 형식적인 권력에 불과했다. 당은 쉴 새 없이 벌어지는 사건들과 대규모로 밀려드는 새 당원, 처리해야 할 수많은 업무을 감당할 수 없었다. 혁명 전의 경험이나 당의 성격만으로는 이런 상황을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부적으로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당이 어쨌든 존재했지만 이 격변기를 통과해 살아남진 못했다. 그 원인은 어쨌든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나게 된 내전에 있었던 게 아니라 엄청난 양의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에 있었던 것이다. 1921년 ‘전시 공산주의 체제’가 끝나고 신경제계획(NEP)이 시작되기 직전, 레닌은 새로운 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전에서도 한 차례 강력한 행동력을 발휘했던 볼셰비즘은 이제 속 빈 강정에 불과했다.
1921년 내전이 끝나고, 여전히 같은 무대에서 다른 극이 펼쳐졌다. 볼셰비키는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 시기와 관련해서 많은 저서들은 그 후의 시기에 대해서도 볼셰비키라는 유령을 불러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미 무대에서는 혁명적 정당의 관리 계급으로의 전환이라는 새로운 극이 상연되고 있었는데 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무대 위에선 두 개의 상반되는 시나리오가 대립하고 있었다. 내가 <소비에트의 세기>에서 밝혔듯이 레닌과 스탈린 사이의 대립은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던 두 정치 프로그램 간의 충돌이었지, 같은 당의 두 정파 간 충돌은 아니었다. 레닌은 내전 후에 전혀 달라진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세력의 정치적 프로그램을 재정의하려 했지만, 스탈린은 자기 나름의 국가 개념을 고안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특히 스탈린의 국가 개념(자신을 수반으로 하는)은 볼셰비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기초 위에 구축된 것으로서 러시아 역사에서 영감을 받아 개인적 권력 구축을 목적으로 만들어낸 관점이었다. 스탈린은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재현하려고 했다.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이어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의 구성을 둘러싼 논쟁에서 이 두 개의 정치 프로그램은 끝내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충돌하게 된다.(2) 이 논쟁은 결국 1924년 레닌이 병으로 사망하면서 막을 내린다.
레닌과 스탈린의 갈등
스탈린주의(3)는 한 체제가 노화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면서 동시에 자기 개혁에 무능했던 이 체제가 ‘태생적으로 몰락이 예고된’ 체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한 명의 전제군주를 보위하기 위해 구축된 스탈린주의 체제를 개혁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스탈린주의는 바로 자신의 정책들이 야기한 사회적 변화에 의해 몰락을 자초하게 된다.
스탈린을 연구하다 보면 혁명적 과거에 대항해 그가 끊임없이 투쟁을 벌인 것은 그 과거가 그에게 어떤 안전도 보장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혁명에서 무언가를 배우기보다는 그것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태도는 위대한 러시아소비에트연방을 위한 그의 투쟁에서 잘 드러난다. 따라서 그가 자신에게 유리한 역사적 유산만을 계승하려고 했다는 것에 놀랄 필요는 없다. 또한 그가 소련 정책의 큰 줄기를 잡을 때 전제군주 시대의 유산을 동원한 것도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오직 차리즘만이 그에게 권력 정통성의 원천이 돼주었다. 차르 체제에서는 중간 매개 없이 신에게서 직접 부여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스탈린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혹은 그 후에도 차르 체제 러시아의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체계적으로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은 차르 체제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모든 가능성을 소진한 채 힘이 빠져버렸다는 자명한 사실을 고의적으로 무시했다. 이 크렘린의 새 주인은 자신이 도입하려던 통치 모델이 위기를 초래하고 그 위기에 의해 몰락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모델로 삼으려 한 폭군, 이반 뇌제(4) 또한 나라 전체를 공포정치로 떨게 한 사람이었다.
스탈린주의 체제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영광스러운 전성기에 들어서는 순간에 나치즘의 몰락과 비슷한 운명을 맞게 된다. 강력한 지도자가 모든 종류의 특권을 누리게 된 바로 그 시점에 이 체제는 작동을 멈추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측근들은 이 강력한 권력의 허약한 실체를 알고 있었다.
