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고장난 세상을 말하다] ②꿈틀대는 ‘IMF이후 세대’

2012. 2. 22. 16:23discourse & issue

 

 

‘1% 대 99% 사회’ 불만에 투표뜻“근본 해결은 못해” 인식 한계도

등록 : 2012.02.20 21:58 수정 : 2012.02.20 22:03

2030 고장난 세상을 말하다

 

②꿈틀대는 ‘IMF이후 세대’

 

[정치관심 ‘기대와 냉소 사이’ ]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피로와 불만은 2030들이 정치적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출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된다. 심층 인터뷰에서 2030 36명은 다양한 이유를 들어 각자의 투표 의지를 또렷이 드러냈다. 삶이 팍팍해 여유가 없었거나 사회에 대한 불신으로 정치에 거리를 뒀던 2030도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에 정치적 관심을 키워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투표를 통해 작동하는 대의정치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처한 문제를 풀어줄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의 바탕엔 투표로 사회가 변화되긴 어려울 것이라는 근본적인 회의와 냉소가 있고, 투표를 통해 변해갈 세상과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을 별개로 보는 인식의 한계도 있었다. 이들에게 세상은 자신을 성장시키고 보호해주는 공간이 아니라 무한 경쟁에서 누군가를 딛고 살아남아야 하는 정글이다. 사회 구조나 환경의 제약보다 자신의 능력 부족에 더 많은 책임을 돌리는 인식이 몸에 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반값등록금 실현된 서울시립대 부러워”

 

 
‘연간 등록금 1000만원’과 같은 몰상식한 세태에 반발하는 청년세대의 투표 의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1월1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2012년을 반값등록금 실현 원년으로 국민 선포 기자회견’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2030 고장난 세상을 말하다

 


②꿈틀대는 ‘IMF이후 세대’

 


인천의 인하대에 다니는 김민재(가명·남·21)씨는 오는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난생처음 투표를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지역구에 출마하는 후보가 어떤 정책을 약속하는지, 과거엔 무슨 일을 했는지 야무지게 따져볼 작정이라고 했다. 이렇게 전에 없던 결심을 하게 된 까닭은 우리 사회가 ‘상식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 않아서라고 했다.

김씨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재밌게 사는 게 꿈이다. 아이티(IT) 기기 개발과 관련된 일이 지망 분야다. “벤처회사를 하는 사람들은 한번 실패하면 인생이 끝나버리잖아요. 다시 일어서서 도전해보면 뭔가 될 수도 있는 건데 말이죠. 저도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은데 자꾸 몸은 ‘안정’ 쪽으로 기우는 것 같아요. 섣불리 뭔가를 시도했다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시간을 다 흘려보내고, 결국엔 아무것도 못하게 될까봐 걱정이죠.”

그러나 김씨는 한국 사회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것 같다며 말을 이었다. “요즘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면 부쩍 정치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서울시립대가 반값 등록금 한다는 얘기를 듣고 부럽다고들 해요. 서울에 사는 친구들이 ‘투표가 영 쓸모없는 건 아니다’란 말을 하더라고요.”

 

정치관심 ‘기대와 냉소 사이’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피로와 불만은 2030들이 정치적 관심을 적극적으로 표출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된다. 심층 인터뷰에서 2030 36명은 다양한 이유를 들어 각자의 투표 의지를 또렷이 드러냈다. 삶이 팍팍해 여유가 없었거나 사회에 대한 불신으로 정치에 거리를 뒀던 2030도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에 정치적 관심을 키워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투표를 통해 작동하는 대의정치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처한 문제를 풀어줄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의 바탕엔 투표로 사회가 변화되긴 어려울 것이라는 근본적인 회의와 냉소가 있고, 투표를 통해 변해갈 세상과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을 별개로 보는 인식의 한계도 있었다. 이들에게 세상은 자신을 성장시키고 보호해주는 공간이 아니라 무한 경쟁에서 누군가를 딛고 살아남아야 하는 정글이다. 사회 구조나 환경의 제약보다 자신의 능력 부족에 더 많은 책임을 돌리는 인식이 몸에 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희망 인증샷 찍자’ 투표 나서는 젊은 99%들


올해 열리는 총선과 대선을 향한 2030의 투표의지는 뜨겁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1~6일 2030 1000명을 온라인으로 설문조사해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20대의 경우 총선에 ‘반드시 참여할 것’(57.1%)이라거나 ‘가급적 참여할 것’(35.9%)이라고 답한 이들이 전체 응답자의 93%에 이르렀다. 30대에서도 각각 54.4%와 39%로 93.4%나 됐다. 이런 경향은 <한겨레>의 연쇄 심층 인터뷰에서도 확인됐다. 인터뷰 대상자 36명 가운데 33명인 91.7%가 올해 총선이나 대선에 적어도 한 번 이상 투표하겠다고 답했다.

