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울던 철거민들의 둥지 '쓸쓸한 퇴장'

2010. 6. 21. 12:31sensitivity

 

 

 

» 하늘 아래에서 달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다는 달동네. 서울지역 마지막 달동네로 손꼽혀 온 노원구 중계동 104번지 일대에는 3500여명의 주민들이 불암산 자락에서 옹기종기 살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일제 식민 치하의 슬픈 자화상 토막민

근대화 도시화의 어두운 자화상 달동네

도시 미관을 해치는 암적인 존재로 전락한 달동네

 

불도저와 굉음 속에서 사라져 가는 달동네

철거용역과 철거민들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달동네

그것은 1980년대 대한민국의 자화상이었다.

 

건설족들의 먹잇감 달동네

도시재개발, 뉴타운으로 이어진 끊임없는 건설자본 재생산의 본체 달동네

그것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서민의 애환과 이농민들의 삶이 골목마다 배여있었던 달동네

옥신각신 힘든 삶 속에 욕이 오가도 하루가 멀다하고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달동네

작은 것이라도 이웃과 나누며 오손도손 웃음꽃이 만발하였던 달동네

한 여름 옆집 누나의 목욕하는 물소리에 귀를 쫑긋거리며 두근거렸던 어린친구들의 삶의 터전 달동네

미로같은 골목을 그리고 잘 누비고 다녔던 동네 말썽꾸러기들의 놀이터 달동네

 

그곳은 서민의 생생한 삶이 무지개빛으로 펼쳐진 스펙터클의 현장이었다.

하늘 아래 한뼘 몸을 누일 수 있었던 행복의 공간이었다.

공순이 누나의 늦은 밤 퇴근길의 고단함이 배여있었던 공간이었다.

주름진 아버지의 지친 발걸음이 여기저기 배여있던 공간이었다.

가난이 싫어 반항하던 오빠, 형들의 본드냄새가 배여있던 공간이었다.

 

그리고 가난을 이기기 위해 그 좁은 방에서 밤을 새며 공부했던 친구들의 땀이 배여있던 공간이었다.

힘들지만 곱게 키운 딸 아이가 시집가는 날 온동네 음식냄새가 진동하는 공간이었다.

그 귀엽고 작은 동생들이 빤스도 입지 않고 돌아다니며 귀여움을 떨던 공간이었다.

더 가까이 하늘을 보며 미래의 편안함 삶을 기도하던 공간이었다.

 

그리고 도시의 수많은 일자리를 담당했던 산업노동자의 공간이었고

재래시장 아줌마들이 조막잠을 청하던 공간이었고

힘든 노동에 지친 아버지가 막걸리 한잔에 김치를 안주삼아 시름을 달래던 공간이었다.

 

그리고 달동네는 우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개발이란 미명 아래 사라지고 있다.

그 달동네의 주인들은 변방으로 변방으로 쫓겨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엔 손에 돈을 쥔 사람들이 들어서고 있다.

 

도시를 이렇게 탈바꿈하고 있다.

고통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영글던 자리에

돈의 욕망을 쫓아 성공한 자들이 다시 그 탐욕의 증식을 위해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도시는 슬프다.

그리고 땅은 아스팔트로 공그리로 뒤덮이고 있다.

그 비오던 날 길을 걷기 위해 신어야만 했던 장화는

이제 외제차가 쌩쌩 달리고 있다.

 

 

철거 앞둔 달동네 '서울 중계동 104마을'
전기, 상하수도 없던 불암산 자락에 1960년대 형성
3,500명 주민 지금도 거주---아파트 단지로 재개발
 
마을은 산자락을 따라 낮게 엎드려 있었다. 6월의 푸른 산 아래로 잿빛 콘크리트 집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들쭉날쭉 자리잡고 있었고, 슬레이트 지붕 위로 덩굴이 기어올랐다. 좁고 낮은 골목길은 집들 사이를 굽이쳐 흐르며 마을을 잇고 있었는데, 곧게 뻗은 길도 같은 모양의 길도 없었다.
 

