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23) 조반니 아리기 Giovanni Arrighi

2009. 12. 12. 16:55theory & science

 

 

 

'미국 다음’ 세계는? 패권이동 지도를 그리다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23) 조반니 아리기 Giovanni Arrighi

 

조반니 아리기는 1937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1960년 밀라노 보코니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짐바브웨의 로디지아대에서 강의하면서 이매뉴얼 월러스틴을 만나 공동연구를 진행했다. 1979년 월러스틴, 테런스 홉킨스와 함께 미국 빙엄턴대의 페르낭브로델센터에 자리를 잡고 세계체계 분석에 주력했다. 세계 자본주의의 기원과 변화를 다룬 <장기 20세기-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시대의 기원>(그린비)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모티브북)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21세기의 계보>(길)가 국내에 번역돼 있다. 그의 세계체계 분석은 월러스틴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지만, 최근 경제권력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이전했다는 사실을 더 강조한다. 지난 6월18일 볼티모어의 자택에서 지병인 암으로 숨졌다.

 

아리기는 자본주의의 변천의 동학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지금 미국의 시기에는 선별 지역을 심층적으로 포섭하고 다수 지역을 배제한 채 축적을 진행하고 있다. 문제는 더 많은 군사적 개입이 없으면 세계질서를 유지하기 어려운 탓에 결국엔 새로운 카오스가 이어질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이다.

 

» 조반니 아리기
앞서 오랜 조짐을 보이다 2008년도에 본격적으로 폭발한 세계 경제위기는 지금도 진행중이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질문들이 줄지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위기는 세계자본주의의 구조적인 위기인가? 위기는 왜 미국발 금융위기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가? 위기에 대한 세계 각 지역의 대응과 충격파는 왜 상이한가? 이 위기하에 각 지역의 사회운동은 어떤 대응들을 하고 있고 또 할 수 있는가?

 

이어지는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현 상황 아래서 그 어느 때보다 마르크스적 질문과 탐구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일시적 불균형 때문에 생기고 피해갈 수도 있는 ‘위험’(risk)의 문제로가 아니라, 내적·구조적 속성에서 나오는 진정한 ‘위기’(crisis)로 연구한 것은 마르크스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위기의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전개되었던 자본주의 위기들, 예를 들어 19세기 말의 위기, 1930년대의 위기, 1970년대의 위기와 비교하여 현재 위기가 갖는 함의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의 분석이 역사적 자본주의라는 사고와 만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며, 조반니 아리기의 중요성이 발견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는 무엇보다 ‘역사적 경향’을 통해 설명되었는데, 그 의미는 위기가 항상 그 위기를 상쇄하려는 반작용의 동학과 동시에 작용하며, 역사적으로 상이한 각 시기에 위기의 구체적 동학은 매우 상이한 역사적 해석을 통해 설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실의 역사적 자본주의 내에서 이런 위기와 위기의 해소는 무엇보다 새로운 기술적 동학의 등장, 새로운 축적 영역의 형성, 다수 국가들 사이의 경쟁과 계서제(階序制)의 동학, 계급 간 힘관계의 변화, 금융으로의 전환을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아리기의 논의의 출발점인 19세기 말~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를 살펴보자. 아리기는 19세기 말 세계 자본주의의 변화는 독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국가독점자본주의’ 모델로 환원해 설명할 수 없고, 19세기 자유무역 제국주의라 할 수 있는 영국 중심 경제질서의 쇠퇴와, 20세기 법인자본주의에 기반한 초국적 기업의 네트워크를 형성한 미국 주도 세계 자본주의의 등장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리고 이는 식민주의의 위기와 노동 계급의 등장이 가져온 영향력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리기는 월러스틴과 더불어 시작된 ‘세계체계 분석’의 넓은 틀 안에서 작업을 전개하였는데, 세계체계 분석의 강점 중 하나는 근대세계를 하나의 동일한 ‘근대’라는 시간 속에 있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근대성의 요소론이 빠지기 쉬운 근대화론의 함의와 근본적으로 단절하고, 자본주의를 중심-주변이라는 공간적 불평등을 수반하는 세계경제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역사적 자본주의가 설명해야 할 각 시기 안에서는 늘 쟁점이 남아 있었는데, 아리기는 세계체계 분석에 대해 제기된 대부분의 논쟁을 ‘비논쟁’으로 규정하면서 월러스틴에 대한 내적 비판을 통해 쟁점들을 좀더 분명히 하는 동시에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쟁점은 근대 세계체계 등장에 대한 역사-정세적 설명방식, 자본주의 고유의 동학으로 자본주의라는 시간대 속에서 중첩적으로 작동하는 상이한 시간대의 동학을 설명하는 문제, 세계 헤게모니의 교체를 내적 동학을 통해 설명하는 방식, 각 세계 헤게모니 시기의 역사적 자본주의가 갖는 차별성,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에 대한 평가 등 핵심적 논점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의 노력은 무엇보다 <장기 20세기>에 집중적으로 드러나는데, 그는 세계체계 분석이 제시하는 자본주의 장기추세에 대한 설명이 자본주의의 내적 동학에 기반한 설명이라기보다는 경험주의적 설명방식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체계적 축적순환’과 국가 간 체계의 모순적 결합을 통해 자본주의의 역사적 변천의 동학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로부터 헤게모니의 등장을 실물적 팽창과 금융적 팽창 국면으로 구분하고, 금융적 팽창과 더불어 시작되는 신호적 위기, 그리고 금융적 팽창 아래서 국가 간, 기업 간 경쟁이 촉발되고, 그 정도가 격화되면서 초래하는 최종적 위기 및 그에 따른 체계의 카오스라는 설명 논리가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 논리는 네그리의 비판을 반박하며 아리기가 강조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역사가 늘 같은 논리의 반복일 뿐이라는 ‘동일성의 영원회귀’가 아니다. 아리기는 헤게모니의 역사적 시기 아래서 자본주의가 얼마나 상이한 구조적 특성을 띠게 되는지, 그것이 내적 속성과 지리적 배치, 계급적 배치에 이르는 모든 면에서 어떻게 상이한 특징을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어떤 새로운 모순 구조가 형성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 함의를 우리는 지금의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과정에서 발생하는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위기가 갖는 특이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위기는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국의 자본 수익성 위기에서 시작된 하나의 과정의 끝인 셈인데, 아리기에 따르면 1980년대부터 전개된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이 수익성 위기를 금융적 팽창을 통해 반전시키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나아가 기술혁신에 기반한 새로운 체계적 축적체계의 수립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금융적 팽창은 1990년대 미국 ‘신경제’처럼 짧은 경이적 순간인 ‘벨 에포크’를 동반할 뿐, 오히려 체계 전반의 교란을 키워 위기는 점점 더 체계 전체로 확산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19세기 말~20세기 초와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에서 다르다. 그 때문에 세계 자본주의가 새로운 헤게모니의 등장과 더불어 새로운 순환을 쉽게 되풀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 특징들에는 세계의 금융과 군사력이 여전히 미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 발전주의 체제가 폐기됨에 따라 배제된 주변부 지역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 부담을 다른 지역으로 전가하거나 노동에 부담을 전가하는 이외에 기술적 동학의 측면에서 이윤율을 다시 상승시킬 계기를 찾아내기 어렵다는 점 등이다.