 

전남 목포대에 재학중인 전민수(가명·23·남)씨는 군 복무 때 투표를 하긴 했지만 어떤 선거에서 누굴 찍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는 지난해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나꼼수)를 접하며 정치에 흥미가 생겼다. 학교 친구들과도 종종 정치를 화제로 올린다. 군 입대 전까지 대화의 소재는 주로 여자친구였다. 그러나 최근엔 한-미 에프티에이(FTA)에 대해 수다를 떨며, 생전 처음 토론이라는 걸 해봤다. 에프티에이가 가져올 사회 변화는 자신과 또래들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가 내 삶과 연관돼 있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고 전씨는 말했다. “정당보다는 사람을 잘 따져보고 투표할 생각입니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 남성진(가명·28·남)씨도 투표 경험은 있지만, 정치엔 관심이 없었다. 선거가 때로는 귀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올해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민주 시민으로서 투표는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또 지금 나한테는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피부에 와닿는 정책을 내놓는 후보를 선택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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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꼼수’ 통해 정치에 흥미
한-미 FTA 수다 떨며 토론

 

■ 시장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 징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자료를 보면, 2002년 대선에 견줘 2007년 대선에선 2030의 투표율이 작게는 6.8%포인트에서 크게는 21.4%포인트 떨어졌다. 2008년 총선의 2030 투표율도 2004년 총선에 견줘 10.1~20.2%포인트 낮아졌다. 그러나 2010년 지방선거의 2030 투표율은 2006년 지방선거 때보다 적게는 4.9%포인트에서 크게는 7.5%포인트 높아졌다. 하락 추세였던 투표율의 반등은, 일단 2002년 대선 이후 변화에 대한 기대를 접고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2030들이 유권자로 복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정된 삶을 누리기 어려운 시장 중심주의 사회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표출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 시장 만능주의가 자리잡은 계기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당시 김영삼 정부의 무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으로 외환 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내자, 정부는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렸다. 구제금융이란 이름으로 외환보유고는 다시 채워졌지만, 그때부터 한국 사회에선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이 시작됐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로 이어진 지난 14년 동안 사회 양극화는 꾸준히 심화돼 결국 ‘1% 대 99%의 사회’라는 주장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올해 꼭 투표를 하겠다는 기간제 교사 신은정(가명·30·여)씨의 눈에 비친 한국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사회적 부가 ‘100’이라면 기득권 세력이 ‘90’을 가져가고, 평범한 사람들은 남은 ‘10’을 차지하려고 피 튀는 경쟁을 하고 있어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정책을 통해 이런 문제를 개선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장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 기류는 지난 10년 동안의 국내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좀더 명확히 읽힌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로는 돈 잘 버는 것을 성공으로 규정하며 자기 관리법을 알려주는 이른바 자기 계발서가 책 시장을 휩쓸었다. 2000년 출간된 뒤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2010년 이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 정의의 실현이나 자본주의의 모순을 짚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변화가 나타났다.

 

게다가 지난 선거에서 기권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시했다가 이번에 참여로 돌아선 2030도 있었다. 반등한 것으로 보이는 투표율 변화가 포착하지 못한 수치의 숨은 그림이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당시 민주당 후보를 찍었다는 직장인 송민주(가명·34·여)씨는 2007년 대선 땐 투표장까지 갔다가 결국 무효표를 던졌다. 사회를 변화시킬 만한 후보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땐 그저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지 않기만을 바랐어요. 정치인이 아니라 기업인 마인드가 강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저렇게 지지를 할까 의아해했어요. 나라는 기업이 아닌데 말이죠.” 하지만 올해는 사회를 조금이나마 바꿔줄 후보가 있을 것도 같다고 생각한다.

 

■ MB의 실정과 소통 부재에의 반감 서민의 체감경기를 회복시키지 못하는데다 정책 추진 과정에서 소통 부재를 보여준 현 정부가 2030의 투표의지를 부추긴 측면도 있다. 아이티(IT) 업체에서 일하는 김윤영(가명·26·여)씨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오랜만에 투표를 했다. 2007년 대선엔 참여하지 않았던 그였다.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는 정책을 추진할 때 서민을 고려할 것 같지 않았고, 정동영 민주당 후보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다. 권영길 당시 민주노동당 후보의 경우엔 당선 가능성이 너무 낮아 보였다.

