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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베냐민(1892~1940). 사진 도서출판 길 제공 |
‘2013 베냐민 커넥션’ 심포지엄
문학·사회학·철학 경계 넘나들며이론보다 실제 삶속 에너지 집중
베냐민의 학문적 유산 집중 조명 그의 핵심사상 ‘인간학적 유물론’
이글턴·지제크·아감벤에 영향 줘
“인문학적 상상력에 영감 준 인물”
‘사랑’ ‘희생’ ‘헌신’…. 언뜻 볼 때 ‘합리적이지 못해 보이는’ 이런 말들이 21세기 들어 급진적 정치철학의 흐름을 수놓고 있다. 테리 이글턴, 슬라보이 지제크, 조르조 아감벤 등이 이런 흐름을 주도한 이론가들인데, 한결같이 이전 시대의 문예사상가 발터 베냐민(1892~1940·사진)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1920~3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유대계 지식인이었던 베냐민은 문학이론·미학·철학·신학·사회학 같은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전방위적인 지적 활동을 펼쳤으며, 생전에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던 그의 학문적 유산들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주목받고 있다.
그동안 ‘발터 베냐민 선집’을 펴내왔던 도서출판 길은 창사 10돌을 맞아 9~10일 서울 북촌의 정독도서관에서 ‘2013 베냐민 커넥션-쓰여지지 않은 것을 읽다’란 제목으로 심포지엄을 연다. 선집 번역자들이 중심이 돼 지난 1년 동안 준비한 학술행사다. 기획을 주도한 최성만 이화여대 독문학과 교수는 “그의 생각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해답’이 아니라 ‘자극’을 준다”며 베냐민 사상의 ‘현재성’을 강조했다.
제목에 ‘커넥션’이란 말을 붙인 것은 베냐민의 현재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베냐민은 생전에 게르숌 숄렘, 테오도어 아도르노, 에른스트 블로흐, 베르톨트 브레히트 같은 다양한 사상가·작가·학자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교류했다. 분과학문의 경계를 부수고 문학·영화이론, 미학,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철학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문학·대중문화·정치철학을 가리지 않고 그가 다시 주목받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베냐민 커넥션’”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국문학계에서 시도한 실증적 분석에서도 베냐민은 2000년대 국내 국문학자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국외 사상가로 나타난 바 있다.
“베냐민은 이론의 정합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에너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친 선각자입니다.”
최 교수의 말처럼, 베냐민 사상은 풍부한 모티프와 주제들을 포괄하고 있어 다양한 방향에서 풀이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최근 정치와 신학을 잇는 ‘베냐민 커넥션’의 핵심으로 학계에서 주목하는 것이 ‘인간학적 유물론’이라고 한다. 베냐민은 ‘지금 억압받고 있는 자’들에게 메시아적인 구원의 힘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론이나 인식이 아닌 실제 삶 속에서 주체를 각성시키기 위한 정치적 에너지를 탐사했다. 이미지·신체·테크놀로지 같은 요소에 몰두했고, 연속성·유기성을 파괴하는 ‘이미지적’ 사유와 글쓰기를 펼치거나 진보 개념을 거부하고 중단·정지의 정치학을 말한 것 등이 이런 맥락 위에 있다. 이런 베냐민의 인간학적 유물론은 오늘날 알랭 바디우의 ‘사건의 철학’이나 지제크의 ‘유물론적 신학과 신학적 유물론’, 아감벤의 ‘비상사태’(예외상태)와 ‘메시아적 시간’과 같은 현대 정치철학의 젖줄이 됐다는 평가다.
또한 베냐민은 ‘대중의 역사’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성도 제기했다. 그동안의 사회과학 이론들은 주로 대중이 ‘덩어리’로 뭉쳐야 한다는 주장을 폈지만, 베냐민은 개인들이 느슨하게 결합해 움직일 때 그 혁명적 힘이 드러날 수 있다고 통찰했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베냐민의 사유와 글쓰기는 분과학문의 영역을 깨는 ‘모든 학문의 비판점’으로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북돋는 데 큰 영감을 준다”고 설명했다.
이번 학술행사는 여느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주관하는 행사와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선집을 펴내며 사상가에 대한 지식 유통에 힘써온 인문학 출판사가 기획했기 때문이다. 앞서 그린비 출판사는 2011, 2012년에 알튀세르와 푸코에 대한 책 출간에 맞춰 두 석학에 대한 대중 학술행사를 연 바 있다. “그린비에서 펼쳤던 학술행사를 모델로 삼았다”는 길 출판사 이승우 기획실장의 말대로, 이번 심포지엄은 이런 기획이 확산되는 사례로도 볼 수 있는 셈이다.
9일 행사에서는 ‘기억, 이미지, 인간’이라는 주제로 윤미애 세종대 초빙교수, 김남시 이화여대 조형학부 교수 등이 ‘지멜과 베냐민이 본 실내’ ‘베냐민에게서 기억과 유년시절’ 등을 발표한다. 10일에는 ‘번역, 정치, 정의’를 주제로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진태원 고려대 인문한국(HK)연구교수 등이 베냐민의 신체화된 미메시스의 미학, 시간론 등에 대해 발표한다. 최성만 교수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실질적인 내용을 추구하는 자리다. 독자들과의 소통을 통해 발표자들도 많이 배울 것”이라고 기대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