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채경제의 저주 ② 서브프라임서 스페인까지
‘빚에 기댄 삶’, 부채경제의 전형은 미국이다. 그 곪은 상처가 터진 게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였다. 2000년대 초부터 이어져 온 부동산 등 자산 시장 활황으로 미국인들에게 주택담보대출은 현금인출기와 다를 바 없었다. 소득은 제자리였지만 미래의 수익을 담보로 소비를 늘렸다. 일자리 불안과 축소되는 복지에 노후 자금은 저축이 아닌 부동산 투자로 대신했다.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유럽대륙으로 옮겨붙은 위기의 양상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일랜드, 포르투갈에 이어 그리스, 스페인까지 가계부채 증가→부동산 거품붕괴→금융권 부실→국가부채 증가→국가부도 위기라는 전철을 되밟았다. 스페인은 부동산 거품이 있던 1997년부터 10년동안 가계부채가 5배 가량 늘면서 집값이 무려 3배 넘게 치솟다가 거품이 꺼진 2008년부터 3년새 22% 급락했다. 같은 기간 미국의 가계부채는 2.7배 증가하면서 집값은 갑절로 뛰었고, 금융위기 뒤 다시 25% 급락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는 가계부문의 과다부채, 최근 남유럽국가의 재정위기는 정부부문의 부채가 크게 늘어난 게 주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정부는 물론 가계 부문에서도 빚이 급증한 이유는 뭘까?
장보형 하나금융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실물부분에서 신흥시장과의 경쟁으로 성장동력이 고갈되자 새로운 수익성 수단으로 찾은게 부동산 같은 자산이었다”며 “과거엔 빚을 내 소비에 썼다면 지금은 부동산과 주식 투자로 금융시장을 부양해 거기서 숨통을 터서 경기를 부양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진국들이 제조업 기반의 성장에서 한계에 부딪히자 이를 돌파하기 위해 금융산업을 새로운 수익의 원천으로 삼으면서 빚어진 것이라는 분석이다.
여기에 금융규제를 완화하자 은행들은 개인을 상대로 대출 경쟁을 벌였다. 대출의 물꼬가 개인 쪽으로 터지면서 전통적으로 자금공급 역할을 했던 가계가 거꾸로 빚을 얻는 주체로 전락한 것이다. 기업위기는 가계위기, 재정위기로까지 이전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의 총부채(가계·기업·정부)는1980년대까지 국내총생산(GDP) 대비 162% 수준에 머물렀지만, 2010년엔 314%까지 늘었다. 특히 가계 부채 규모는 같은 기간 37%에서 93%로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다.
정부가 금융기관 부실 떠안고
실물경제 붕괴 막으려 경기부양
재정적자 악화 ‘한계상황’ 치달아
자본주의 시스템 손질 불가피
부채 경제는 복지축소와 양극화로 인한 국민들의 저항을 줄이기 위한 체제유지적 타협의 산물이기도 했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미국은 1990년 이후 복지를 줄이고 임금 수준을 동결하는 대신 신용을 통해 개인들에게 많은 대출이 가능하도록 했다”며 “공공 영역이 책임져 왔던 주택과 교육비를 개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대출을 통해 감당하게 한 셈”이라고 말했다. 부족한 일자리와 줄어드는 소득을 개인이 지탱하는 구조로 전환된 것이다. 이 과정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경기침체와 실업률 상승을 막기 위해 저금리 통화정책까지 맞물리면서 부채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러다 금융시스템이 붕괴 위기로 내몰리자 은행 등 금융기관의 대출을 정부가 떠안고, 한편으로 실물경제 붕괴를 막기 위한 경기부양에 들어가는 재정까지 확대되면서 공공적자를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시켰다. 한국에서 1998년 외환위기 뒤 부동산 값이 빠르게 회복되고, 실질소득 증가가 정체된 가운데 사회부담금·교육·통신비 등의 지출이 늘면서 가계대출이 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부채경제 시대에서 대단히 심각한 문제는 그간 등장한 ‘위기해법’ 자체가 또 다른 위기의 싹을 계속 키웠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부채 축소 조정(디레버리징)보다는 오히려 유동성을 풀어 거품 붕괴를 막는 대증 처방만 난무했다. 뿐만 아니라 이젠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의 ‘처방’이 유효하지 않게 됐다. 구제금융 신청으로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일시적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공재정도 능력의 한계치에 도달하면서 정부 역시 ‘구원투수’ 역할을 맡기 힘들어진 상황이다.
앞으로 부채축소와 긴축은 불가피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계층이 더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문제를 두고 힘겨루기가 이어질 전망이다. 이미 그리스와 스페인은 긴축으로 인한 고통이 계속되면서 국민의 저항에 직면해 있다.
미국은 1929년 대공황 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금융규제, 예금자 보험, 사회보장 강화, 노동권 강화 등과 같은 갖가지 처방을 동원했다. 대공황에 자주 비견되곤 하는 이번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각국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손질하는 다양한 방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몰리고 있다. 이병천 교수는 위기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사회갈등을 조정할 새로운 합의점을 찾게 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교수는 “어떤 계층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할지를 두고 다툼이 일고 있다”며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에서 1대 99의 대결구도가 부각됐지만 아직까진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아, 향후 진행과정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명 류이근 기자 mis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