 

그러나 요즘 들어선 그때 투표를 포기했던 게 못내 후회스럽다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인천공항 매각과 의료 민영화로 사람들의 삶이 더 힘들게 될 것 같아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한-미 에프티에이 강행에 대한 반감도 크다. “아무래도 제가 투표를 안 해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면서 이런 안 좋은 일들이 생긴 것 같아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은 나꼼수에 대한 열띤 호응으로 이어졌다. 특히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위축된 상황 속에서 등장한 나꼼수는 신랄한 풍자와 변형 육두문자를 섞은 가벼운 화법, 약간의 음모론을 무기로 다수의 2030을 정치 비평의 장으로 끌어들였다.

 

4대강·쇠고기 등 불통 정책
MB정부가 투표의지 불붙여

 

서울에 사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자 이진수(가명·32·남)씨의 인생은 나꼼수 청취 전과 후로 나뉜다. 집에서 오랫동안 <조선일보>를 구독했지만 정치면은 통째로 넘기며 읽었다. 투표도 거의 하지 않았다. 집회나 시위에 대한 반감도 컸다. 한마디로 정치 무관심층이었다. 컴퓨터 앞에서 홀로 작업하는 일이 많은 그는 라디오와 같이 듣는 매체에 익숙하다. 처음엔 그냥 재미로 나꼼수에 귀를 기울였지만, 평소에 알지 못했던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문제가 보였다. 차츰 청취 범위를 넓혔다. 그는 이제 나꼼수뿐 아니라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나오는 ‘희소식’, 시사평론가 김종배씨가 진행하는 ‘이슈 털어주는 남자’(이털남) 등 다양한 팟캐스트를 듣고 있다. “이런 방송들이 시민들에게 정치인들을 감시할 수 있는 식견을 주고 있어요.” 이씨는 올해 선거에서 야권 쪽에 표를 보태줄 작정이라고 했다.

 

전문대 출신인 중소기업 7년차 직장인 김희연(가명·30·여)씨는 스스로를 정치 무관심층이라고 불렀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투표를 하긴 했지만, 투표장으로 걸음을 옮긴 이유는 서울 화곡동의 집값을 올려주겠다는 당시 나경원 한나라당(지금 새누리당) 후보의 공약에 혹해서였다. 김씨가 화곡동에 33평 빌라 한 채를 장만하는 데 들어간 2억2000만원 중 절반이 빚이다. 그런데 정작 투표소에 가서는 박원순 무소속 후보를 찍었다. 재보선 한 달 전쯤 남편의 권유로 나꼼수를 듣고는 왠지 나 후보를 찍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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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준비 부족에 불안감
총선 때 투표할진 못 정해

 

■ 정치 냉소와 불신은 여전 하지만 김씨에게 정치는 여전히 먼 나라 얘기다. 그렇다고 나꼼수를 꾸준히 듣는 것도 아니다. “언론에선 2030이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들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친한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를 특별히 자주 하지도 않고요.”

 

투표에 관심을 갖는 2030이 늘긴 했지만, 정치권에 대한 냉소와 불신은 여전히 뿌리깊다. 서울에서 4년제 대학에 다니는 노영주(가명·23·여)씨는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이어 올해 양대 선거에도 참여하겠다고 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선 박원순 후보를 찍었다. 나경원 후보가 상대적으로 시장 일을 잘 수행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했다. 노씨도 다른 대학생들처럼 취업 고민이 많다. 얼마 전 취업캠프에 다녀온 뒤로는 생각이 더욱 복잡해졌다. 인사 담당자들은 그 캠프에 온 대학 4학년들에게 “(취업 준비가) 너무 늦었다”고 했다. 그걸 본 뒤론 3학년이 되는 올해 취업 준비에만 몰두할 예정이다. 컴퓨터 자격증을 비롯해, 취업에 필요한 조건을 갖춰놓지 못했다는 불안감도 크다. 정치에 관심을 두기엔 여유가 너무 없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뒤 서울의 4년제 대학에 다니고 있는 구소영(가명·22·여)씨는 올해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예정이다. 구씨에게 현 정부는 한마디로 ‘비호감’이다. 국가 이익에 별 도움이 되지도 않을 것 같은 4대강 사업과 한-미 에프티에이를 그냥 밀어붙이는 모습이 밉살스럽게 보였다. 정권 교체에 힘을 보태 기존 정치인들에게 ‘위기감’을 실감하도록 해주겠다는 게 구씨의 생각이다. 그러나 총선 때 투표를 할지 말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어떤 인물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든 대학생인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박현정 이재훈 기자 saram@hani.co.kr