스탈린주의, 나치즘 몰락 답습
이 부분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차르 체제는 정통성과 능력을 갖춘 어떤 후계자도 가지지 못했다. 반면 스탈린의 주위에는 완전히 고장난 체제를 다시 일으켜세우기 위해 일할 수 있는 순간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제주의자들’이 ‘서구인 앞에서 굽실거린다’고 고발당하고 제복을 입은 고위 관리들이 표트르 대제(스탈린-역자)가 직접 정한 순서대로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시기에, 유대인 지식인들이 제거되고 고위 책임자들이 숙청되고(레닌그라드 사건)(5) ‘하얀 셔츠’ 사건(6) 재판이 열리던 그 시기에 소련이 여전히 발전 가능성을 가진 체제라고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스탈린주의자가 되기를 강요받았던(실제로 스탈린주의자인 경우도 있었다!) 스탈린 측근 중 일부는 스탈린 사후 그가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체제를 복구하기 위해 바로 행동에 나섰다. 이 작업은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자마자 급진적인 방식으로 빠르게 진행됐다. 1956년 소비에트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주요 개혁 노선이 구체화됐다.
내가 스탈린 사후 지도부가 가장 먼저 취한 조처 중 하나가 강제노동수용소인 굴라크(gulag)의 철폐였다고 주장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듯 곧이 믿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심리적 이유로 소련을 무작정 증오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강제노동수용소 겸 소련 내무부의 복합 산업단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던 스탈린 치하의 굴라크와 스탈린 사후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집단수용소 체제를 반드시 구분할 필요가 있다.(7)
이와 관련해, 굴라크와 소비에트 체제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절대악으로 동일시해버리는 담론에 집착하는 서구인들의 태도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선구자로 떠받들었다. 그러나 솔제니친은 복고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작가동맹 기관지 <신세계>(Novvi Mir)를 중심으로 결집한 사회민주주의자와 편집장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를 증오했다. 그에 따르면 트바르돕스키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이었다. 혹시 냉전 이데올로기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이 중세 정교회 수도사를 필요로 했던 건 아닐까?
소비에트 체제는 1960년대 말부터 ‘침체기’라고 불리는 새로운 쇠퇴기에 접어든다. 이 시기는 새롭게 나타나는 변화들에 대한 모순된 대응이라는 문제를 야기했다. 국가 전체의 대규모 도시화와 현대화는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여전히 농촌 인구가 많았지만 대다수 인민이 도시에 살면서 교육의 혜택을 받고 새로운 기술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만큼 여성의 지위도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됐다. 사회 전체의 이러한 변화는 농촌 거주자에게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 도시적인 삶의 방식을 확산시켰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로 새로운 도시 사회가 탄생했다. 한편에는 차르 체제를 본떠 만든 ‘낡은’ 관료주의 국가가 있었고, 다른 편에는 이제 막 ‘새로운’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1917년에 탄생해 아직 짧은 역사를 가진 이 체제는 이미 조로증에 걸린 상태였다.
‘체제의 생명력’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와서 보면, 소비에트 체제는 위로부터 강력한 통제를 받는 중앙집권화된 관료주의 국가였다. 반면 최고 권력은 관료기구, 특히 정부 내각에 완전히 의존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내각은 최고 권력으로 하여금 자신들과 협상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조금씩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어 마침내는 최고 권력의 명령에 불복하는 상황에까지 도달했다. 자기 고유의 논리로 비대해져 괴물이 돼버린 이 관료기구는 체제의 몰락을 가져오게 된다.
중요한 점은 이 체제의 지도부가 권력을 상실했으며 상황을 통제할 능력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체제는 스스로를 개혁하고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과 정책을 마련하고 새로운 연합 세력을 구축하고 근본적인 장애물을 제거하는 등 체제를 수호하는 데 필요한 조처를 취할 능력이 없었다. 탈정치화된 소비에트 체제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명령할 힘조차 잃은 상태였다. 상징적이게도 당시 소련을 지배하던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던 힘없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이었다.
정치를 수행할 모든 능력을 상실했다는 의미에서 탈정치화는 단지 하나의 징후이기만 한 게 아니었다. 소련의 탈정치화는 체제가 되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신호였다. 일관된 정치적 활동을 추진할 능력을 갖춘 조직이라는 의미에서의 ‘지도당’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증거였다. 그런 당이 있었더라면 수많은 관료기구의 고위 관리 집단에 그토록 매달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 고위 관리들은 각 기구의 이해관계에 매달려 기업의 ‘사유화’를 통해 사장 자리를 차지하는 데에만 골몰해 있던 엄청난 수의 관료 집단을 비호하기만 했다.
