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를 기억하십니까?

2010. 5. 19. 11:09discourse & issue

 

 

“동족을 총칼로…2차대전보다 충격적이었다”
독일 외신기자가 본 ‘광주’
직접 목격한 관만 70여개…군 “2명 사살” 발표에 실소
“시민군 미국과 대화 원해…‘희생으로 민주화’ 확인”
한겨레
» 힐셔 전 특파원은 자신이 취재한 광주 기사가 실린 1980년 5월28일치 <쉬드도이체 차이퉁> 신문을 아직도 고히 간직하고 있다. 광주를 취재하고 5월27일 서울로 올라온 그는 정보기관 감청 을 우려해, <로이터통신>에서 일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전화로 기사를 불러 송고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날 그곳에서 본 장면은 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 13일 뮌헨의 올림픽 경기장앞 아파트에서 만난 게브하르트 힐셔(75) 일간 <쉬드도이체 차이퉁> 전 극동특파원은 “만 30년 전 광주에서 목격했던 장면은 2차대전 막바지인 9살 때 독일의 어느 기차역 앞에서 본 어린이들의 주검들처럼 평생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쿄에서 서울의 지인들을 통해 광주에 관한 기사를 쓰던 힐셔 특파원이 광주를 찾은 것은 군의 강제진압 바로 전날인 1980년 5월26일이었다. 힐셔는 25일 부산을 거쳐 화순에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시민군이 장악한 ‘해방된 광주’의 마지막날을 취재했다. 그러나 그날이 마지막날인 줄은 몰랐다.

 

- 1980년 5월 광주를 가게 된 동기와 취재의 어려움은 없었나? 

= 일본 도쿄에서 5월17일부터 계속해서 광주에 대한 기사를 <쉬드도이체 차이퉁>에 송고했다. 당시 도쿄는 서울보다 훨씬 빨리 사실에 가까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도쿄에서 서울의 지인들과 통화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매일매일 기사를 송고했다.

 

 21일 계엄군이 광주에서 퇴각한 이후 독일 본사와 한국취재를 의논했고, 5월 25일(일요일) 일본에서 부산을 거쳐 화순으로 가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광주에는 26일 도착했다. 광주에 들어가는 너릿재 길목에서 군인들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다. 독일여권에 직업은 써있지 않기 때문에 신분을 밝히지 않고, 한국말로 “독일사람입니다“고 말했더니, 군인들이 “독일“이란 말을 알아듣고 나를 독일 신부쯤으로 생각해 통과시켜준 것 같다. (힐셔는 선천적으로 오른손이 없다. 뱃속에서 탯줄이 오른손목에 감겨 잘려나간 채 태어났다. “아마 불구 손을 가진 사람이 기자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해서 쉽게 통과시킨 것 같다며 인생에서 불구가 항상 손해는 아니기”라며 호기롭게 웃었다.) 

 

 검문 외에는 어려움은 없었다. 광주 가는 길에 일본말을 할 줄 아는 노인 한 분을 만났다. 유감스럽게도 그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기자 신분을 밝히고, 통역을 부탁했다. 그분은 하루종일 통역을 해주시면서 취재를 도와주었다.

 

- 5월 광주에서 겪은 일 가운데 특별히 기억되는 일은?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기억나는 사람들은? 

= 도청 앞에는 아마 군인들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군차량이 있었다. 도청주변은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질서정연했고, 조용했다. 도청 안으로 들어갈 때 1차 계엄군 진입시도 때 죽은 신원미확인의 주검을 담은 13개의 나무관이 있었다. 도청 맞은편의 상무관에 는 60개 관이 흰색천이나 태극기에 뒤덮여 있었다.

