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으로 태백을 그리다

2010. 2. 5. 18:07sensitivity

 

 

석탄으로 태백을 그리다

‘광부화가’ 황재형 개인전
칼로 물감 치는 강한 터치…탄광촌 리얼리즘에 담아

 

 

‘탄광의 화가’가 돌아왔다.

 

“현실이 뭔지 알고 싶어서” 강원도 태백에 들어간 지 어느새 27년째, 그사이 화가 황재형(58)씨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광부 생활도 하고, 지역 미술교사들에게 그림도 가르치면서 탄광촌의 현실을 고집스럽게 화폭에 담았다.

 

2007년, 황씨가 16년 만에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미술계는 그를 ‘재발견’했다. 붓 대신 나이프로 물감을 치는 강한 터치의 독특한 그림 속에는 요즘 작품들에선 보기 어려워진 리얼리즘, 또는 회화 자체의 힘이 들어 있었다. 차디찬 강원도의 겨울바람이, 그 속에서 쓰러지지 않는 강원도 사람들의 모습이 핍진해서 더욱 서정적이었다. 황재형이란 이름 석자는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3년 만이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갤러리에서 여섯번째 개인전을 연다. 언제나 그의 전시회 제목은 똑같다. ‘쥘 흙과 뉠 땅’. 한 줌 손에 쥘 흙도 몸을 뉠 땅도 없는, 또는 쥘 흙은 있어도 누울 땅은 없는 이들을 그리겠다며 첫 개인전에 붙였던 제목이다. 예전 그림부터 최근 것까지 무려 60여점 대형 그림들로 넓은 전시장 2개 층을 가득 채웠다.


» <고무 씹기>
전시 이름은 그대로지만 작품은 정중동의 변화를 계속하고 있다. 우선 사람 그림이 줄어들었다. 대신 텅 빈 태백의 골목길, 어느 집 작은 텃밭, 길가의 가로등 불빛 같은 것들이 화폭에 들어왔다. 탄광이 사라지면서 동네 사람들이 카지노로, 리조트로 돈 벌러 떠났기 때문일까. “전에는 뭔가를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돌멩이 하나, 광부의 슬리퍼 하나에 눈길이 가요. 억지스러움이 없어진 거겠죠. 작은 것 하나가 여럿과 통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주인이 일하러 갔는지 버려졌는지 모를 판잣집, 녹지 않은 눈이 검은 땅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풍경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큼직한 물감 덩어리들이 제각각으로 모여있을 뿐이다. 하지만 뒤로 물러설수록 서로 상관없어 보이던 물감 덩어리들이 매스게임하듯 모양을 이룬다. 옆에서 보면 마치 황무지 표면을 연상시키는 거친 재질감은 소재의 모양을 해체해 추상적으로 만드는 듯하면서도 사실감을 더해주는 묘한 이중 효과를 낸다.


황 작가의 그림에는 나이프로 그리는 것 말고도 또다른 기법이 숨어 있다. 탄광을 그리는 검정색에는 석탄 가루가, 노을 지는 하늘이나 텃밭의 노랑색에는 흙이 들어간다. 태백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는 갖가지 색깔의 흙을 담은 단지가 수십개다. 가난한 젊은 화가가 물감값도 아끼고 천연 재료 특유의 은근한 맛도 살려보려고 시작했던 것이 전매특허처럼 됐다고 한다.

 

이번 전시는 3년 전 ‘광부 화가’라는 별명으로 각인되었던 황 작가의 서정적 면모와 좀더 관조적인 그림들을 만나는 계기가 될 듯하다. 거칠고 선명한 강원도의 풍경은 바로 요즘 모습 그대로여서 더욱 실감난다. 28일까지. (02)720-2010.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기사등록 : 2010-02-04 오후 06:04:45 기사수정 : 2010-02-04 오후 07: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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