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2010. 10. 30. 18:06Book

 

 

외국 언론이 극찬한 한국 경제학자의 저서
금융자산가 위한 인플레 억제책
‘경제안정·성장 수단’으로 왜곡
한겨레 한승동 기자기자블로그

 

미국 경영자들이 노동자 평균임금의 300~400배나 되는 봉급을 받아가는 건 그들의 생산성이 그만큼 높거나 기업 이익에 대한 기여도가 그만큼 크기 때문인가? 아니다. 잘사는 나라 사람들이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은 그만큼 생산성이 높기 때문인가? 아니다. 교육을 더 시키면 그만큼 더 잘살게 될까? 꼭 그런 건 아니다. 자본엔 정말 국적이 없나? 아니다. 우리는 탈산업 지식경제사회에 살고 있나? 아니다. 인터넷이 정말 세상을 완전히 바꾸고 있나? 글쎄, 세탁기나 전보의 발명 쪽이 준 충격이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자유시장만이 해법인가? 거짓말이다. 자유시장이란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다. 지엠(GM)에 좋은 것은 항상 미국에도 좋은가? 아니다. 파산한 지엠을 보면 알 것 아닌가. 그렇다면 삼성에 좋은 것은 항상 한국에도 좋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아니다, 아니야로 일관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3 Things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가 겨냥하는 부정의 대상은 흔히 신자유주의로 통칭돼온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그 이데올로기다. 장 교수의 책을 읽어온 사람들에겐 이런 이야기들이 이미 낯선 게 아닐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2009년에 나온 책이고 <사다리 걷어차기>가 2002년, <국가의 역할>이 2003년, 그리고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2007년에 출간됐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목 그대로 지난 30여년간 자본주의 세계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 교의를 23가지 명제로 압축해 하나하나 그 신화를 깨뜨려가는 이 책이 1929년 대공황 이후 최악이었다는 2008년 월스트리트발 금융위기와 그 파장을 지켜보면서 썼다는 점이 중요하다. 2008년 금융위기는 뮈르달 상과 레온티에프 상을 받은 일련의 저작들에서 신자유주의의 맹점과 거짓, 그것이 불러올 위험을 날카롭게 지적해온 장 교수의 주장이 옳았음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그래선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더욱 확신에 차 있고, 그의 책을 읽히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인 다양하고 적확한 비유와 사례비교들은 한층 더 풍부하고 경쾌해졌다.

 

풍부한 사례로 주류경제학 비판‘
세계 경제재건 8가지 제언’ 내놔

 

그가 ‘아니다’ 하고 부정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워싱턴 컨센서스’가 상징하는 자유시장 자본주의다. 그런 점에서 그의 부정은 ‘다른 자본주의’ ‘더 나은 세상’의 가능성을 설파하는 강력한 긍정이다. 그의 얘기는 죽은 얘기가 아니라 지금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살아 있는 얘기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9월29일치 사설에서 장하준에게 찬사를 보내면서 더욱 대중친화적인 이 책에서 다루는 23가지가 더 많은 독자들은 물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는 정치인들에게도 읽힐 만하다며 최근 영국 노동당의 새 대표가 된 에드 밀리밴드에게 장 교수와 점심식사를 함께 해보라고 권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영국 캐임브리지대학 장하준 교수.

미국 최대·최고의 기업으로 세계 자동차시장의 제왕이었던 지엠은 왜 파산했나? 지엠은 주주가치 극대화 전략에 따라 끊임없이 구조조정, 해고, 비정규직화 등을 무기로 다운사이징을 하고 투자를 기피했다. 이런 단기전략 위주의 경영이 지닌 문제점은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드러났으나 지엠은 2009년 파산할 때까지 전략을 바꾸지 않았다. 단기전략 덕에 더 많은 배당을 받은 주주들은 경영자가 가져간 천문학적인 연봉도 기꺼이 수용했다. 지이(GE) 경영자 잭 웰치가 나중에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아이디어”라고 실토했다는 주주가치 우선과 운영자 자신들도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도 몰랐다는(뻔히 알면서도 그랬다는 얘기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파멸적인 파생금융상품이 상징하는 금융규제 완화가 미국 제조업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주주들은 그렇게 해서 기업이 망하면 주식을 처분하고 떠나면 그만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비금융 기업이 소유한 금융자산은 비금융자산의 40% 정도였으나 2000년대 이후 미국을 대표하는 제조업체조차 금융수익에 의존하는 사실상의 금융업체로 변신했다. 2003년 지이그룹 이윤의 45%가 지이캐피털에서 창출됐고, 2004년 지엠그룹은 이윤의 80%를 금융자회사 지맥(GMAC)에서 올렸으며, 2001~2003년 포드그룹의 모든 이윤은 포드파이낸스가 벌어들인 것이었다. 월스트리트를 부정한 투기수익에 취한 광란 상태로 몰아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파생금융상품을 “대량금융살상무기” (Weapons of Financial Mass Destruction)라 불렀던 투자가 워런 버핏의 예언은 2008년 금융위기로 실현됐다. 금융 허브를 꿈꾸던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라트비아 등이 직격탄을 맞았다.

