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 18. 17:12ㆍlecture
김정남씨 “역사 죄인들, 반성커녕 여전히 활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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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017 20:41 | 수정 : 20111018 0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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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를 연재하며
30여년 투쟁끝에 얻은 민주화 피와 눈물자욱 아랑곳없이 박정희 우상화 등 뻔뻔한 시도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의 저서 서문에서 ‘조선 1천년 1대 사건’으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의 실패를 들었다. 묘청의 실패로 우리나라는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웅혼한 기상을 잃어버렸고, 국토도 끝내는 한반도에 머물고 말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빗대기는 뭣하지만, 1948년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 이후 60여년에 걸친 한국 현대사에서 제1대 사건은 무엇일까. 나는 30여년에 걸친 군사독재의 정치문화를 걷어내고, 마침내 이 땅에 민주주의 정부를 되찾아 세운 민주화라고 생각한다.
민주화란 무엇인가. 내가 나 자신 운명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이 내 운명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싸운 노동운동·농민운동·빈민운동·시민운동·민중운동·학생운동…, 그 모든 것이 민주화 투쟁, 바로 그것이었다. 이렇게 국민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이룩한 민주화야말로 정부 수립 60여년 이래 최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이래, 이는 이 나라의 국시였지만 상당기간 사문화됐다. 이를 명실상부한 국시로 되찾아오기까지 30여년이 걸린 것이다.
이 헌법 제1조는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우리 국민에게 있어서 최우선적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가장 높게, 끝까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인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최근 들어 외면 또는 축소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민주화가 얼마만한 신산고초 끝에 이루어진 것인지를 잊어간다. 심지어 민주화의 그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폄하하거나 왜곡하려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그 자체를 파괴·유린하는 사람들이 유령처럼 되살아난다.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우상화 작업마저 공공연히 이루어진다. 명백히 반민주 독재의 편에 섰거나,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파괴·유린하는 데 앞장섰던 정치인·언론인·지식인들이 다시 판을 친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민주화가 혁명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우리는 그들에게 “당신은 그때 어디서 무슨 짓을 했는가”를 물어보지 못했으며, 그들은 집단적인 통회를 하지 않았다. 그때 군사독재의 앞잡이가 되어 있었던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 역사와 국민 앞에 사죄한 사람이 없다. 죄없는 정의로운 사람을 잡아넣고, 고문하고, 사형과 무기형으로 판결한 판사·검사 가운데 공개적으로 속죄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과연 그들이 역사 그리고 자식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87년 1월, 서울대 박종철군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치사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인용하여, 수사관뿐만이 아니라 남의 일처럼 무관심하였던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 “살인죄를 범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진심으로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정작 살인을 한 자들은 한번도 죄를 고백한 적이 없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 그들이 거꾸로 민주화운동 세력을 심판하려 하고 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나는 군사독재라는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끌어안고 한번쯤 울어보지 못한 사람은 조국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적어도 민주화 투쟁의 기간을 산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그들이 어떻게 감히 얼굴을 들고 뻔뻔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옛날의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는 ‘진보 대 보수’로, 이름만 바꾸어 대치하고 있다. 