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고장난 세상을 말하다] ③ 계급정치는 ‘강남’에만 존재한다

2012. 2. 22. 16:28discourse & issue

 

 

“새누리 부패 많지만 저희 가족 이해에 부합하는 정당이죠”

등록 : 2012.02.21 20:31 수정 : 2012.02.21 22:09

2030 고장난 세상을 말하다
③ 계급정치는 ‘강남’에만 존재한다
강남선 ‘재산도 대물림, 지지정당도 대물림’

2030 정치의식도 ‘양극화’
강남, 계층이익 지키는 데 한표
구미, 노동자당에 되레 거리감

한국 사회는 빈부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중산층이 줄어드는 사회 양극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을 ‘저소득층’이나 ‘노동자’ 대신 ‘중산층 회사원’이라고 불러주길 바란다. 정당들도 특정 계층을 대변한다고 말하기보다 뭉뚱그려 ‘국민’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2030’이라고 한 묶음으로 불리는 청춘들도 과연 그럴까.

‘2030 고장난 세상을 말하다’ 시리즈 3회에선 부유층이 많은 서울의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2030과 청년 노동자 밀집지역인 경북 구미에 거주하는 2030들을 만나 그들의 삶과 정치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강남의 2030은 새누리당에 그다지 호감을 갖고 있진 않지만, 가족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진다는 생각 때문에 지지한다고 했고, 구미의 2030은 지역의 전통적인 정서에서는 벗어나 있었지만 노동자 정당과는 접점이 없거나 정치에 무관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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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사는 20대 “우리집 왜 종부세 물리나”

 

나중에 돌이켜 보니, 그날의 결과는 곧 닥쳐올 위기의 예고편이었다.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자 고3 소녀의 집안은 빠르게 냉각됐다. 텔레비전에선 방금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제치고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소녀의 부모는 마뜩잖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소녀도 덩달아 얼굴을 찌푸렸다. 2002년 12월19일. 그날의 기억은 이후 10년 동안 겪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임주현(가명·28·여)씨의 뇌리에 또렷이 박혀 있다.


위기감은 머잖아 현실이 됐다. 태어날 때부터 살아온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에는 철거촌 혹은 파업 현장에서나 봄 직한 펼침막이 내걸렸다. 노무현 정부가 부동산 과다 보유자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겠다며 2003년 10월 종합부동산세 도입을 발표한 직후였다. ‘정부는 사람 잡는 종부세를 즉각 폐지하라’, ‘집 한 채 가진 것도 죄가 되는 조세제도!’, ‘살자니 종부세 팔자니 양도세’. 빨간 글씨가 유난했다. 임씨로선 처음 보는 살풍경이었다. 임씨의 부모는 “내지 않아도 될 세금을 왜 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푸념했다. 부모의 위기는 곧 임씨의 위기로 ‘상속’됐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이 30년 가까이 이 집을 소유했으니 투기 목적으로 산 것도 아니죠. 그런데 왜 또 세금을 내야 하나요?”

 

임씨가 살고 있는 40평대 아파트는 실거래가가 20억원 정도다. 개업의사인 아버지와 강남에서 자영업을 하는 어머니의 한해 소득은 7억원쯤 된다. 여기엔 강남에 있는 오피스텔과 상가 임대수입이 포함돼 있다. 임씨도 2002년께 조부모한테서 상속받은 재산으로 서울 은평구에 6층짜리 상가를 구입했다. 하지만 재산세와 건물세, 토지세와 종합소득세 등 때만 되면 날아오는 세금고지서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지난해 무상급식 논란이 한창일 때, 임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당선시킨 서민들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고 느꼈다. 임씨에게 ‘서민’은 남의 이름이다. 무상급식은 내야 할 세금이 더 늘어난다는 말로 들린다. 임씨가 조세정책을 불신하는 까닭은 단지 재산 손실 때문만이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은 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당선됐지만, 임씨는 그가 당선된 뒤에도 서민의 삶이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고도 중간층 이하를 위한 정책을 편다며 세금으로 자신과 부모가 속한 계층을 ‘공격’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냐고 마음속으로 되물었다. 임씨는 그런 ‘거짓부렁’ 조세정책보다 오히려 기부나 봉사활동이 소외계층을 돕는 데 더 효율적이라고 믿고 있다.

