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25) 가야트리 스피박 Gayatri C. Spivak

2010. 1. 18. 12:13theory & science

 

 

‘제3세계 읽기의 윤리’ 지식인의 화두로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25) 가야트리 스피박 Gayatri C. Spivak

 

가야트리 차크라보 르티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은 1942년에 인도 콜카타(캘커타)에서 태어나 1959년 캘커타대를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에서 영문학 석사(1962)와 박사학위(1967)를 받았다. 1991년부터 뉴욕의 컬럼비아대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1976년에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영역함으로써 서구 문단에 등단했으며, 첫 번째 저서 <다른 세상에서>(1987) 이후 20여년에 걸쳐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1993),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1999), <분과학문의 종말>(2003), <다른 여러 아시아들>(2008)과 같은 역작들을 출간했다. 지구화에 대항하는 글로벌 남반구(global South) 운동의 일환으로서 벵골 아동 교육에 투신중이다.

 

 

 

스피박은 지식인이 탐색 대상을 전유함으로써 지배 자본의 이해관계와 공모하게 되는 결과를 끈질기게 파헤친다. 20세기 말을 지배한 각종 포스트 담론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성·계급·인종적 약자들을 대변하기에 앞서 토착민의 관점에서 그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탈식민화의 행보를 가로막는 지식인 이데올로기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은 지식인들이 생산하는 이론과 사상이 과연 공평무사한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이론 활동을 시작한다. 이 물음은 진보적이라는 포스트식민주의를 비롯한 각종 포스트주의들이 전 지구적 자본의 재배치와 맺는 관계라는 의제와 이어진다. 그동안 이 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은 채 묵인될 수 있었던 것은 제국주의적 폭력구조들에서부터 비켜선 투명한 존재라는 지식인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스피박은 탐색자라는 지식인의 위치가 탐색 대상을 전유함으로써 지배 자본의 이해관계와 공모하게 되는 결과를 끈질기게 파헤친다. 그 태도는 자신의 이론이라고 회피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을 인도(India)적인 것을, 벵골적인 것을 서구 문단에 소개하는 ‘정보원’으로 형상화하기도 한다.

 

20세기 말부터 각종 포스트 이론들에 의해 강력하게 유포된 차이·이질성·욕망·문화 담론들 대다수가 자본의 전지구화에 따른 새로운 국제 분업 현실을 간과한다. 사실 그러한 현실 속의 제3세계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를 서구 문단에 제대로 들리게 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런데도 각종 포스트주의 이론들에서는 제3세계 주체의 주체성이 너무 손쉽게 설정된다. 그렇게 제3세계 주체에 대한 오도된 지식은 결과적으로 제1세계의 이해관계를 도와준다. 그래서 소위 ‘포스트식민’ 담론과 탈식민화 사이에는 괴리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타자를 인정하는 척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지워버리는 (남성)포스트(식민) 담론의 맹활약 속에서 탈식민화를 지향하는 이론 작업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스피박은 이론을 생산하고 사상을 유포하는 포스트식민 시대 지식인들이 성·계급·인종적으로 하위에 있는 서발턴들(subalterns)의 차이를 그저 예찬하거나 대변하려고 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려면 지식인들은 지구화 시대 엘리트로서의 특권을 체계적으로 ‘깨닫고 벗어나야’(unlearn) 한다. 그렇지만 북반구의 백인 및 유색 엘리트 남녀들, 남반구의 유색 엘리트 남녀들 중에서 상당히 윤리적인 이론가조차도 이미 연루되어 있기 마련인 거대한 ‘교육기계’의 자장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지식의 기술과 권력의 전략 사이에 ‘외부’란 거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남반구건 북반구건, 성·계급·인종에 따른 개별 이론가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하면서 투명한 존재로서의 지식인 되기를 거부하는 자기비판을 지속하지 않는다면, 자본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포스트식민 정보원으로서 존재하기 십상이다.