상무관에서 본 광경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 젊은이가 관 앞에 주저앉아 “여기 내 동생이 죽어 있다. 어떻게 한국 군인이 같은 한국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라고 비통하게 절규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가족 전체가 죽임을 당한 3개의 관(부모와 7살 소년)이 있었다. 가족이 몰살당했기에 울어줄 사람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갖다 놓은 하얀 국화꽃만 조용히 놓여 있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몇명의 여고생들도 한 반 친구의 관 앞에서 목이 메여 울고 있었다. 한 여고생이 “17살의 앳된 우리 친구(박금희)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다“고 절규하며 애국가를 불렀다. 당시 언론들은 광주시민들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라고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내 기사에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흐느끼는 장면을 묘사했다. 시민들의 시위와 항거가 북한의 사주나 공산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질서를 지키려 하고 한국의 민주화를 열망한다는 느낌을 취재 내내 받았기 때문에 나름의 방법으로 기사에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날 그곳에서 본 장면은 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9살 때 2차대전 막바지를 경험했는데, 그때 독일 한 도시의 기차역에 죽어 널브러져 어린이를 포함한 주검들을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과 함께 광주에서 그 장면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부상자 취재를 위해 조선대학 병원으로 갔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처음에는 외국인 기자가 취재하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한국인끼리 싸우는 것이 외국에 알려지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광주 실정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 이렇게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폭력적 상황을 막는 길이라고 동행했던 통역의 도움을 받아 의사와 간호사를 설득했다. 결국, 한 의사가 취재를 허락해서 중환자들이 있는 병동을 돌아볼 수 있었다. 병원에는 300명 정도의 환자가 있었다. 총이나 총검으로 눈, 가슴, 배 등에 총상과 자상, 타박상을 입은 환자들이었다. 심지어는 신장 밑부분(독일식 표현으로 성기 부분)을 다친 여성환자도 있었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참상이었다.

 

그 다음으로 시민위원회를 찾아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시민위원회 대변인와 인터뷰를 했다. (힐셔는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고, 졸업생 정도로 보인다고 했다. ‘윤상원이 아닌가’라고 묻는 질문에, 확실히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인터뷰 도중 인상적인 점은 두 가지다. 그 때까지 161명(5월 26일 당시)의 죽음을 확인했다며, 이렇게 많은 희생이 있는데 전두환의 신군부가 물러날 때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 대변인은 1달간 버틸 식량은 충분하다며 끝까지 가겠다고 결의를 보였다.

 

 두번째로는 현재 광주가 처한 상황에 대한 설명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모색을 위해 미국과의 대화를 가능한 빠른 시기에 원한다고 한 것이다. 미국과의 대화를 하는 것 외에 광주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해결방법은 없다며 기자인 내가 서울로 가게 되면 이런 시민군의 의사를 미국 대사관 측에 연락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런 시민군의 입장은 내게 놀라웠다. 한편으론 당시 시민군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군들이 어떻게 군인과의 대치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 시민군의 부탁대로 미 대사관과 접촉했나?

= 26일 자정 가까운 시각 광주를 빠져나왔다. 27일 아침 화순의 숙박집에서 라디오방송을 통해 계엄군이 다시 진입했고, 도청에 있던 모든 시민군이 사살되거나 잡혔다는 것을 들었다. 나와 인터뷰를 했던 대변인도 죽은 것이다. 나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부탁받은 대로 미 대사관에 연락을 취하려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내가 서울에 가기도 전에 끝나 버렸다. 나와 인터뷰를 마친 몇 시간 뒤에 계엄군은 2차 진압에 들어갔고, 어떤 시도도 도움도 될 수 없도록 모든 것은 이미 끝나버린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계엄군 1차 진입 때 161명이 죽었다는 얘기를 광주에서 바로 몇 시간 전에 보고듣고 나왔는데, 그 몇 시간 후 아침(27일) 화순 숙박집에 들은 라디오에선 두명이 죽었다는 공식발표를 들어야 햤다. 새벽 2~5시경 군경이 2차로 진입해 광주 시내를 다시 접수했고, 200명 이상의 학생들이 투항했고 투항을 거부한 2명을 사살했다는 것이다. 당시 라디오 주변에는 많은 동네사람들이 있어서 함께 들었다. 그 중 한 명이 “2명만 사살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다. 분명히 훨씬 더 많을 것이다“며 비통해 했다.