 

무엇보다 19세기 세계 끝까지 팽창했던 영국 중심의 자본주의 시대가 이 팽창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면서도 더 큰 모순을 잉태해갔던 것과 달리, 지금 미국의 시기에는 끝없는 팽창이 아니라 세계경제의 재편을 통해 선별 지역을 심층적으로 포섭하고 다수 지역을 배제한 채 축적을 진행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배제된 지역에 대한 통제 불가능성을 확대시켜, 헤게모니 국가로선 더 많은 군사적 개입을 통하지 않고는 세계질서를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고, 결국엔 새로운 체계의 카오스가 이어질 가능성을 키운다는 점이다.

 

그러면 미래는 어떻게 되는가. 아리기는 다소 암울한 아나키적 상황이 펼쳐지거나 중국을 중심으로 비교적 균등한 교역이 펼쳐지는 두 가지 전망 사이에서 동요해 온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아와 중국에 대한 그의 다소 과도한 낙관은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선 유보적인 관망으로 다시 돌아서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세계경제 위기가 한창이던 지난 6월 그가 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72살로 사망하였지만, 그가 남긴 쟁점들은 향후 계속될 세계경제 위기 속에서 지속적으로 논쟁의 한가운데 위치할 것으로 보인다.

 

백승욱/중앙대 교수·사회학

» 백승욱/중앙대 교수·사회학
백승욱은 중국의 노동문제를 ‘단위체제’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분석한 논문으로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빙엄튼대 페르낭브로델센터 객원연구원과 한신대 중국지역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로 있다. 사회진보연대 운영위원이기도 하다. <세계화의 경계에 선 중국>(2008), <자본주의 역사 강의>(2006),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세계체계 분석으로 본 미국 헤게모니의 역사>(2005) 등의 책을 썼다.

 

 

 

 

 

 

 

 

 

 

 

 

 

기사등록 : 2009-12-11 오후 08:04:47 기사수정 : 2009-12-11 오후 08: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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