경제적 양극화 못지않게 이러한 정치적 양극화는 이 나라와 국민을 극도의 분열로 몰아가고 있다. 나는 이제는 진보니 보수니, 좌니 우니 하는 냉전시대의 터널을 벗어나자고 호소하고 싶다. 우선 그런 색깔론이나 이념적 구분을 걷어치우자고 말하고 싶다. 이 나라 이 공동체를 놓고 누가 더 효율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가를 놓고 정의로운 경쟁을 해야 할 때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멈춰 서서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나는 민주화세력이 모두 옳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민주화를 향해서만 달려왔기 때문에 경륜이 부족하고, 세계화와 미래에 대한 고뇌가 결여되어 있다. 남에 대해서는 엄격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자신을 다스리는 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부패·관용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하다. 민주화 세력 역시 자기반성과 성찰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어느덧 종심(從心)의 나이가 되었다. 기억은 날로 희미해지고, 기록은 어디에 있는지 혼미스럽다. 더 늦기 전에 남길 것은 남기고 전할 것은 전해야 하겠다. 성심과 최선을 다하여 증언할 것이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
“박정희, 서울서 항쟁땐 직접 발포 명령하겠다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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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017 20:55 | 수정 : 20111018 10: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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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전 그날의 진상은…‘김재규 최초진술’ 육성 첫 공개
김재규: 금년도 9월달에 부산에 계엄이 있지 않았습니까?(※1979년 10월16일 부마항쟁이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은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함)
변호사: 그렇죠. 김재규: 그 이후에 대통령하고 같이 식사를 했어요. 자유당 발언이 있어가지고. 내무장관 최인규(※1960년 3·15 부정선거를 지휘한 혐의로 투옥된 뒤 사형됨)가 발포 명령을 해가지고는. 변호사: 다 죽였지요. 김재규: ‘나는 그런 짓 안 한다. 나는 내가 직접 한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 물러가면 그만이지. 나를 사임까지 시키겠느냐?’ 이런 정도의 강경한 분입니다. 변호사: 아! 발포 명령을 자기가 하겠다고 그래요? 김재규: 내가 직접 발포 명령 한다. 변호사: 박정희가?
김재규: 예.
1979년 10·26 직후 ‘김재규 최초의 진술 육성 테이프’(사진)를 32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한다. ‘재야 민주화운동의 산증인’ 김정남(69) 선생이 18일부터 <한겨레>에 연재하는 ‘10·26 32돌 특별기획-박정희 시대를 증언한다’를 통해서다. 매주 1회씩 연재할 증언의 첫회는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와 독재자 박정희 최후의 순간’으로 시작한다. 김재규의 육성 테이프는 재판에 앞서 그해 11월30일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로 찾아간 류택형 변호사와 맨 처음 대화한 내용을 녹음한 것이다. 법정 최후진술과 사형 전날의 유언 등 지금까지 이미 공개된 김재규의 녹취록과 비교할 수 없는 ‘10·26의 생생한 진상’이 날것 그대로 담겨 있다. 이어 연재는 1970년대 초 유신 태동기로 되돌아가 ‘긴급조치’란 악법을 무기 삼은 독재정권의 탄압사와 이에 맞선 민주진영의 지난한 투쟁사를 하나하나 반추해 나갈 예정이다. “망각된 군사독재의 실상과 그에 맞서 피와 땀과 눈물로 이뤄낸 민주화의 가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고 밝힌 그는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그 초심을 잊지 말자”고 했다. 글·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김재규 육성 진술 파일 1
김재규 육성 진술 파일 2
‘민주화운동 산증인’ 김정남 박정희 시대를 증언한다
① 김재규 10·26 녹취록 공개 <상> 독재정권 종식 위한 ‘거사’ 전두환 군부가 진실 왜곡 대법 판결 나흘만에 사형
■ 김재규 ‘최초의 육성 진술’을 듣다 변호사: (중략)그런데 이거 필연성 문제, 어째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 필연성 문제를 말이죠. 뭐 잡다한 얘기는 하지 마시고, 하나둘 간추려서 간단간단하게 얘기를 해 주세요. 김재규: 자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변호사: 옳지. 좀 큰 소리로 해 주세요. 김재규: 대통령께서 희생이 되지 않고는 자유민주주의는 없다. 에~, 변호사: 예. 그러고 또?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두번째로? 요점만 딱딱 하셔야 돼요. 김재규: 대통령께서 희생이 되어야만 결국은 내가 생각하는 혁명 목표를 달성할 수가 있다, 변호사: 응~. 김재규: 다시 말해서 민주회복을 위한, 변호사: 민주회복을 위한 혁명이다, 이 말이죠?”