 

“너희 학교 학생들은 뽑지 않아” 말문 막혀도…분노보다 실력쌓기

등록 : 2012.02.20 21:31 수정 : 2012.02.20 22:06

청년세대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노동조건을 개선해달라고 요구하기보다 자신의 노력으로 쌓은 ‘스펙’을 노동시장에 ‘전시’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양재동 에이티(aT)센터에서 열린 ‘2011 대한민국 취업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줄지어 상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김정효기자 hyopd@hani.co.kr

2030 고장난 세상을 말하다

②꿈틀대는 ‘IMF이후 세대’

아무리 곱씹어봐도 기분 나쁜 일이다. 4년 전 삼촌이 꺼낸 한 마디가 문제였다. 김윤영(가명·26·여)씨는 당시 인천에 있는 한 대학 일어일문과 4학년이었다. 삼촌은 제법 이름이 알려진 중견 기업에 다닌다. 김씨는 오랜만에 만난 삼촌과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다 취업 정보를 물었다. 그러자 삼촌은 “우리 회사에선 너희 학교 학생들은 뽑지 않아”라고 말했다. 말문이 막혔다.

 

김씨는 고등학교 때까지 교사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점수에 맞춰 대학과 학과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이마에 낙인이라도 찍듯 점수와 대학 서열로 자신의 능력을 재단하는 차별적 시선은 견디기 힘든 상처가 됐다. 하지만 김씨는 학력과 학벌로 사람을 차별하는 제도와 사회 구조를 탓하지는 않았다. “제도나 사회 구조가 바뀌는 것보다 내가 바뀌는 것이 더 빠르니까요. 나에 대한 차별은 싫지만, 나와 같은 처지에 속해 있던 사람 중에서 나보다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다는 건 사회 구조보다 개인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자신이 처한 문제점의 원인
“사회모순보다 노력부족” 51%

 

그래서 그는 최근까지 출근 전이나 퇴근 뒤 짬을 내 6달 동안 영어회화와 토익 학원에 다녔다. 그 전에는 1년 동안 일본어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김씨에게 자기계발은 물질적인 성공보다 좀 더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기 위한 투자다. “정치로 제도가 바뀔 필요가 있긴 하겠지만, 제도보다는 제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제가 좀 더 노력해야죠.”

 

2010년 93살의 전직 레지스탕스 투사 스테판 에셀은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사회 양극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금권 등에 저항할 것을 주문하며 “분노하라”고 외쳤다. 그보다 3년 전 경제학자 우석훈은 자신의 책 <88만원 세대>에서 한국의 20대에게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2011년 6월 한국에 번역돼 출판된 에셀의 <분노하라>는 2010년 말 출간된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만큼 호응을 얻지 못했다. 청춘은 분노나 저항보다 위로를 선택했다.

 

분노와 저항은 자신이 처한 문제의 책임소재를 자기 자신보다 사회 구조의 모순에서 찾는 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한겨레>가 심층 인터뷰한 36명 가운데 이와 관련한 물음에 응답한 33명 중 51.5%(17명)는 자신이 처한 문제점의 원인이 사회 구조의 모순보다 자신의 부족한 노력에 있다고 말했다. ‘사회구조의 책임이 더 크다’는 답은 21.2%(7명)에 불과했다. 27.3%(9명)는 ‘양쪽에 책임이 절반씩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절반이 넘는 2030은 분노나 저항보다 단지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에 맞춰 스스로 할 일을 찾아서 하고, 끝없이 자기 능력을 극대화하며 사회에 자신을 맞춰가는 자기계발의 주체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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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 자신의 노력에 책임을 돌리는 건 ‘국가나 사회가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는 냉소 혹은 체념에서부터 출발한다. 전남대에 다니는 김소은(가명·23·여)씨는 차상위계층이다. 한 학기에 200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충당하기 위해 동아리 활동도 자제해가며 공부를 한다. 시급 6000원을 받으며 학교 실험실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들불처럼 일었던 ‘반값 등록금’ 촛불집회에 대해 ‘비현실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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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 말했다. “등록금 인하에는 동의하지만 ‘반값’은 무리죠. 시위를 해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김씨는 서울소재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 했지만, 유학 비용과 비싼 사립대 등록금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어머니의 대답을 듣고는 광주에 눌러앉았다. 하지만 그는 지방대 차별 등의 사회 문제에 대해 말을 아꼈다. “제가 공부를 정말 잘했다면 서울로 갔겠죠.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니까 이 대학에 온 겁니다. 화는 나지만,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국가나 사회가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