 

- 광주항쟁 이후 신군부는 디제이등 재야 인사 20여 명에 대해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항쟁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해 디제이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디제이와 광주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 김대중의 체포로 인해 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이런 맥락에서 광주 민중항쟁의 여러 계기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주 민중항쟁은 궁극적으로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이 주동이 된 군부가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에 대한 항거이고, 민주화 실현을 위한 민의의 분출이다. 물론 광주와 김대중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렇다고 김대중 체포만으로 광주민중항쟁의 원인을 찾는 것은 너무 협소한 시각이라 생각한다. 그것보다는 북한 공격시 투입되기로 한 공수부대가 같은 국민인 학생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시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광범위한 참여를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1967년 이후 한국을 40여차례 방문했고, 1971년 대선 때도 취재했다. 김대중이 전라도민의 많은 지지를 받은 이유는 물론 고향인 점도 있지만, 그의 농민정책이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던 것 같다. 1971년 이후 한국의 정당 대표는 서울과 경상도에서만 계속 나왔다. 내가 보기에 이중양곡수매제(이중곡가제)를 주장한 김대중은 지방 특히 농촌의 지지를 크게 받았다. 그때까지 어떤 정당지도자도 김대중과 같은 농민정책을 제시하지 않았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농민들이 많았던 전라도 지방에서 김대중은 당연히 환영받는 정치인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이 당시 나한테는 흥미로워 1971년 대통령선거유세를 취재했다. 그때 김대중씨에 대한 농민층의 열렬한 지지를 직접 확인했다. 디제이와는 이후로도 계속 친분관계가 유지돼, 일본 시절은 물론 동교동 시절도 집을 방문해서 조찬을 함께하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는 독일에 있어서 문상하지 못했다.

 

- 당시 광주에 대한 기억과 인상은?

= 26일 내가 본 광주는 아주 조용했고 질서 정연했다. 상점은 셔터를 내렸지만, 상점 앞에 야채나 필수품을 내놓고 팔고 있었다. 자동차는 다니지 않았고 시민들이 길거리에 모여 웅성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경찰서, 전남매일신문, 방송국이 불탄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실대로 언론보도를 하지 않은, 혹은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이에 대해 신군부와 언론에서는 공산주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일으킨 것이며, 광주는 무법자의 도시라고 언론플레이를 했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 30년이 지난 지금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재평가됐고 희생자들은 국립묘역에 안장됐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외신기자로서 80년 광주를 어떻게 평가하나?

= 내가 보는 광주는 일반시민이 민주화실현을 위해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민주화의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하게 된 역사적 분기점이다. 즉, 일반시민들이 폭력적인 공수부대의 무차별 진압을 경험하면서, 시민들이 더이상 군사정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많은 대중들의 집단행동과 참여로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광주에서 보았던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고,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9살 때 2차대전 참상을 본 이후 처음 본 폭력적으로 잔인한 상황이다. 광주는 이런 점에서 내게 전쟁과 같았다. 단지 같은 동족이 같은 동족을 총칼로 살해했다는 것과, 취재와 인터뷰중 보았던 아주 용감한 시민들이 결국은 죽임을 당했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었다. 광주를 통해 느낀 것은 이런 희생 없이 결코 민주화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역사적 경험이었다. 1987년 대만 민주화시위를 취재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 기사 송고할 때 어려움은 없었나?

= 27일 서울로 올라와서, <로이터 통신>의 친구를 찾아 전화로 독일 신문사에 기사를 송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호텔 같은 곳에서 전화연결은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 친구가 다행히 아무것도 묻지 않고 회사규정에 어긋나는 것임에도 전화를 사용하게 해 주었다. 기사는 <쉬드도이체차이퉁> 28일자에 실렸다.

