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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년, 근대의 탄생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이혜원 옮김
까치·2만원
고문헌 수집여행 떠난 로마 학자1000여년 묻혀있던 필사본 발견
유물론·쾌락의 근대정신 잠깨워
<1417년, 근대의 탄생>은 윌리엄 셰익스피어 문학 연구의 대가이자 신역사주의 문학비평의 주창자로 불리는 미국의 문화이론가 스티븐 그린블랫(70·하버드대 인문학부 교수)이 2011년에 발표한 책이다. 그해 전미국도서상(논픽션 부문)을, 이듬해 퓰리처상(논픽션 부문)을 받은 저작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 르네상스 연구자들 사이에서 시작된 신역사주의 비평 운동은 유물론과 미셸 푸코의 사상에 젖줄을 대고 있다. 이들의 관심사는 한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과 권력구조가 어떻게 당대의 급진적 움직임을 괴멸시켰는지, 그 지배 권력과 사상이 어떻게 사람들의 정치적 선택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드러내는 데 있었다.
신역사주의는 ‘문화 시학’으로도 불리는데, <1417년, 근대의 탄생>은 한 편의 시를 찾아가는 여정의 기록임과 동시에, 그 시가 품고 있는 세계관이 어떻게 1000년 넘는 시간 속에 망각을 강요당하다가 다시 건져 올려지고, 그리하여 어떻게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물결을 이뤄나가는지를, 역사 속 먼지 덮인 사료 텍스트의 문맥과 행간을 뒤지면서, 그 한 국면을 실감나는 서사를 통해 직조하고 있다.
1417년 1월, 이탈리아 로마의 책사냥꾼 포조(그림·포조 브라촐리니)가 고대 문헌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간난신고 끝에 독일 남부 한 수도원의 서가에서 옛 필사본 한 권을 발견한다. 중세의 먼지 속에서 튀어나온 책은 바로,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의 시인 겸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쓴 철학적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였다. 1000년 이상 망각 속에 묻혀 있던 책이 다시 세상의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여신이여, 당신의 강한 창에 심장을 관통당한 새들이 당신이 오심을 알립니다.” 사랑과 미의 여신 베누스(비너스)에 대한 찬가로 시작하는 이 책의 발견이 지금부터 600여년 전 르네상스의 새벽을 열어젖혔다고 지은이는 쓴다. 포조는 동료 필사가 니콜리에게 그 책을 필사시켰고, 그 책은 중세 기독교 체제의 감시와 처벌, 단죄 속에서도 점점 퍼져나갔다.
그림 까치 제공 |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원자론이다. 우주가 무한 진공 속에 존재하는 원자의 충돌로 형성되었다는 게 그 시의 핵심 내용이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사상적 계승자인 루크레티우스는 우주는 무수한 원자들로 구성됐다고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 우주는 나 자신도 그 일부인, 나를 구성하는 것과 꼭 같은 원소들로 이뤄진 물질계이다. 여기에는 조물주도, 지적인 설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한 것은 오직 원자뿐이다.
지은이 그린블랫은 그 시의 핵심에는 만물을 바라보는 근대적 관점의 기본 원칙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고 했다. 그는 우리 인간은 한때 우주에 머무는 것이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도 덧없는 것임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린블랫은 미와 쾌락의 향유에 관한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을 가장 잘 체현하고 그것을 인간이 탐구할 목표로까지 밀고 나간 문화가 르네상스라고 말한다.
그린블랫은 말한다. 근대적 사유란 무엇인가. 고대의 재발견이다. 재발견한 고대 정신의 핵심은 무엇인가. 유물론이다. 쾌락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은 예술 분야를 넘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과학기술 연구,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천문학, 프랜시스 베이컨의 철학, 리처드 후커의 신학이론에도 스며들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그림 <봄>,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정치학, 로버트 버턴의 정신질환에 대한 책마저도 루크레티우스가 말한 쾌락을 극대화하는 형식으로 작성되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조르다노 브루노, 토머스 홉스와 스피노자의 지적인 대담성도 이런 변화 속에서 형성되었고, “나는 에피쿠로스주의자입니다”고 했던 미국의 혁명가 토머스 제퍼슨도 그렇다.
중세 책사냥꾼 포조의 행적을 파노라마 무비처럼 숨가쁘게 쫓는 형식을 취하는 이 책은 고대 철학자 루크레티우스의 ‘근대적’ 사유와 정신이 중세의 터널에서 질식당하는가 했더니 다시 살아나 부흥(르네상스)하는 궤적을 탐구한 사상서라고도 볼 수 있다.
지은이는 이 책을 일러 “세계가 어떻게 새로운 방향으로 일탈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거니와, ‘일탈: 근대는 어떻게 시작됐나’라는 원제목에서 보듯 이 책은 문화의 일탈, 사상의 일탈, 역사의 일탈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일탈(swerve)은 그 어떤 것도 자연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고 믿었던 루크레티우스가 말한 ‘미끄러짐, 비켜나감’(라틴어로 ‘클리나멘’)이란 용어를 차용한 것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빚어낸 철학 전통은 국가나 신에 대한 숭배와는 병립하기 어려웠다.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이들 문헌은 가차없이 공격을 받고 불살라졌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살아남아 끝내 ‘부활’한 것도 그가 말한 “뜻밖 방향으로 예측 불가능하게 전개되는 사물의 움직임”, 곧 미끄러짐이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