 

임씨는 어릴 때부터 다니고 있는 강남의 한 대형교회를 통해 가끔 미혼모 돌봄센터나 노숙자 급식센터에서 봉사 활동을 한다. 국제아동구호기구를 통해 다달이 후원금도 내고 있다. “종합부동산세같은 세금은 어디에 쓰이는지 전혀 알 수가 없죠. 사실상 공무원들의 주머니에 들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임씨는 올해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을 찍을 작정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되고 나서 재건축도 안 되고 한강 르네상스도 멈추는 것을 보고 나니, 새누리당이 다시 집권하는 게 저한테 유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재건축도 돼야 하고, 노무현처럼 상류층을 공격하는 세금 정책도 내놓지 않을테니까요.”

 

재건축·세금 문제 때문에
새누리당의 재집권 바라

 

■ IMF는 나와 상관없는 일 ‘아이엠에프(IMF) 이후 세대’의 꿈틀거림은 강남에 살면서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2030들과는 무관한 얘기다. 이영민(가명·28·남)씨에게 외환위기의 기억은 냉소의 대상이다. 1997년 중1이던 이씨는 당시 한국 사회의 암울함과는 동떨어진 세상에 살았다. 대기업 계열 광고회사 고위 간부이던 아버지의 지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신문과 방송은 “나라를 구하자”며 대대적으로 일어난 ‘금모으기 운동’을 앞다퉈 보도했다. 장롱에 넣어뒀던 예물까지 내놓는 유별난 애국심을 칭송하는 말이 난무했다. 이씨는 사람들이 참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서민들이 금을 내놓을 때 상류층 사람들도 동참했을까요? 안 했습니다. 상류층은 아이엠에프 때에도 안 어려웠으니까요.”

 

‘절망의 20대’라며 언론에 보도되는 취업난도 이씨와는 상관없다. 유학 간 아버지 덕에 6년 동안 미국에서 살며 습득한 영어는 든든한 자산이 됐다. 고3 때는 월 100만원짜리 고액과외도 받았다.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을 무난히 졸업한 이씨는 6개월 전 아버지가 운영하다 은퇴한 광고회사에 취업했다. “취업난이라고 하지만, 사실 주변에 직업이 없어서 밥 굶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사회현상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제게 와닿는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나고 자란 임주현(가명)씨가 지난 4일 오후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상점들을 보며 걷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그는 자신이 ‘사회 상류층’이란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은퇴한 뒤에도 모아둔 돈으로 월 600만원 가량의 투자소득을 올린다. 부모는 강남구 대치동에 ‘만년 재건축 후보’인 은마아파트도 한 채 갖고 있다. 임대소득을 불로소득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이씨는 “진짜 불로소득은 은행 이자 받아먹는 것”이라며 “부동산 정보를 찾아보고, 어떤 부동산이 더 투자가치가 있는지 살피는 것도 다 능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2030들 사이에서 정치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정치적 비판을 아낀다고 말했다. “교회에서 제일 친한 친구는 아버지가 한국에서 두 손가락 안에 꼽히는 피아니스트입니다. 국회의원 아들인 친구도 있죠. 저도 사회 상류층 집안에서 자라왔고, 살다 보니까 먹고살려면 그 논리를 부정할 수 없더군요.”

 

그는 지난 10년 동안 치러진 모든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를 찍었다. “김대중, 노무현의 10년 정치가 서민을 위한 것이었나요? 아니었다고 봅니다. 민주당 세력은 반새누리당 정서에만 기대어 먹고살고 있어요. 새누리당과 이명박은 버스준공영제라도 했죠. 실천능력이 있는 겁니다.”

 

무상급식등 복지확대 경계
가족이익 배치 정책에 반대

 

■ ‘부의 대물림‘은 없다? 김승우(가명·31·남)씨는 송파구 잠실동에 실거래가 20억원 상당의 63평짜리 아파트에 산다. 건설회사 고위간부로 연 3억~4억원 정도의 소득을 올리는 아버지 소유다. 그는 미국 미시건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졸업하고 귀국한 지 2달 만인 2010년 6월 외국계 금융회사에 취직해 연봉 3800만원을 받고 있다. 그는 스스로를 ‘성공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고 했다. 김씨는 요즘도 남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 공부하고, 주말에도 집 근처 독서실에서 8시간 정도 공부한다. 회계사 시험 준비를 위해서다.