 

- 기자생활을 은퇴한 이후 근황은?

= 2000년 퇴직한 후, 요코하마의 한 대학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강의를 했고,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에서 2005년까지 강제노동과 교과서문제에 대한 심포지엄을 미국, 타이, 일본, 한국의 관계자들과 함께 열었다. 요즘은 우리 가족사에 대한 취재와 글을 쓰고 있다.

 

- 특파원생활을 시작한 이후 인생의 절반을 일본에서 거주했다. 지난 40년간 한국의 정치 경제적 변화를 지켜본 소감은?

= 한국은 어려운 역사적 시련을 이겨내고 환상적으로 정치·경제적 발전을 이뤘다. 한국의 생활수준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됐고, 시민의식도 성장했다. 다만,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남북이 갈라져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일본인 아내와 함께 일본에서 인생의 절반을 지냈지만, 한국은 내게 많은 친구가 있고 많은 경험을 하게 해준 가슴에 남는 특별한 나라이다.

 

** 힐셔는 1935년 동프러시아 틸리트 출생으로 1971년 2000년까지 한국, 일본, 대만을 담당하는 <쉬드도이체 차이퉁>의 극동 특파원으로 일본 도쿄에서 근무했다. <쉬드도이체 차이퉁>은 뮌헨에 본사를 둔 독일의 대표적 좌파성향 전국일간지이다. 1967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래 2007년 한국 정부 초청으로 마지막 방문하기까지 40여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38번 찾은 한국> 등 한국 관련 저서도 출간했다.

 

뮌헨/글·사진 한귀용 통신원 ariguiyong@hotmail.com

 

 

‘꼬마상주’ 조천호씨 “너무 지쳐 영정에 기댔던듯”
‘5·18’ 항쟁 30돌
“아버지 가르침 새기며 살 것”
한겨레 안관옥 기자 메일보내기

 

 

» 다섯살배기 때인 1980년 5월29일 광주 희생자 합동장례식 때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든 ‘꼬마 상주’로서 세계인을 울렸던 주인공 조천호씨가 지난 10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안 추모관에 전시된 자신의 사진 앞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광주/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이 사진은 제 삶을 5월로 끊임없이 연결해준 끈이었지요.”

 

세계인을 울렸던 ‘꼬마 상주’ 조천호씨는 1980년 당시 5살이었다. 그해 5월29일 광주에선 통한의 합동장례가 치러졌다.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진입한 지 사흘째여서 울음소리조차 낮춰야 했다. 그는 전남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된 아버지 조사천(당시 34살)씨의 영정을 안고 망월동으로 운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렴풋하지만 당시엔 슬프기보다 배고팠어요. 너무 배가 고파서 힘이 없었어요. 지쳐서 영정 사진에 기대 있었던 것 같아요.”

 

한 외신기자가 이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얀 상복을 입고 영정 위에 턱을 괸, 슬픔 표정의 꼬마 상주 사진은 독일 <슈피겔>에 실린 뒤 국내로 몰래 반입됐다. 죽은 자와 남은 자를 절묘하게 대비한 이 사진은 어떤 살육 장면보다 절절하게 광주의 아픔을 전해주는 ‘5·18의 상징’이 됐다.

 

조씨는 1987년쯤 앞집 수퍼에 갔다가 이 사진을 처음으로 봤다. 자신이 아닌 것같아 무덤덤했고, 나중에는 이 사진을 싫어하게 됐다고 한다. 사진을 선거 유세장에서 본 할머니가 충격으로 사흘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누구도 이 사진을 입에 올리지 않았죠. 하지만 5월이 오면 사람들이 찾아와요. 사진 때문에 5월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된거죠.”