 

포스트식민 정보원에서 토착정보원의 관점으로

 

전지구화 시대 지식인들이 서구 이론과 사상을 또다시 살찌우는 포스트식민 정보원으로 남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피박에게 포스트식민 정보원은 1990년대 이후 미국 문화연구를 미국 메트로폴리탄 에스닉(ethnic) 문화연구, 급진적 메트로폴리탄 다문화주의 연구, 미국 학계의 문화적 혹은 엘리트 포스트식민주의 연구로 집결되게 하는 주요 형상이다. 스피박은 미국 문화연구 진영에서 말하는 ‘문화’란 발전을 위한 알리바이, 전 지구의 금융화에 유리한 알리바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원래 ‘문화적인 것이 갖는 환원될 수 없는 이질성’을 가시화하기 위해 “동일성에 영원히 붙잡힌 채 남아 있기보다 타자성을 환기하는 토착정보원의 (불)가능한 관점”에서 작업하자고 주장한다. 여기서 (불)가능이라는 이중 어법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며, 토착정보원들이란 문화텍스트들에 정보를 제공하는 존재들로서, 지식의 원천이자 대상이다. 삭제되고 지워진 이들의 관점을 재각인하기 위해서는 선택받은 글로벌 엘리트의 그럴듯한 세계시민주의와, 강제된 글로벌 하층계급의 무자비한 일상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능력의 지평을 갖지 못한 채 스스로 서발턴 행세를 하며 자신들의 담론 권력을 챙기려 드는 엘리트 포스트식민적 문화연구로 인해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초과 착취되는 남반구 토착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스피박은 바로 이 현실을 사라지지 않게 붙들 토착정보원의 (불)가능한 관점에서 우리 시대의 문화를 읽어내고 가르치며 행동할 때 잠정적이지만 분명히 더 나은 대안이 부상할 수 있다고 본다.

 

자유주의 다문화주의 미국 대학에서 교육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재고하는 스피박의 입장에서는 ‘세상을 읽어내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교육실천에서 핵심적인 사안이다. 스피박은 토착정보원들을 여러 결들에서 미묘하게 배제하는 지배적 문화담론의 여정을 추적해 나가는 읽기의 윤리를, 또 가르치기의 윤리를 주장한다. 여기서 읽기, 가르치기란 인식론적이고 담론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윤리적인 필수사항이며 ‘비판’이다.

 

성·계급·인종에 민감한 독법으로 아시아 문화 읽기

 

스피박은 그러한 비판적 독해의 맥락에서 포스트식민 이론이 아시아 지역들과 맺는 관계를 탐구하고 아시아 문화들을 새로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모든 포스트식민성은 정황적인 것이라 지역·국가·대륙에 따라 서로 다른 양상을 띤다. 서구 중심 제국주의 전쟁과 자본주의 경쟁에 맞서는 핵심적인 지정학적 공간으로서 아시아의 문화에 집중하는 읽기는 새로운 대륙주의를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스피박이 제안하는 아시아 문화 읽기에서 ‘아시아’는 아시아 지역들의 일방주의나 초국가적 디아스포라 헤게모니와 함께, 서구도 빗금 치는 비판적인 문화정치적 공간을 함축한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란 한마디로 젠더화되고 인종화된 서발턴들의 대항집단성이 부상하는 공간이다.

스피박에게 우리 시대 지식인들의 과제는 비가시화되기 쉬운 제3세계 혹은 남반구에 속하는 아시아의 하위문화들을 주변부 범주가 아니라 일반적 범주로서 다루며 그것들이 지닌 특이한 사유·인식·가치·관점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러한 읽기는 성·계급·인종이라는 주체성 형성의 핵심요소들에 민감하고 복합적인 인식을 갖고 실행된다. 이렇게 실천되는 새로운 독해는 지금의 지구화에 대항하는 능력의 저장소를 찾아나가는 전략인 셈이다.

 

그러한 지평에서 아시아의 하위문화들을 비교하며 함께 읽는 작업들은 북반구에서 소비되는 영어 번역물에 내재된 영어 일방주의를 벗어나 국제적이며 다언어적인 문화 영역들을, 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를 통한 다른 윤리를 열어줄 것이다.

 

지구화 시대 아시아 국가들과 지역들 사이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젠더화되고 인종화된 서발턴들은 점점 더 고립되면서 더 가혹한 착취와 폭력에 노출되고 있다. 그렇지만 바로 이들에게 지구-지역적으로(glocally) 움직여 나가는 데 필요한 초국가적이면서 비교문화적인 사유가 배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변성은 더 이상 억압의 장소만이 아니라 저항의 거점이 되어 새로운 문화와 삶의 방식을 구현하는 창조적 지점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 실천 가운데 출현중인 대항집단성을 읽어내기 위해 그들과 만나는 장을 만들고 그들에게 말을 걸고 귀를 기울이며 대화를 실천하는 읽기의 윤리를 새로이 가다듬을 때다.

 

태혜숙/대구가톨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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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10-01-15 오후 07: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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