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마니타스 제공 |
19세기 노예제 폐지론자들에
자유주의자들 “과열된 환상” 비판
중세 ‘천년왕국운동’도 매도됐지만
나중에 “혁명적 리얼리즘” 평가
역사발전 요소인 ‘광적 믿음’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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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토스카노 지음, 문강형준 옮김
후마니타스·2만2000원광신(狂信), ‘미친 믿음’이라는 낙인은 인류 역사에서 소수를 제압하는 가장 흔한 방법이었다.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혹은 종교의 체계를 수호하기 위해 광신자들은 마땅히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되었다. <광신>은 광신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과 “온건함과 사회적 평안을 가장 중요한 정치 행정의 원리로 간주”하며 광신자들을 배척하고 탄압했던 멀쩡한(?) 사람들의 행태와 자취를 더듬는 책이다. ‘어느 저주받은 개념의 계보학’이라는 부제답게 인류 역사에서 광신으로 치부되었던, 이제는 주장과 개념마저 흐릿해진 광신의 역사를 재현한다.
차세대 좌파 이론가로 주목받는 알베르토 토스카노가 ‘어느 저주받은 개념의 계보학’에 주목하는 이유는 “반대와 저항을 악마화하고 문화화하거나 중성화하기 위한 광신 개념의 지배적 활용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는 급진적·비타협적 평등을 개념화하는 정치적 사유에 의해 우리의 정치적 상상이 중층 결정되는 방식에 대해 더 철저히 고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광신이 가진 “저항적 평등”과 “타협을 거부하는 결연한 의지”를 단지 지배적 생각으로만 수렴하면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없다. 번역을 맡은 문화평론가 문강형준은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재의 질서를 거스르려는, 지금의 시간을 단절하려는 정치적 기획이 모조리 ‘광신’으로 취급되어 저주받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미래를 ‘사유’할 수 있을까?”
광신의 역사에서 지은이가 처음 맞닥뜨린 주제는 ‘자유주의’다. 제국의 시대였던 19세기 후반 자유주의자들은 노예제 폐지론자들을 “인지 능력의 결함”이 있고 “과열된 환상의 자극을 잘못 받아들인 광신자”로 매도했다. 노예제 폐지론 진영의 강경파인 ‘즉각주의자들’(immediatists)이 주장한 “무조건 해방과 총체적 평등”을 “분열과 소란의 주범”으로 낙인찍었다. 한편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로 명명한 지은이는 “공산주의와 광신을 연결하는 내전 시기의 문법”과 함께 “만연되어 있는 마취제와도 같은 자유주의-자본주의”에 일침을 가한다.
자유주의에 이어 지은이가 주목한 것은 중세 후기 ‘천년왕국운동’이다. 천년왕국운동은 “정치를 제도적 매개와 숙의의 층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면서 거부”할 뿐 아니라 “정치 질서의 옹호자들을 악독한 적들(적그리스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때문에 현재의 사회적, 경제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묵시록이라는 미래의 시간을 선택했다. 영국의 사회학자 에릭 홉스봄은 천년왕국운동을 “혁명적 리얼리즘의 고귀한 선구자”라고 주장했지만, 당대의 권력자들은 시대착오적이라는 한마디 말로 제압했다. 지은이는 천년왕국운동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현존하는 사악한 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 그리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정적 동경에 의해 추동되는 한, 적응에 실패하는 것이야말로 운동의 존재이유인 것처럼 보인다.” 비록 실패했지만 혁명으로서의 가치는 선연하다는 것이다.
<광신>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3장 ‘이성과 함께 널뛰기’다. 광신에 대해 가장 이성적으로 대처할 것만 같은 이성, 즉 계몽주의는 오히려 ‘광신’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다. 계몽주의는 우리 문명을 규정하는 문화적 유산과 가치를 오롯이 형성한 주역이지만, ‘근본주의’만큼은 광신으로 규정하면서 무조건 거부했다. 흔히 우리가 위대한 철학자라 부르는 볼테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광신을 일러 “천연두처럼 감염되는 정신병”이라고 할 정도로 사회적 질서와 안정을 추구한, 요즘 말로 하면 보수적 철학자였던 셈이다. 반면 루소는 “광신의 감정적 토대를 놓치는 이는 그 누구라도 광신의 잠재력과 반이성적 저항을 과소평가할 수밖에 없다”며 광신을 옹호했다. <사회계약론>의 저자답게 루소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혁명적 동인이 광신에서 일부 도출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한편 지은이는 최근 이슬람교가 광신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이유를 집단적 무의식과 “적당히 병리적인 근대적 주체”로 설명하는데, 여기에는 헤겔의 공이 크다고 주장한다. ‘관념적 유일자를 절대적 헌신의 대상으로 삼는 극단적 보편성의 종교’인 이슬람교는 광신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광신은 ‘사실상’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 제도와 규범을 혼란시킨다는 오래된 믿음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광신>은 광신이 없었던들 우리 사회가, 아니 인류 역사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을까 다시 생각하게 한다. “반광신이라는 시대정신 속에서 사라지는 더 중요한 것은 ‘급진적이고 보편적이며 근본적인 정치적 기획’의 가능성 자체”라는 옮긴이의 말마따나 오늘 인류의 모습은 ‘광신’ 때문에 가능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장동석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