 

조씨는 제대 뒤 5·18묘역 관리소에서 근무하다 광주시청에서 일하고 있다. 어느덧 돌아가신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가 됐다. 연년생인 세살과 두살 아들을 키우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다. 두 아들이 사랑스러울수록 3대 독자였던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더욱 진해진다. 건축일을 했던 아버지는 전남도청 부근 현장에서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시위에 동참했다가 5월21일 낮 1시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숨졌다. 아버지의 묘비엔 ‘꼬마 상주’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마음이 이렇게 새겨져 있다.

 

“아버지 잊지 않겠습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아버지가 온몸으로 보여준 가르침을 새기며 살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발포 명령 누가? 30년째 풀지 못한 ‘은폐된 진실’
‘5·18’ 항쟁 30돌
군 “상부 명령은 없었다 정당방위로 누군가 발포”
5·18단체 “보안사·특전사 비선조직 통해 하달됐을것”
한겨레 안관옥 기자 메일보내기
» 하성흡 화가의 그림 <1980년 5월21일>, 이 작품은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시작되기 직전인 1980년 5월21일 정오께 광주시 동구 금남로1가 전일빌딩 앞에서 공수부대와 시민학생이 대치한 상황을 생생하게 그렸다.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 광주 도심인 전남도청 앞 광장. 도청 확성기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자 분노한 시민들한테 밀리기만 하던 계엄군이 무차별 집단 발포를 시작했다. 인근 건물 옥상에서도 저격병들이 조준경을 단 채 시민들에게 사격했다. 사격은 메가폰으로 중지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10분 남짓 이어졌다. 이날 발포로 54명이 숨지고 500여명이 다쳤다. 이 사건은 광주 시민들이 총을 들게 하는 결정계기가 됐다.
 

누가 발포를 명령했는가. 당시 전남도청 앞에는 11공수 61·62·63대대, 7공수 35대대가 배치돼 있었다. 계엄군은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에서 끌고 온 장갑차에 밀려 저지선이 금남로3가 상업은행에서 금남로1가 전일빌딩으로 200m가량 밀리자 실탄을 군인들에게 분배했다.

 

평시의 총기 사용은 긴급할 때라도 육군참모총장 승인을 받아야 할 정도로 엄격하게 통제된다. 한 달 전 사북사태에 투입됐던 11공수도 이런 지침을 받았다. 광주 상황이 긴박해졌지만 2군사령부는 20일 밤 10시30분, 발포 금지와 실탄 통제를 지시한 상태였다. 하지만 공수부대는 이를 어기고 실탄을 분배해 발포했다. 이 집단 발포 뒤 7시간 반이 지난 21일 저녁 8시30분, 계엄사는 비로소 전남·북 계엄분소에 자위권 발동을 하달했다.

 

이날 발포 상황은 11공수와 7공수의 ‘작전상보’에 들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1989년 국회 5·18특위 청문회, 1995년 검찰의 5·18수사,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의 조사에서도 발포 명령자를 가려내지 못했다. 지휘체계가 이원화돼 정호용 특전사령관 쪽에서 발포명령이 내려왔으리라는 추정이 있었으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청문회에 출석한 군인들은 “상부의 발포 명령은 없었고, 현장 지휘관들도 발포 명령을 하지 않았다”며 “정당방위 차원에서 누군가가 먼저 발포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국방부와 보안사는 이 청문회를 앞두고 답변 시나리오를 짜고 출석 증인들의 동향을 감시하는 등 조직적으로 대비했다. 이 과정에서 육군의 총장 지시사항(5.3~6.29)과 광주 주둔 505보안부대 보고서 등 기록이 은폐됐다.

 


이렇게 누구한테도 집단발포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 30년째 이어지고 있다. 당시 상황을 증언해줄 김재명 육본 작전참모부장, 윤흥정·소준열 육군 전투병과 교육사령관(전교사령관), 정웅 31사단장 등은 이미 고인이 됐다. 이 사건을 조사한 국방부 과거사위도 전남도청 앞 발포를 직접 명령한 문서를 발견하거나 발포 명령계통을 설명해줄 진술을 확보하지 못했다. 군 내부의 일부 자료가 아직도 군사기밀로 접근이 제한된 탓에 자위권 발동이 신군부의 상층부에서 토의된 정황만 알아냈을 뿐 발포 명령을 내린 사실이나 사람을 확인하지 못했다.

