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4] 대중 열망 아우를 전략적 '좌익 포퓰리즘' 고민해야

2010. 4. 22. 11:50lecture

 

 

대중 열망 아우를 전략적 ‘좌익 포퓰리즘’ 고민해야
분단 등 특수한 한국적 상황에서
‘보수의 프레임’ 뒤집을 상상 필요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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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논쟁

이번주를 마지막으로 그동안 신진욱 중앙대 교수,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의 릴레이 기고로 이어져 온 포퓰리즘에 대한 지면 논쟁을 닫는다. 다음은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의 기고문이다.


»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포퓰리즘 논쟁에는 3가지 쟁점이 있다고 본다. 포퓰리즘의 동력이 어디서 발생하는가, 포퓰리즘의 동력은 어떤 복합적 성격을 갖는가, 포퓰리즘적 동력이 어떤 지향의 정치적 에너지로 현실화되는가 하는 점이다. 신진욱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쟁점을 다루었다고 하면, 이동연은 두 번째 쟁점을, 안병진은 첫 번째 쟁점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약간 다른 방향에서 포퓰리즘 논쟁을 한국 진보의 전략적 실천과 연관시켜 확장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포퓰리즘에 대한 최근의 새로운 논의들은 진보의 관점에서 어떻게 우익 포퓰리즘이 대중적 동원에 성공하는가를 재성찰할 것인가 하는 데에 그 문제의식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문제의식을 첨예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필자는 한국의 맥락에서 ‘좌익 포퓰리즘’을 상상해 본다면 어떤 것일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반독재 개혁자유주의 정부였다고 할 수 있는 노무현 정부는 의회 과반수를 차지한 2004년에, 이른바 ‘4대 개혁입법’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것은 물론 진보가 실현해야 하는 중차대한 정치개혁 의제였다. 그런데 만일 무상급식, 무상보육, 무상의료, 대학 등록금 무료와 같은 의제들로 구성되는 ‘4대 사회경제개혁 입법’을 급진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면 어떠했을까. 당시 많은 보수적 언론들은 4대 개혁입법을 추진하는 노무현 정부를 ‘포퓰리즘’적이라고 융단폭격을 했다. 만일 여기서 상상한 ‘좌익 포퓰리즘’적 관점을 도입하여, 4대 개혁입법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는 보수의 비판처럼 포퓰리즘적이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사회경제적 이슈에서 ‘충분히 포퓰리즘적이지 못해서’ 실패‘했다’”라고 평가한다면, 상황을 전혀 다르게 해석해볼 수 있다. 이 점이 기득권세력이 강력하게 포진하고 있는 제도권을 우회하여 다양한 사회경제적 포퓰리즘 정책을 시행하였던 타이의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 탁신과 노무현이 구별되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포퓰리즘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통상 인민주의 혹은 민중주의라고 변역되는 포퓰리즘은 한국에서는 인기영합주의 그리고 제도적 수단을 무력화한 대중동원 전략 같은 ‘행태적 포퓰리즘’을 중심으로 부정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필자는 포퓰리즘의 합리적 핵심을, 제도적 통로에 의해서 반영되지 않는 대중들의 정치적·사회경제적 요구들을 정치 지도자 혹은 세력이 특정한 방식으로 수용·전유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스스로의 대중적 기반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본다. 라클라우의 표현을 빌리면, 포퓰리즘적 정서는 그것을 “수용할 수 없는 제도적 체계의 무능력”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정서가 거의 예외 없이 우파의 포퓰리즘 정책 안으로 흡수·통합되어 우파의 정치적 토대가 되고 있다는 것이 토론의 주제이다.

 

여기서 안병진의 표현대로 ‘보수가 대중적 욕망과 결합하는 깊이와 정도’를 진보가 응시해야 할 필요가 제기된다. 문제는 한국의 분단현실 및 강고한 보수의 힘이 포퓰리즘이라는 부정적 규정을 통하여 진보의 급진적 상상력을 제약한다는 점이다. 지제크의 표현을 빌리면, 전체주의나 포퓰리즘, 공산주의 등의 언어들은 진보와 개혁세력의 급진적 상상력을 제약하는-그래서 자유민주주의의 헤게모니를 보장하는 복합적 임무를 수행하는-일종의 지적인 ‘구멍마개’의 구실을 한다. 허경영의 정치개그는, 제도화된 정치에 의해 실현될 수 없는 ‘급진적인 요구와 불만’이 개그의 형태로서만 정치의 장에 들어온다는 것을 슬프게 말해준다.


물론 필자는 민주주의 자체의 급진적 확장을 통해서, 제도화된 민주주의가 사회와의 괴리를 극소화하면서 배반된 사회적 요구들이 다양한 채널로 흡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정당’을 통해서, 또한 신진욱이 강조하는 것처럼 대중민주주의적 통로를 통해서 대중들의 요구와 이해가 더 많이 민주주의의 ‘내부화’를 이루도록 해야 하고 대중의 좌절과 열망이 우익 포퓰리즘의 동력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차기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때, 혹은 진보정당 정부가 들어섰을 때, 어떻게 보수정권 아래서 배반당한 대중의 요구와 이해를 수렴할 것인가를 상상하는데, ‘좌익 포퓰리즘’의 관점을 대입해 보자고 제안해보고 싶다. <끝>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기사등록 : 2010-04-21 오후 07:3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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