 

유학파인 김씨는 영어실력이 출세와 소득까지 결정한다는 ‘잉글리시 디바이드’ 현상을 인정하지만, 그게 모든 것을 설명해주진 않는다고 말했다. “공부를 하려는 사람은 화장실도 마다하지 않지만, 아늑한 독서실에 데려다놔도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꼭 돈을 많이 썼다고 해서 학력과 학벌, 사회적 성공이 대물림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그 맛을 아는 것처럼, 저도 부모님 덕분에 좋은 것들을 경험해본 적이 많으니까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누리고 싶다고 생각하죠. 동기부여가 되는 정도는 있다고 봅니다.”

 

김씨는 노무현 정부 때부터 사회 양극화가 이슈로 떠올랐고, 부자에 대한 존경심이 점점 줄어드는 세태가 만연하게 됐다고 말했다. 민주당 세력이 다시 집권하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반목과 갈등이 커지고, 복지가 확대되면서 파이를 키워야 할 국가의 성장이 정체에 빠질 것이라고 본다. 김씨에게 국가의 발전은 좀 더 노력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부를 돌려주는 시스템의 확대와 동의어다. 그가 지난해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표를 던지고, 이어진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서 나경원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게 투표한 이유다.

 

현정부 경제 실패에 실망
신개념 정치인물 기대도

 

■ 가족의 이익은 나의 이익 튼튼한 경제적 토대는 가족을 똘똘 뭉치게 한다. 이현승(가명·29·남)씨에게 부모 소유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재건축 문제는 곧 자신의 일이다. 이씨의 부모는 따로따로 병원을 개업한 의사 부부다. 소득이 월 4000만원, 연 4억원쯤 된다. 실거래가가 30억원대인 65평 아파트에선 이씨 가족이 살고, 40평대 아파트는 10억원에 전세를 줬다.

 

그는 압구정동이 강남 지역 안에서도 재건축에서 상대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잠실 쪽은 다 재건축이 됐죠. 여기는 재건축이 되면 한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가 되는 거니까, 민감하죠. 10년 이상 재건축이 미뤄지면서 이젠 재건축을 해서 아파트값이 올라도 재건축 투자금보다 밑지는 장사라는 얘기들이 나옵니다.”

 

이씨는 중2때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인디애나주립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2011년 7월 중견급 무역회사에 취업해 연봉 3200만원을 받고 있다. 대기업에도 합격했지만 가지 않았다. 꽉 짜인 조직과 시스템, 능력보다 눈치가 빨라야 인정받는 기업문화가 싫었다고 했다. 5년 정도 뒤에 시작하려는 사업에 대한 꿈도 대기업에 가지 않은 이유의 하나다. 월급을 쪼개어 적금을 조금씩 붓고 있지만, 결국 사업을 하게 되면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할 것 같다고 했다.

 

새누리당은 그런 연유로 이씨에게 필요한 정당이다. 노무현 정부의 종부세는 가족의 이익과 배치되는 대표적인 정책이다. 민주당이 재집권하면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재건축이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부패를 많이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체벌금지에 대해선 저도 ‘매로 사람 다스린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저희 가족의 이해에 부합하는 정당이죠. 가족의 이익은 제게도 이익이 됩니다.”

 

■ “정치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다” 계급적 이해관계와 동떨어진 선택을 하는 사람도 아예 없지는 않다. 이장우(가명·28·남)씨는 서초동의 48평 아파트에서 부모와 함께 전세를 살고 있다. 부모는 모두 대학교수이고, 연소득은 1억원 정도다. 재건축 지역에 아파트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씨는 12년 동안 미국에서 살면서 부모로부터 독립적인 생활이 몸에 뱄다. 서울 소재 대학에 다니면서 학비의 절반은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해 충당했다. 물론 우리말보다 더 편해 할 만큼 능숙한 영어로 고액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씨는 ‘성공한 기업인’이 경제를 발전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찍었다. 하지만 지난 4년 동안의 정치는 너무 구태의연했다고 생각한다. 민주당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정치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래서 정당정치에서 자유로운 정치인을 선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지난해 10월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서 무소속 박원순 후보를 찍었다. “전혀 다른 개념의 정치인이 등장해야겠죠. 지금은 모든 정치인이 보기 싫습니다.”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10명 중 9명은 나꼼수 모를걸요”

등록 : 2012.02.21 21:03 수정 : 2012.02.2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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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고장난 세상을 말하다
③ 계급정치는 ‘강남’에만 존재한다

“구미 사람들은, 통합진보당·진보신당 존재 자체를 잘 모릅니다”

 

그는 열 손가락을 펼쳤다. 하나씩 꼽아가던 손가락은 여섯 개째에서 멈췄다. 지난해 토요일과 일요일을 합친 102일 중 특근한 날이 며칠인지를 꼽아보던 참이다. 그가 쉰 주말은 40일 정도였다.