고문을 많이 당한 탓인지, 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있는 힘을 다해 10·26의 진실을 증언하고 있었다. 녹음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내용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1979년 12월 초 나는 김재규의 육성을 듣고 있었다. 바로 며칠 전 11월30일에 녹취된 테이프였다. 이른바 ‘10·26’ 이후 김재규 최초의 진술이었다. 첫 공판일로 예정된 12월4일을 앞두고 강신옥·홍성우·황인철 등 인권변호사들과 함께한 자리였다. ‘궁정동의 거사’ 6시간 만인 이튿날 새벽 전두환의 보안사로 끌려가 모진 고문과 함께 조사를 받은 김재규는 11월6일 합동수사본부의 수사 발표 이후 군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류택형 변호사(당시 민주통일당 대변인 겸 인권위원장)는 무작정 교도소로 찾아가 김재규를 만나고 녹음까지 하는 데 성공했다. 김재규 역시 매우 적극적으로 ‘거사 이유와 총격 상황’을 설명했다.
김재규: (각하가) 그러면서 돌아가시려고 그런 건지, 그 시간에 자기가 돌아가시려고 그런 건지. 보통 식사 자리에서는 그런 얘기 잘 안 나오는데. 어떻게 또 그게 또 그 얘기가 나왔는지, 변호사: 김영삼 (구속) 얘기를 그때 하더라 이 말이에요? 김재규: 예. 변호사: 쏴버렸는데, 그러면 차지철이를 먼저 쐈다매요? 김재규: (총 가진 사람 먼저) 일단 뭐, ‘빵-! 빵-!’ 이렇게, 변호사: 차지철이한테는 이 버러지 같은 놈, 그랬습니까? 김재규: 그게 아니죠. 여기 보고는, 대통령을 똑똑히 모시시오, 라고. 변호사: 옳지. 김재규: 그러니까 (차지철이) 뭐라고?, 총 뽑아가지고 맞서려고 해서. 변호사: 옳지, 옳지. 김재규: 나는 이 버러지 같은 새끼, 하고 이 말을 하고 ‘빵-! 빵-!’ 하고.”
무엇보다 이 녹취록의 의미는 김재규의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 속에 스스로 규정한 ‘10·26 민주혁명’의 진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그는 박정희를 위해,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첫 진술을 마지막 유언 때까지 수미일관했다.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를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나였지만, 그날 그 목소리의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녹음기에 흘러나오는 김재규의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진정성 있는 말이야말로 잘 쓰여진 글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인권변호사들도 그의 인품에 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김수환 추기경의 주선에 따라 마지못해 변호를 맡기로 했던 이들은 김재규를 만나기 전 이 육성을 듣고 ‘반드시 구명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나는 그 즉시 김재규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녹음을 복사해 인편을 통해 일본 가톨릭 정의평화협의회로 몰래 보냈다. 이것이 다시 미국과 유럽 쪽으로 퍼져 국외에서부터 김재규 구명운동이 일어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 김재규의 ‘고독한 혁명’
“이승만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에 국민의 희생을 염려하여 물러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고 또 모든 면에서 완벽한 분입니다.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어이 방어해서 권력을 유지하려 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내가 부마 사태의 본질과 그것이 전국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고드렸더니 각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만일 서울에서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겠다.’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4·19의 불행을 우리는 겪었습니다. 그러나 완벽한 성격의 이분이 위에서 방어를 할 때 어떤 결과가 올지 상상해 보십시오. 급기야는 국기를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미국도 우리와 등집니다. 국가방위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더이상 늦출 길이 없다,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80년 1월 2심 최후진술에서)
나는 10·26을 ‘김재규의 고독한 혁명’이라고 쓴 적이 있다. 그것은 그의 말처럼 오직 그 자신만이 혁명의 처음이요, 끝이며 전부였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아무도 그의 혁명을 혁명으로 받아들이거나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10월26일이 70년 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일과 겹친다는 것도 묘한 여운을 더해준다. 무엇보다 그는 그 자신의 ‘10·26 민주회복국민혁명’에 대해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변호사: 그런데 기자들이 말이죠. 전두환 그 수사관한테 심문, 저기 물어본 것 중에서 미국의 중앙정보부(CIA)가 좀 한 거 아니냐? 이런 걸 물어봤거든. (중략) 그까짓거 미국놈들이 그거 합니까? 못해. 김재규: 미국놈들이 하려고 하면 저 밑에 있는 하빠리 얘들 시키지. 미쳤다고 중앙정보부장 하고 있는 제가 직접 하수인 노릇을 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는 혁명이란 “기존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가 말하는 기존의 체제는 유신체제요, 새로운 질서란 자유민주주의 새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훗날 법정에서 밝힌 그 혁명의 목적은 다섯가지다. 첫째가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이요, 둘째로 더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는 것이며, 셋째로는 민주주의로서만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는데 적화방지가 그 목적의 하나라는 것이다. 넷째는 한-미의 건강한 선진우호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이요, 다섯째는 국제사회에서 독재국가라는 오명을 씻고, 민주한국의 명예를 되찾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녹취록에서 자신이 혁명을 74년부터 오랫동안 구상했고 79년에도 이미 몇차례 ‘거사’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 흔적은 곳곳에 증거로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민주·민권·자유·평등·위민주정도·비리법권천·위대의·자유민주주의 등 그가 필묵으로 남긴 휘호이고, 자작시 ‘통일송’, ‘나와 자유’ 등이다.
