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4. 23:04ㆍBook
〈능지처참-중국의 잔혹성과 서구의 시선〉
티머시 브룩 외 지음·박소현 옮김/너머북스·2만3000원
“능지형은 수많은 유사한 경멸적 이미지들-단지 몇 가지만 열거하자면 아편, 전족, 고두, 우상숭배 등 중국을 과거와 현재가 뒤바뀐 위험한 나라로 여기게 만드는 대상들-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것으로 조작될 수 있다. 요점은 중국에 이러한 관행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서구의 환상을 중국의 현실로 다시 썼던 서구우월주의의 수사학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티머시 브룩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제롬 부르공 프랑스 리옹대 교수, 그레고리 블루 캐나다 빅토리아대 교수 공저 <능지처참>은 이처럼 서구우월주의 시각으로 왜곡되거나 조작돼 끝없이 재생산돼온 중국(동양 또는 아시아로 바꿔 놓아도 된다)의 잔혹성·야만성·낙후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의 하나인 능지(凌遲)라는 극형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하지만 재구성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능지라는, 중국에 대한 서구우월주의의 왜곡된 수사학의 전형(스테레오타입)을 해체하고,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오독(誤讀)의 역사를 추적하고 잘못된 고리를 끊기 위해서다.
서구의 우월주의적 시선은 조선에선 서구제국주의를 모방한 일본의 우월주의적 시선으로 복제됐다. 민주당 하토야마 정권 각료까지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는 역사의 필연이었고, 독도는 일본 땅이라 여전히 우긴다. 한일 간 오독의 잘못된 고리를 읽어내는 데도 이 책이 시사하는 바 있지 않을까.
청나라 말 ‘신체 절단 능지형’ 사진 한장으로
‘동양의 야만성’ 조작한 서구 우월주의 비판
우리가 능지처참이라 얘기하는 신체절단의 혹형을 중국에서는 능지처사(處死)라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천 번을 절개해서 죽임’(death by a thousand cuts. 이 책의 원제다), ‘살을 저며서 죽임’(death by slicing) 또는 ‘서서히 죽임’(the lingering death)으로 번역했다. 능지처참을 사지절단형 정도로 알고 있는 우리의 관념도 잘못된 것이지만, 이들 서양 번역어에는 중국의 형법체계와 이념에 대한 무지와 편견, 오류가 빚어낸 선정주의가 아로새겨져 있다. <능지처참>에 따르면, 끝없이 재생산돼온 그 선정주의 역사는 몇 장의 사진에서 시작됐다.
1904년 가을 베이징 시내 채소시장 입구 교차로. 왕웨이친과 그의 부하들 처형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윽고 관리 한 명이 법전인 ‘대청율례’에 정한 죄목을 읽어내렸다. 뒤이어 병사 두 명이 왕웨이친과 그의 수하들 윗옷을 모두 벗기고 변발을 삼각대에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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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자수(망나니)가 죄수의 가슴 부위부터 시작해 이두박근과 허벅지 살을 차례대로 조각조각 도려내기 시작했다. 작업 도중 회자수가 신속한 손놀림으로 왕씨의 심장을 단번에 찔러 목숨을 끊었다. 신체절단 작업은 계속됐다. 팔목과 발목, 그다음 팔꿈치와 무릎, 마지막으로 어깨와 엉덩이 부분을 잘라냈다. 숙련된 회자수는 순식간에 죄수의 신체를 머리 등 서른여섯 개 남짓으로 해체해버렸다. 그가 관리들 쪽으로 몸을 돌려 외쳤다. “샤런러! 사람을 죽였다!” 조수가 칼을 모아 조심스럽게 바구니에 다시 집어넣자, 기다리던 흰 두루마기 차림의 장의사들이 신체조각들을 모았다.
푸닝현 거인(향시 합격자)으로 지현(현 최고 벼슬아치)과 막역한 사이였던 왕웨이친은 그 3년 전 수하들을 데리고 재산 소유권 때문에 다투던 다른 집안 가족 열두 명을 몰살했다가 ‘동일 가문 사람들을 3명 이상 살해’할 경우 능지형에 처하는 대청율례에 따라 처형당했다. 몇 달 뒤인 1905년 4월 청조는 능지형을 폐지했다. 하지만 능지형 최후의 희생자는 그가 아니라 그달 9일 몽골 왕자를 살해한 만주인 하인 푸주리였다.
능지형 처단은 그 전에도 있었지만 서양인들이 볼 기회가 없었고, 설사 봤더라도 사진으로 남기진 못했다. 중국에서 능지형이 없어지기 직전, 바로 그 마지막 몇 장면을 1900년 의화단사건을 기화로 베이징을 점령한 유럽인들이 목격했다. 그리고 그들은 때마침 그때 개발돼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휴대용 사진기를 갖고 있었다.
이 책에 따르면,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처절하게 묘사한 프랑수아 다미앵의 처형장면은 그보다 더 끔찍했다. 당시 유럽 사법제도도 중국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 거란의 요나라 때 중앙아시아에서 능지형을 들여온 중국의 사법제도나 감옥 운용은 유럽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고 앞서간 것으로 조사돼 있다.
하지만 능지형의 사진들은 글로 서술된 다미앵 처형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이미지를 사람들 뇌리에 각인시켰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이 부가된다.
거기엔 18세기 후반부터 서양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기 시작한 동서양의 경제력 역전과 그에 따른 사법관념과 제도의 변화, 싹트기 시작한 동양에 대한 서양의 인종적 우월감이라는 요소가 덧붙여져야 한다. 177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은 유럽 국가들이 뒤따라야 할 본보기였다. 19세기 중후반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거치면서 관계 역전은 돌이킬 수 없게 됐다. 그때까지 경범죄자에 대한 모욕과 매질하기부터 시신을 절단하고 내장을 제거하고 효수하는 극형까지 더 엽기적인 형벌체제를 갖고 있던 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영국 등 유럽이었다.
경제적 우세와 함께 서양에서 먼저 사법관념이 바뀌고 능지형 같은 극형은 사라졌다. 중국도 그 뒤를 따랐고 그 간극은 1세기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간극, 서양에선 바로 전에 사라져 재빨리 잊혀져버린 극형이 중국에선 마지막 흔적을 남기고 있었고, 서세동점과 함께 사진에 담긴 능지형 최후의 몇 장면들이 야만의 상징으로 남았다. 서양은 그 이미지를 끝없이 복제하고 확산시키면서 자신들의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했다.
잔인한 중국, 야만의 동양 이미지는 그렇게 해서 고착되고 확대재생산됐다. <능지처참>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중국 능지형의 역사를 계보학적으로 더듬고 서양의 그것과 비교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기사등록 : 2010-04-02 오후 07:02: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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