 

고창민(가명·21·남)씨는 대기업 하청공장에서 일한다. 경북 구미시 공단동에 있는 기숙사에서 공장까지는 5분 거리다. 오전 8시30분까지 출근하면 사출금형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휴대전화와 유에스비(USB) 메모리의 껍데기를 찍어낼 금속주형을 기계로 깎아낸다. 원청 대기업에선 그가 시험사출한 금형을 한 번에 채택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모양을 고쳐달라는 요청이 오면 다시 깎는다. 그렇게 작은 금형을 하나 만드는 데 일주일이 걸린다.

 

그러니 하루종일 기계 앞에 앉게 된다. 인터넷 서핑은 언감생심이다. 다른 세계에 관심을 둘 시간도 없다. 정해진 퇴근시각은 오후 5시30분이지만, 실제로는 오후 8시를 넘기기가 일쑤다. 주문이 밀려 새벽 4시까지 밤새 일한 적도 많다. 시간당 최저임금만 주는 야근수당을 포함해도 연봉은 2100만원이다.

 

김천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공부에는 도통 취미가 없었다. 대학에 가서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할 바엔 공업 고등학교에서 기술을 배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가스충전소에서 일하며 한 달에 120만원을 버는 아버지와 식당에서 월급 80만원을 받는 어머니에게 등록금을 내어달라고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기계와 종일 씨름하며 자신도 기계가 되어 일을 하다가 소금기 젖은 몸을 누이는 게 일상의 대부분인 그의 삶은 무미건조하다. 생각이 많아졌고, 잠이 줄었다. “저도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읽으며 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토론도 해보고 싶습니다. 심리학을 공부해서 사람을 들여다보고 싶거든요. 하지만 곧 포기했습니다. 마음에 담아두면 지금의 생활만 망치게 될테니까요.”

 

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그도 노동조합의 파업에 거부감이 앞섰다. 과격한 시위를 보면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이제는 그들의 마음이 이해된다. 고씨는 무엇보다 일요일만큼은 쉬게 해달라는 말을 사회에 던지고 싶다. 하지만 구미의 대공장들과 달리 직원이 70여명에 불과한 소규모 회사에는 노조가 없다. 노동자를 대변한다고 말하는 통합진보당이나 진보신당같은 정당들과는 아예 접점이 없다. 쉬면서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고,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토대가 없다. “주변에 그런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관심의 끈을 갖기가 쉬울 텐데,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 올해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을 찍을 생각이라고 했다. “남성들이 하는 정치가 이 정도로 폐해가 있었으니, 여성이 하는 정치는 어떨까 싶을 뿐 지역색이나 정당 때문에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


종일 기계앞…인터넷 언감생심
연봉은 수당 포함 2100만원

 

■ “진보정당 노동권 문제 개선할 힘 없다” 구미에는 40만여명이 살고 있다. 그 중 8만여명이 공업단지 노동자다. 구미 인구의 평균 나이는 33.9살이다. 인구의 61.9%가 30대 이하다. 대공장도 있지만, 다수는 대공장에 구속된 하청공장이거나 중소기업이다. 중소기업과 하청공장은 노조 조직률이 낮다.

 

김현수(가명·21·남)씨는 벽지나 휴대전화 키패드에 들어가는 필름을 만드는 장비제조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직원은 50명이 조금 넘는다. 그곳에도 역시 노조가 없다. 오전 8시30분에 출근해서 꼼짝없이 밤 10시까지 일한다. 퇴근하면 거의 잠만 잔다. “일을 계속 하다 보면, 멍한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많아요. 로봇 같죠. 그런데 웃기는 건 ‘내가 로봇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조차 별로 없다는 겁니다.”

 

정치는 김씨에게 남의 얘기다. 정치인들은 늘 국가 경제와 국가의 발전만 얘기한다. 그는 국가 발전과 나는 무관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아직 지지 정당도 없고, 투표할 생각도 없다. “선거해봤자 뭐 하나 싶습니다. 정치를 보면 결국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만 내놓죠. 진보정당은 노동권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힘이 없죠. 스스로 실력을 키워서 노동 환경이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는 게 제일 나은 방법입니다.”