그러나 유신의 원천을 두들겨 부순 김재규의 혁명은 민주화의 출발이 되지 못하고, 전두환 군부의 등장을 가져오는 빌미가 되었다. ‘궁정동의 거사’ 직후 국군서울지구병원을 통해 박정희 서거 사실을 맨 먼저 탐지한 것도 전두환이었다. 육군본부 벙커에서, 국방부에서 최규하 총리를 비롯한 이 나라 정부가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전두환은 이미 그의 참모들과 더불어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 전두환은 계엄하의 보도통제를 통해서뿐 아니라 합동수사본부라는 막강한 권한을 이용해 김재규의 진실을 왜곡·음해했다. 박정희가 살해된 10·26 이튿날, 유신정부는 새벽 4시10분에는 유고로, 그리고 아침 7시20분에는 대통령 서거로 발표하였다. 사건의 전모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그로부터 1주일 이상 지난 11월6일이었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김재규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고 어처구니없는 허욕으로 빚어낸 내란 목적의 살인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대해 김재규는 녹취록에서 단호한 어조로 “거짓말”이라고 항변한다.
변호사: 그리고 대통령을 하려고 했다고, 전두환 그 저기 그 사람이 말이지, 발표를 했어요. 김재규: 예.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스스로가 독재정치에서 혁명을 한 사람이, 변호사: 옳지. 김재규: 나는 군인이고 혁명가입니다. 내가 지금 (대통령)하게 되면 보다 더 지독한 독재거든요. 그런 내가 스스로 그런 데를 내가 왜 합니까?”
‘범행’ 동기에 대해서 전두환은 “평소 이권개입이 많다는 개인적 비리로 대통령의 경고친서를 받았고, 정국 수습책의 실패로 무능이 노정된데다 군 후배이며 연하인 차지철 경호실장이 업무에 간섭하는 방자한 월권으로 수모를 당하고 있음에도 대통령이 차 실장만을 편애한다는 생각에서 불만이 누적되었으며, 특히 요직 개편설과 함께 부산과 마산의 소요사태와 관련해 자신에 대한 인책 해임설이 파다하여 불안하던 차에 대통령으로는 현 정계 인물 중에서 자신이 가장 적임자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주요 인사와 군 지휘관이 자기 영향권 안에 있다는 오판”을 하게 되었다고 몰아갔다.
김재규: 대신에 훗날, 저를 갖다가 흉측한 천하의 없는 흉측한 도둑놈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변호사: 아, 물론이지요. 김재규: 나는 신문에 그 얘기 듣고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내가 치가 떨렸어요.”
재판은 요식이었고, 사형은 기정사실이었다. 사건이 최종판결을 받기 위해 대법원에 계류중이던 80년 3월6일, 김재규의 수행비서관이던 박흥주 대령은 군인이란 이유로 단심 만에 서둘러 총살형에 처해졌다. 4월29일 전두환은 기자회견에서 “대법원 심리는 법 적용만 다루는 것이어서 형량의 변동은 없을 것”이라고 말해 미리 사형 판결을 기정사실화했다.
