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21. 12:38ㆍlecture
일제수탈 피난처…도시개발의 ‘그늘’ | |
토지 빼앗긴 농민들 거주지 6·25 뒤엔 ‘해방촌’으로 명맥 정권마다 강제이주로 ‘마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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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의 역사
일제 강점이 시작된 1910년대, 일제에 땅을 빼앗기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농민들은 일자리와 먹을 것을 찾아 서울로 모여들었다. 살 집이 없던 이들 대부분은 산비탈, 제방 등에 움집 같은 ‘토막’을 짓고 집단으로 생활했다. 땅을 파 토굴을 만들고, 그 위에 거적 따위를 얹어 만들었다. 이런 가난한 집들이 집단을 이루고 개량되면서 ‘달동네’가 탄생했다.
1927년 조선총독부가 파악한 토막민은 3000여명이었다. 이들은 주로 홍제동, 돈암동, 아현동, 신당동, 금호동 등지에 흩어져 살았다. 토막민은 1920~30년대를 거치며 급속히 늘어나 1942년에는 3만7000여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듬해, 일제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틈을 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토막집을 정리해 나갔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1996년 펴낸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연구>에서 “조선총독부와 경성부는 토막민들을 구슬려 속이거나 강제로 징집해 일본 홋카이도나 사할린 탄광으로 징용해갔다”고 썼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서울의 무허가 주택은 더 늘어났다. 서울 남산자락 밑에 자리한 우리나라 공식 1호 달동네 판자촌인 ‘해방촌’(용산구 용산동2가)도 이 때 형성됐다. 이 시기의 무허가 집들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종이상자, 양철, 함석 등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이 가운데 미군들의 전투식량을 담은 ‘시(C)-레이션 박스’가 주요 자재였던 터라 무허가 판잣집을 하코(상자·箱)라는 일본말을 써 ‘하꼬방’이라고 불렀다.
전쟁에 따른 파괴와 상처가 복구될 무렵인 1950년대 말부터 서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피란민과 이농민들이 서울로 흘러들어와 도시빈민으로 전락했다. 이들은 도심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생활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1959년 미아리에 ‘정착지 사업’을 벌여 도심의 무허가 거주민들을 강제이주시켰다. 이 사업에 따라 1970년까지 상계동, 중계동, 도봉동, 창동, 쌍문동, 구로동, 사당동, 신림동, 봉천동, 가락동 등 서울 외곽지역으로 달동네가 확산됐다.
이런 달동네는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공영재개발과 합동재개발을 통한 불량촌 재개발 사업으로 하나둘 사라졌다. 70년대 후반 건설붐을 타고 중동으로 눈을 돌린 건설자본이 당시 투입한 인력과 기술을 바탕으로 80년대 상계동, 사당동, 신당동 등 달동네를 하나하나 재개발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늘 아래서 가장 가까이 달을 볼 수 있고, 가장 먼저 달이 뜬다는 뜻의 ‘달동네’라는 말도 이때부터 유행했다.
재개발로 하나둘 사라져가던 서울의 달동네들은 2002년 이명박씨가 서울시장이 된 뒤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없어지기 시작했다. 이 시장은 그 전의 재개발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재개발인 ‘뉴타운’ 사업을 추진했다. 2005년까지 은평, 왕십리, 길음, 아현, 돈의문, 영등포, 노량진 등 서울시내 26개 지역이 뉴타운 주택재개발사업 대상지로 지정됐다. 남아 있던 달동네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됐다. 뉴타운 사업은 불량주택 정비라는 측면에서 긍정적 대목이 있으나, 세입자 문제, 집값·땅값 폭등, 고층 아파트 일변도의 주택 공급 등 수많은 사회 문제를 낳았다.
김경욱 기자 |
기사등록 : 2010-06-20 오후 08:1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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