 

“10명을 붙잡고 물어보세요
9명은 나꼼수 뭔지 모를걸요”

 

■ 육체 노동자, 정치 생각할 여유가 없다 굳건한 안보를 위해 강력한 국가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을 지지한다는 서한승(가명·27)씨도 노동 문제에 있어서는 새누리당과 견해를 달리했다. 그는 직원이 200명 규모인 자동차 헤드램프 금형 제조업체에서 최연소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집착하다시피 일에 매달린 결과다. 한 달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한 적도 많다. 누가 시키지 않은 일이지만,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쯤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이익보다 조직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신을 스스로 보수적이라고 말했지만, 서씨는 파업을 무조건 ‘노조 이기주의’로 몰아붙이는 시선만큼은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파업이 일어나는 건 회사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죠. 현대자동차같은 대기업에선 가끔 노조 이기주의가 있지만, 중소기업에선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회사가 노동자를 존중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산직으로 육체노동을 하다 보면, 정치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고 했다. “서울에선 <나는 꼼수다>가 엄청난 인기라고 하더군요. 구미에서 10명을 붙잡고 물어보세요. 장담하지만, 적어도 9명은 ‘나꼼수’가 뭔지도 모를 겁니다.”

 

■ 노동자 정치로 이어지지 않는 정치적 각성 김지연(가명·32·여)씨는 자신을 ‘특이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정치 얘기가 좀체 나오지 않는 세계에 살면서, 정치적 관심을 가진 몇 안 되는 육체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중견 제조업체의 공장에서 13년째 일하고 있다. 여성이 다수인 공장에서 주로 나누는 얘기는 연예인이나 범죄 소식이다.

 

특이해진 건 3년 정도 됐다. 2009년 5월23일 아침, 무심코 텔레비전을 보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자막을 봤다. 순간 멍해졌다. 인터넷을 뒤졌고,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카페에 가입했다. 지난해 한-미 에프티에이(FTA) 비준안 날치기로 그의 분노는 배가 됐다. 한-미 에프티에이가 시행되면 국가는 더 발전할지 몰라도, 부자들만 이익을 보고 노동자들은 살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김씨는 말했다.

 

그가 지지하는 정당은 민주당이다. 김씨는 노무현과 민주당 정부가 문제의 한·미 에프티에이를 시작했고, 그 정부가 노동자를 가장 많이 구속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통합진보당이나 진보신당을 지지할 생각도 있었지만, 구미 사람들은 그 당의 존재 자체를 잘 모릅니다. 제가 생각해도 갑갑하죠. 노무현 정부에서 한-미 에프티에이를 추진했지만, 정동영 민주당 의원이 잘못을 반성했으니까 일단 지켜봐야죠.”

 

김씨는 올해 대선에서 안철수 교수를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반새누리당’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노동자를 극심하게 탄압했다는 사실을 지난해에 알게 됐죠. 하지만 그건 노 전 대통령이 힘이 없어서 기득권 세력에게 휘둘린 것이라고 봐요.”

 

로봇같죠…그런데 그런 생각할
여유조차 별로 없다는 겁니다

 

■ “진보정당도 똑같이 구태의연” 같은 구미에 있다 해도, 대기업 사무직 노동자는 그나마 여건이 낫다. 조성수(가명·21·남)씨 역시 공고를 졸업했지만,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대기업에서 품질관리를 담당하는 사무직 일을 하고 있다. 야근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다. 또래 생산직 노동자보다 여유 시간이 많다. 인터넷으로 정치 관련 뉴스도 찾아 보고, 책도 자주 읽는다.

 

그 역시 한-미 에프티에이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심화시키는 ‘나쁜 조약’이라고 알고 있다. 자신도 대기업에 다니고 있지만, 한-미 에프티에이는 대기업에만 이익이 돌아가고, 다수의 중소기업 하청공장 노동자들은 삶의 질이 나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한-미 에프티에이 날치기 전횡을 저질러도, 민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할 뿐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 그러나 선거를 하면 어쩔 수 없이 민주당과 안철수 교수를 찍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국회의원 평생 연금법 통과에 민주노동당이 찬성한 것을 보고, 이젠 진보정당까지 불신하게 됐죠. 그래도 일단 새누리당을 끌어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미/이재훈 기자 n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