■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1980년 5월24일 새벽 4시 김재규는 군 교도소에서 서대문의 서울구치소 지하독방으로 이감된 뒤 3시간 만에 교수대에서 최후를 맞았다. 대법원 판결이 확정된 뒤 나흘 만에,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살인적인 진압이 준비되는 바로 그때였다.
사실 김재규는 이미 생사를 초월해 있었다. 그는 어렴풋하게 80년 1월9일(음력 11월22일) 낮, 헌병이 감방의 문고리를 만지는 우연한 순간에 견성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죽을 때까지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도 평화스러웠다. 사형집행을 예감한 듯 바로 전날 군 교도소에서 가족과 변호인을 불러 국민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그래서 나는 아무 누구의 염려 없이 아주 유쾌하고 또 명예스럽고 또 이런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그 자부와 내가 이렇게 감으로써 자유민주주의는 확실히 보장되었다는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나는 즐겁게 갑니다. 아무쪼록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영원한 발전과 10·26 민주회복 혁명, 이 정신이 영원히 빛날 것을 믿고 또 빌면서 갑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오.”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 돌봐줄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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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017 20:42 | 수정 : 20111017 2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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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 가담한 박흥주 대령의 유언
1988년 봄, 나는 서울 행당동 ‘달동네 13평짜리’ 박흥주 대령의 집을 찾아 언덕길을 올랐다. 79년 ‘10·26’ 재판 때 그의 청렴함을 환기시켜줬던 바로 그 집이었다. 거사를 도운 6명 가운데 현역 군인 신분이란 이유로 그는 80년 3월6일 시흥시 소래의 야산에서 가장 먼저 총살형을 당했다. 그에게는 아내와 어린 1남2녀가 있었다. 당시 김재규 구명운동을 주도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생이던 그의 큰딸 대학 등록금용으로 산업은행에 100만원을 예탁해 놓았다. 한동안 잃어버렸던 그 예탁증서를 되찾아 전해주러 간 길이었다. 나는 한사코 돈을 받지 않으려는 부인의 물 젖은 손에 증서를 던지듯 쥐여주고 나왔다.
이후 내내 박 대령을 위해 조금은 좋은 일을 했다고 믿어왔던 나는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부끄러운 사실을 확인했다. 2006년 ‘10·26’ 관련 자료를 뒤지다 우연히 박 대령이 사실상 사형이 확정된 뒤인 80년 2월2일에, 가족에게 보낸 유언을 발견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 아빠가 당연한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어넣어 주시오.…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그대로 놔두지 않을 거요.…의연하고 떳떳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소?”
그런데 정작 그 가족을 위해 우리 사회가 해준 것이 무엇인가. 내가 해준 것은 또 무엇이 있었던가. 우리는 그렇게 그 일을, 그리고 그 사람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김재규와 ‘10·26 거사’에 가담한 부하들의 의리는 감동적이었다. 부하들은 단지 상사의 명령을 따른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김재규를 믿고 존경해 죽음의 길까지 기꺼이 함께했다.
80년 1월28일 항소심 결심 선고날, 이들은 이승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재판이 끝나자 김재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5명(박선호·박흥주·이기주·유성옥·김태원)의 부하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모두들 건강해라”라는 말을 남기고 법정을 떠났다.
이후 5월23일 사형집행을 예감한 김재규는 “나는 국민을 위해 할 일을 하고 갑니다. 나의 부하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라며 “훗날 그들이 죽게 되면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하들은 결국 ‘내란주요임무 종사자’로 몰려 전두환 군부에 의해 서둘러 처형됐다.
지금 김재규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 박선호는 고양, 박흥주는 포천, 이기주는 양주에 있다. 언젠가는 과연 김재규의 소원대로 그들이 함께 묻힐 수 있을까? 정리/김경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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