 

장 교수가 보기엔 신자유주의 강자들이 부르짖는 재정안정 등을 통한 인플레 억제와 자유로운 자본이동, 노동 유연성(고용 불안정을 가리는 미사여구)도 결국은 금융자산가들의 투기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인플레이션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라는 장 교수는 인플레 억제정책을 “장기적 안정과 경제성장, 그리고 인류의 행복을 희생해서 금융자산 보유자들에게나 유리한 정책을 추진하려는 사람들이 대중을 겁주기 위해 사용해온 ‘무서운 망태 할아범’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더 많은 교육이 더 나은 삶을 보장한다는 것도 허구라고 논박한다. 신자유주의가 유발한 고용불안으로 성적 높은 학생들이 직업적 안정성이 높은 의대나 법대 쪽으로 쏠리고, 학력 인플레가 기승을 부리는 한국의 예를 들면서 그는 대학교육의 절반 정도는 생산성과는 별 상관 없는 일로 낭비되고 있다며 학력 인플레의 폐해를 이기적 영화 보기에 비유했다. “(앞쪽 관람석에서) 한 사람이 서기 시작하면 그 뒷사람도 따라 서게 되고, 그러다가 일정 비율 이상의 사람들이 서면 결국 모두가 서서 영화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말이다. 영화관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화면을 더 잘 볼 수도 없으면서 앉아서 보지도 못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책에는 이런 기막힌 비유와 비교들이 참으로 적절하게, 그리고 풍부하게 들어 있어 설득력을 높인다. <가디언>이 영국 주류경제학의 협소한 시각을 탓하며 19세기 독일과 21세기 중국 등 전세계 모든 시대의 구체적 통계수치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장 교수를 추어올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결론삼아 내놓은 세계경제 재건을 위한 8가지 제언은 다음과 같다.

 

1.자본주의를 제대로 굴러가게 하려면 규제가 필요하다.

2.인간의 정보처리능력(합리성)엔 한계가 있다는 걸 인정하라.

3.이기심이 인간행동의 유일한 동기는 아니며, 사회적 책임·공익도 중요하다.

4.기회의 평등만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도 어느 정도 이상 보장하라.

5.제조업은 여전히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6.금융부문과 실물부문 간에 적절한 균형을 회복하라.

7.더 크고 더 적극적인 정부가 필요하다.

8.개도국들을 ‘불공평’하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우대하라.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 지은이와 함께| 장하준 교수

 

“신자유주의,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

 

28일 서울에서 열린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출판 관련 기자 간담회. 2007년에 낸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불온서적’으로 만들어버린 국방부의 금서조처가 합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났으니 신간도 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겠느냐고 기자가 물었다. 장 교수는 “불온서적으로 해주시면 책 파는 데엔 도움이 되겠다. 지난번에도 덕 좀 봤는데…”라면서도 “착잡하다”고 했다. 신자유주의의 맹점을 통렬하게 지적해온 장 교수의 책들은 실상 과거 한국의 경제발전 전략을 가장 성공적인 사례의 하나로 꼽고 있다. 국방부식 ‘애국심’ 기준으로도 그의 책들은 도저히 ‘불온’이 될 수 없다.

 

그래선지 이전 책들에 비해 “선진국들 문제까지 포함해 더 광범위한 문제를 다룬 것”이라는 이번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도 이렇게 압축했다. “모든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면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이라고 철통같이 믿었던 것들도 좀 더 자세히 보면 모래성 같은 것일 수 있다. 들은 대로 믿지 말자는 것이다.” 간담회 머리발언에서도 그랬다. “경제학이란 게 결코 어렵지 않다. 제일 어려운 건 이것저것 다 알아야 하는 민주시민 되는 일이다. 잘 모르겠다, 교수가, 신문이 얘기하는 거니까 맞겠지 뭐, 해서는 안 된다. 파생금융상품이 위험한 것이고 규제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장 교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관련해 “미국이 재협상하자고 할 때 아예 (FTA 자체를) 안 해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수준이 비슷한 나라들끼리 하면 득이 된다. 수준에 차이가 있으면 장기적으론 후진국이 손해본다. 우리는 아직 구미를 따라잡을 게 많은데 협정 맺어버리면 따라잡을 수 없다. 5등 하던 아이를 1등반에 넣으면 따라잡을지 모르지만 15등 하는 아이를 넣으면 더 떨어진다. 제조업 생산성이 구미의 40~50%밖에 되지 않는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다. 전자나 조선 등에서 1등 하니까 대단한 것 같지만 바깥에서 보기엔 아직 아니다.” 거듭 제조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는 “현 정권이나 지난 정권이나 마찬가진데, 제조업 버리고 금융업 쪽으로 가서 쉽게 돈벌려는 생각을 자꾸 하는 것이 제일 걱정된다”고 했다.

 

신자유주의라는 반동이 시작된 1970년대 중반 이전 케인스주의 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냐, 자신의 경제학적 위상을 어느 지점에 설정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나를 제도학파라는 사람들도 있으나 나는 무슨 학파에 속하지 않는다. 세상은 다면적이고 복잡해서 거시냐 미시냐, 케인스냐 아니냐 따위로 나눠 그중 하나를 선택해선 문제를 풀 수 없다”고 했다. “케인스가 제일 낫다곤 하나 기술혁신 등의 분야로 가면 리스트나 슘페터, 칼도를 봐야 한다. 마르크스·레닌부터, 결론엔 동의할 수 없었으나 하이에크까지 다 읽어 봤다. 각기 다 취할 점이 있다. 어떤 사회로 갈 것인가? 나는 유토피아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책사안마다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는 잘못된 걸로 결판났다. 원칙적인 면에선 1970년대 중반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그 시대(1950~60년대)가 옳은 게 많다. 자본(금융)시장 규제해야 하며 단기수익 전략 위주로 가버린 신자유주의를 버리고 장기투자로 다시 전환해야 한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으니 (전술도) 같을 순 없다. 이번 책은 일단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리는 게 급하다는 생각으로 썼다. 대안은 그다음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기사등록 : 2010-10-29 오후 08:19:42 기사수정 : 2010-10-30 오전 09: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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