 

앞서 대법원도 1997년 5·18사건 판결문을 통해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자위권 보유 천명이나 자위권 발동 결정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배후에서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도록 지시·관여한 것만 인정했을 뿐이다.

 

그러나 5·18단체 관련자들은 실탄 발포가 특전사 또는 보안사의 비선 조직을 통해서 광주 현장의 지휘관들에게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허연식 5·18단체통합추진위 기획위원은 “당시 공수부대가 지휘 계통에서 벗어난 서울의 정호용 특전사령관한테 발포명령을 건의했을 것이다. 집단발포가 이뤄졌던 비슷한 시각에 전남대와 조선대 등에서도 공수부대 총격으로 피해자가 생긴 점으로 미뤄, 특전사와 보안사의 비선 조직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광주항쟁 30년이 된 지금까지도 이런 생각은 여전히 개연성 있는 ‘추정’일 뿐 ‘증거’로 뒷받침되진 못하고 있다.

 

 

사라진 76명 어디 있을까
‘5·18’ 항쟁 30돌
무명열사 5명도 외로운 죽음
정부특별기구 구성해 찾아야

 

1980년 5월 홀연히 광주에서 사라진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정부가 30년 동안 인정한 5·18 행방불명자는 모두 76명이다. 5·18민주묘지엔 행불자의 혼백을 위령하는 묘역이 따로 만들어져 있다. 주검을 찾지 못한 유가족들은 남편과 아들이 ‘죽어서라도 돌아오기’를 지금도 애타게 기다린다.

 

정부는 행불자를 찾기 위해 우선 광주시 북구 망월동 옛 5·18묘지에 묻혀 있던 무명열사 묘 11기를 발굴했다. 2001년 10월 법의학·치의학·인류학 전공자로 짜여진 발굴단이 참여해 유전자 감식을 벌였다.

 

주검들은 정부미 포대에 아무렇게나 담기거나 두개골에 총구멍이 난 상태로 당시 참상을 말없이 증언했다. 이 가운데 6구는 이름을 되찾아 가족 품에 안겼지만, 나머지 5구는 결국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고 5·18묘지에 다시 안장됐다. 12~60살로 추정되는 주검들의 유전자 정보는 전남대 법의학교실의 컴퓨터 안에 담겨져 있다. 이렇듯 공식 인정받은 행불자 76명의 주검을 찾고, 무명열사 5구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노력은 그동안 계속 이어져 왔다.

 

이제 행불자를 찾는 사업은 광주시에 맡겨져 있다. 광주시는 무명열사의 묘지를 발굴한 데 이어, 광주 일대의 암매장지역 64곳 가운데 광주통합병원 담장, 황룡강 제방, 31사단 동쪽 야산 등 9곳을 새로 발굴했다. 일부 장소에서는 유골을 발굴했지만 5·18과 관련성이 없다고 판정했다. 광주시는 행불자 신고를 한 130가족 295명의 혈액을 채취해 유전자 감식 자료를 확보해 놓고, 암매장지역에서 발굴한 유골의 유전자와 대조하는 작업을 벌였다. 또 암매장지 제보(062-613-3675)에 현상금 1000만원을 걸고 있으나, 이제 광주 일대에서도 관심은 저조하기만 하다.

 

<5월을 찾다> <실종> 등 5·18 행방불명자를 다룬 작품을 만들어온 박성배(44) 다큐멘터리 감독은 “60년 전 6·25 때의 유골도 가족을 찾아주는데 30년 전 5·18 때 주검의 신원을 못 찾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정부가 실종자를 찾기 위해 특별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안관옥 기자

 

201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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