소비에트의 붕괴는 변화 거부 탓
분석가, 계획 입안자, 작가들이 여러 수단을 통해 재앙을 경고했지만 지도부는 완전히 무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소비에트연방이 냉전 시기의 지나친 군비 경쟁을 감당하지 못해서 붕괴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지만, 이는 신중하게 생각해보면 잘못된 분석이다. 유리 안드로포프가 공산당 서기장을 역임한 1982~84년은 흥미로운 시기이긴 하지만 기간이 너무 짧아 결정적 변화를 가져오진 못했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경제·사회 영역에서 위급하게 요청된 개혁을 단행하고 체제를 다시금 정치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시 소련이 필요로 하던 것이었다.
소련의 몰락은 한 정치 체제가 어떻게 변화를 겪고 허황된 약속을 하고 쇠퇴하고 변화를 겪는지에 대해 많은 교훈을 준다. 하나의 체제는 침체기와 쇠퇴기를 겪다가 다시금 활력을 얻는 식으로 다양한 단계를 거치면서 변화해간다. 체제가 아직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재생의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이 다양한 단계들이 긴 사슬의 한 고리로 간주될 수 있다.
소련과 중국을 비교해보면 이런 역사적 현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체제는 확실히 비슷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 모두 침체와 쇠퇴의 시기를 거쳐 ‘대약진’을 경험했다. 반면 두 체제는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갔다.
소비에트 체제는 중국보다 훨씬 발전돼 있었지만 침체의 시기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던 중요한 개혁들을 단행할 능력이 없었다. 반면 중국은 소비에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정치 체제를 가졌음에도 엄청난 규모의 개혁을 단행했다. 중국은 같은 기간의 소련보다 훨씬 더 억압적이고 엄격한 방식으로 사회를 통제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공산주의 체제’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적절한 시기에 체제가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던 것이다.
10월 혁명의 사회주의적·해방적인 성격에는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 소비에트 국가라는 게 성립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하나의 체제가 스스로를 ‘사회주의’로 명명하고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것은 슬로건이나 공식적인 선전에 불과하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하에 존재하는 모든 형식의 체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다. 이러한 정의는 새로운 민주주의가 구축하려는 경제 체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어쨌든 이 새로운 경제 체제는 자본가나 관료 집단이 아닌 사회 전체가 운영해야 할 것이라고만 해두자.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공산당’의 지도 아래 스스로를 ‘사회주의’라고 소리 높여 선포한 것은 (다른 국가들이 세계에 알리려는 건국 신화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민과 세계 앞에서 체제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은 현실의 힘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바깥에서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스탈린 사후의 도시화하고 발전된 사회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화된 사회 속에서 공공 분야의 경영 능력을 쌓은 전문가를 포함해 모든 분야에서 이미 전문화된 관리자가 등장하고 있었다. 이 사회에서는 ‘사회주의’라는 담론을 현실과 결부해 언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이 체제는 역사의 무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차르 시대에 번성한 관료주의는 개인에게 자리를 내주고 사라졌지만 소비에트의 현실에 적응한 새로운 형태로 다시금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통해할 필요는 없다. 대신 소비에트 체제의 역사를 진지하게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소비에트는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반면 10월 혁명을 추동한 세력은 확실히 사회주의적이었다. 그들이 현실화하려 했던 이념들은 혁명의 시기뿐 아니라 체제가 해체의 길에 접어들었을 때조차도 역사적 의의를 잃지 않았다. 그 이념들이 러시아를 역사의 무대 한복판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글·모슈 르윈 Moche Lewin
번역·정기헌 guyheony@ilemonde.com
<각주> (1) 임시정부가 들어서 있던 ‘겨울 궁전’을 함락한 것으로 상징되는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은 1917년 11월 6일에서 7일 사이 밤에 이루어졌다. 이 날짜는 혁명 몇 달 후 채택된 그레고리력에 의한 것이다. 그 이전에 사용되던 율리우스력에 따르면 볼셰비키 혁명은 10월에 발발한 것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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