달동네가 다 그렇지, 뭐 볼 게 있다고. 생긴 지 40년도 넘었어.” 지난 18일 오후 서울 노원구 중계동 ‘104 마을’에서 만난 오영숙(77)씨가 거친 손으로 머위대를 다듬으며 말했다. 껍질을 까는 손끝은 풀물이 배어 까맣게 변해 있었다.

 

오씨는 36살 되던 해인 1969년 9살, 6살, 3살 된 아이들을 데리고 이 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1960년대 말 박정희 정권이 도심 정비를 목적으로 청계천, 종로, 남대문, 용산 일대에 퍼져 있던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하면서부터다. 박정희 정권이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이곳 104마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대규모 달동네가 불암산 자락에 생겨났다.

 

이곳에 기대 살면서 오씨는 채소장사를 시작했다. 청량리 경동시장에서 채소 몇 포기를 사 와, 길바닥에 주저앉아 팔았다. 지금은 35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지만, 당시에는 서울 무허가촌에서 쫓겨온 이주민과 지방에서 올라온 이농민 등 5000여명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푼 두푼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마을 안에 한 평짜리 가게를 마련했다.

 

마을에서 오씨는 5번이나 이사를 다녔다. 돈을 모아 집을 사고, 그 집을 팔아 자식들 학비를 대고, 다시 돈을 모아 집을 사는 생활이 반복됐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오씨의 가게에서 상추, 열무, 고추, 감자 등과 이들 씨를 사 갔다. 가게 이름은 고향 이름을 따 ‘온양상회’라고 지었지만 간판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지난 40여년 동안 오씨는 자신의 가게를 그렇게 부르며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다. 지금 온양상회는 15평으로 늘어났고, 마을로 들어올 때 업고 온 세살배기 막내아들은 44살이 됐다. 오씨는 “자주 무를 사러 오던 동네 색시에게 막내아들을 장가보냈다”고 웃으며 말했다.

 

오씨를 비롯해 초창기 주민들은 서른평 남짓한 천막 하나에 4가구가 들어가 살았다. 천막은 정부가 이주대책으로 지원한 유일한 물품이었다. 가진 것이 없던 주민들은 천막 안에 4등분으로 선을 긋고, 한 칸에 한 가구가 들어가 살았다. 8평짜리 사각형이 이들에게 유일한 보금자리이자 안식처였다.

당연히 상하수도도 없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주민들은 마을 한가운데에 공동 우물을 파 물을 길어 먹었고, 공동화장실에서 길게 줄을 서서 볼일을 해결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온 마을이 진흙탕으로 질척거렸고, 공동화장실이 넘쳐 똥물이 흘렀다. 주민 박창래(75)씨는 “그래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배우자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유행했다”고 말했다.


산자락에 있다 보니, 늑대가 출몰하기도 했다. 마을이 생길 때 이사 온 박아무개(77)씨는 “천막을 치고 생활할 때 산에서 먹이를 찾으러 내려온 늑대가 천막 주변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놀라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서울 하늘 아래였지만 늑대가 나타날 정도로 산속에 위치해 학교 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박씨는 “지금은 버스를 타고 다니지만 예전에는 아이들이 산 너머에 있는 연촌초등학교를 산길로 걸어 다녔다”며 “아이들이 학교 갔다가 늦게라도 오는 날엔 늑대를 만나지 않을까 불안해 꼭 나가봤다”고 말했다.
 

이들 철거민들의 애환을 간직한 104 마을이 기억 속으로 사라질 예정이다. 서울 노원구가 최근 ‘중계본동 주택 재개발 정비사업’의 건축 설계안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서울지역 마지막 달동네로 손꼽혀온 이곳에는 지상 6~20층 42개동, 2758가구 규모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된다. 노원구는 “철거와 이주 등 단계를 거쳐 공사 착공 때까지는 약 3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3년의 시한부지만, 마을 주민들은 여전히 오씨의 가게에서 산 열무씨를 뿌리고, 텃밭에서 상추를 돌본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기사등록 : 2010-06-20 오후 08: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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