 

전문대 출신인 중소기업 7년차 직장인 김희연(가명·30·여)씨도 스스로를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한 달을 힘겹게 일해 230만원을 받지만 주택 대출금과 집안의 빚을 갚고, 연금보험을 내고 나면 손에 쥐는 게 별로 없다. 하지만 그는 ‘세상은 원래 그렇게 돌아갈 뿐 달라진 적도 달라질 것도 없는데 내가 안달복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요즘 불안한 노후에 대비하려고 공인중개사 시험공부를 해볼까 말까 생각 중이다. “국가나 사회가 저한테 해주는 것이 없죠. 그런 기대는 접은 지 오래됐습니다. 그러니까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죠. 그저 나를 좀 더 계발해둬야 언젠가 뭐라도 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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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벌 서열에 따라 내면화한 능력주의
사회를 향한 냉소, 자기 계발 우선주의 사고는 결국 능력주의로 이어진다. 능력주의는 한 개인이 처해있는 사회 구조나 환경보다 그 개인이 노력을 통해 어떤 능력을 보여주는지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역설적으로 이른바 ‘스카이(SKY)’(서울대·고대·연대) 대학과 ‘인(In) 서울’(서울 소재) 대학-지방 국립대-‘지잡대(지방의 잡스러운 대학)’-전문대-고졸 등 수직 서열화한 학벌주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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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시험 성적에 따라 차등 대우를 받는 데 익숙해진 이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단순 경력에 따라 호봉이 올라가는 ‘연공 서열제’를 불신하고, 자신이 계발한 능력에 따라 ‘평등하게’ 대우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건 또 다른 허위의식이라는 비판도 있다. <88만원 세대>의 공동 저자인 박권일은 <표준시민>이란 제목의 연재 글에서 “능력주의는 개인의 ‘측정 가능한 능력’에 의해 불평등이 고착화되는 사회를 풍자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라며 “좀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능력에 따라 제대로 차별해달라’는 요구”라고 했다.

 

이런 능력주의 경향은 특히 공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정규직 노동자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났다. 구미의 한 장비제조업체에서 일하는 김현수(가명·21·남)씨는 장비 제조 기술을 익혀 이 분야에서 장인(명장)에 오르는 게 꿈이다. 장인이 되면 남들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고 대우도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진 자들은 결국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격이 다른 수준으로 사는 것이죠. 저도 가진 자가 된다면 똑같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행동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합당한 능력과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구미의 또 다른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서한승(가명·27·남)씨는 ‘연공 서열제’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경력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철밥통’ 공무원들에게 그런 게 많죠. 실력으로 평가하는 게 제일 좋아요. 그게 회사에도 이득이고, 국가적으로 봤을 때도 이득이죠.”

 

■ “어디에다 화염병을 던져야 하나” 하지만 정작 문제는 사회 구조의 책임을 거론하는 이들조차 분노와 저항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40대와 달리 20대와 30대들은 저항을 통해 정치적 민주주의를 획득한 경험이 없는데다, 저항의 대상이 독재정권으로 확연히 드러나 있던 1980~90년대 초반과 달리 지금은 자신들의 기반을 불안하게 흔드는 ‘보이지 않는 손’, 즉 명확한 실체가 잡히지 않는 자본권력과 대면하고 있다.

 

사회 향한 냉소·체념
능력주의로 이어져

 

서유란(24·여)씨는 “문제의 원인은 사회 구조에 있지만, 어디서부터 바꿔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분노의 화살을 부모에게 돌릴 때도 있다”며 “기업과 학교, 언론에선 긍정적 의식을 강요하면서 문제점을 발견하는 사람들을 되레 패배자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진짜 자유로운 선택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겁니다. 일탈하면 사회에서 큰 불이익을 겪게 되니까요. 솔직히 어디에다 대고 분노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요. 도대체 이 시대에는 화염병을 어디로 던져야 하는 건가요.” 27살 현승인씨가 물었다.

이재훈 박현정 기자 n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