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4년 12월 영국 랭커셔주의 작은 마을 로치데일에서 주민 28명이 1년 동안 겨우겨우 모은 28파운드의 출자금으로 만든 허름한 매장. 근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협동조합의 시작이었다. 사람들 왕래가 거의 없는 모퉁이의 허름한 창고에서 몇 안 되는 종류의 물품을 진열하고 판매했다. 이처럼 시작은 미약했지만 정확한 물량과 품질,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에게 공정한 거래, 열심히 이용한 만큼의 배당 등 주민들이 바라온 사업방식을 통해 점차 인기를 얻으며 협동조합은 확대되었다.
170여년이 지난 지금 협동조합의 모습은 어떨까? 우선 양적 확대가 눈에 띈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의 ‘2015년 협동조합 경제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76개국의 2829개 협동조합을 조사한 결과 총 매출액은 2조9500억달러로 세계 5위 경제대국인 영국의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규모로 나타났다. 국제사회에서 위상도 높아졌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겪으며, 유엔(UN)은 협동조합을 경제위기에 강한 새로운 경제·사회 발전의 대안 모델로 보았다. 2009년 136호 결의안에서 2012년을 ‘세계 협동조합의 해’로 선포했다. 같은 시기 세계 각국에서는 협동조합을 포함한 사회적 경제 조직을 새로운 대안적 경제모델로 보고 관련 법과 제도를 정비했다.
사회적 경제는 시장을 통한 사적이익보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행복을 더 중시하는 경제이다. 스페인(2011), 멕시코(2012), 포르투갈(2013), 캐나다 퀘벡주(2013), 프랑스(2013) 등에서는 빈부격차 해소, 복지기반의 강화를 위한 유효한 수단으로 사회적 경제 법들을 제정했다.
협동조합을 비롯한 전세계 사회적 경제 조직들은 올해부터 새로운 비전으로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유엔이 발표한 ‘지속가능발전 목표’(SDGs: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가 바로 그것이다.
유엔의 1987년 ‘브룬틀란 보고서’에 따르면, 지속가능발전이란 “미래 세대가 그들의 필요를 충족할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하는 발전”이다. 유엔 회원국 정상들은 2015년 9월 총회에서 2030년까지 추진할 의제로서 17개의 지속가능한 발전 방안을 승인했다. 국제협동조합연맹에서는 협동조합이야말로 이러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동력이라고 얘기한다. 그래서 올해로 94회째인 ‘2016년 세계 협동조합의 날’(올해는 7월2일)에 내건 슬로건 역시 ‘협동조합: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행동하는 힘’이다. 협동조합은 경제성장이나 소득의 증가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출발부터 참가하는 사람들의 필요에 초점을 맞춰 조합을 운영하고, 성과가 나면 고르게 배분해왔다. 그래서 협동조합의 발전은 사회적 자산의 증가로 이어진다. 국제노동기구(ILO)가 2014년에 발간한 ‘협동조합과 지속가능발전’이라는 보고서에는 이러한 실천사례들이 잘 담겨 있다. 특히 저개발국가나 개발도상국에서는 농업분야 협동조합들이 빈곤 탈출의 돌파구를 열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400만 농민이 농업협동조합을 통한 생산·판매의 연대로 농업 발전을 이끌고 있으며, 에티오피아에서도 농업부문 종사자 90만명의 대부분이 협동조합을 통해 수입을 올리고 있다. 협동조합들은 환경친화적이다. 미래 세대의 생존 여건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독일 라이파이젠협동조합연대에 따르면, 2011년에 에너지 부문에 만들어진 신규 협동조합 250개 가운데 158개가 신재생에너지를 이용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서울 청계천 광장에서 열린 ‘사회적 경제 기념주간’ 행사장에 설치된 ‘사무실에서 만나는 사회적 경제’ 코너의 모습. 화분·커피·간식·브로슈어·영상 등 사무실의 많은 용품과 서비스를 사회적 경제를 통해 구입할 수 있다. 2016 서울 사회적 경제 기념주간 조직위원회 제공
우리나라에선 사회 통합과 복지 확대의 발판으로 협동조합이 떠오른다. 기획재정부 주관으로 지난 2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제4회 협동조합의 날 기념식에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협동조합은 스스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들고 취약계층에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지역사회의 발전과 통합에 기여해왔다”고 평가했다. 협동조합기본법이 2012년부터 시행된 뒤 우리나라는 이제 협동조합 1만개 시대를 맞고 있다. 그동안의 성과와 앞으로의 과제를 살펴보는 자리가 최근 여러 곳에서 마련되었다. 지난달 8일부터 10일까지 서울시청에서 열린 ‘지속가능발전 목표를 위한 도시정책 공유 국제포럼’에서는 아이쿱생협의 구례 자연드림파크가 주요 성공사례로 소개되었다. 성장은 정체되고 인구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농촌 지역에 협동조합의 대규모 복합생산기지가 들어서 활력을 되찾고 인구도 증가세로 돌아섰다. 지난해에는 외부에서 다녀간 유동인구 수가 약 11만명에 이르렀다. 자연드림파크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80% 이상이 구례 군민이다. 자연드림파크는 친환경 식품 생산설비뿐 아니라 소극장, 공연장 등 문화생활 공간도 운영하며 청년들이 돌아올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지속가능한 삶의 공동체는 지속가능한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자연드림파크가 바로 그런 곳을 꿈꾼다.
구례, 협동조합 생겨 다시 인구 늘어
청년들 농촌 돌아올 계기도 만들어
서울, 사회적경제로 주민 행복 증가
투입 대비 사회적 성과 12.9배 이상 조합의 날 맞아 새 슬로건으로 무장
더불어 행복한 공동체 힘찬 움직임
생존율 낮은 등 현실에선 난관도 많아
“자생적 성장 노력·정부 지원 필요”지난달 30일에는 서울시도 ‘사회적 경제 성과 측정과 정책 평가 연구결과 공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태환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서울시 자치구별 사회적 경제에 참여하는 기업 수와 주민 행복도의 상관관계를 실증분석한 결과를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김 교수는 “각 자치구에서 공통적으로 사회적 경제 관련 기업의 증가가 주민의 행복도 증가와 비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며 “인구 40만에 해당하는 구를 기준으로 삼으면 사회적 경제 기업 10개가 늘어남에 따라 주민 행복도가 높아지는 화폐적 가치를 따지면 약 936억원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조달호 서울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서울시 소재 사회적 기업 101곳을 대상으로 투입 예산 대비 사회적 가치 창출 규모를 분석해 발표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가치란, 사회적 기업이 수행하는 여러 사회서비스의 부가가치 총합에다 취약계층에 제공하는 일자리의 경제적 가치를 더한 개념이다. 조 연구위원은 서울시가 사회적 기업에 투입한 예산에 사회적 가치는 평균 12.9배나 창출된다고 추정했다.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조직이 대안적 경제모델로서 자리잡으려면 넘어야 할 산들이 아직 많다. 지난해 정부의 협동조합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등록된 협동조합 가운데 실제 사업을 운영 중인 곳은 55%에 머물고 있다. 운영을 하다 문을 닫거나 아예 출발부터 간판만 내건 조합들이 절반 가까에 이른다는 것이다. 신설 법인 중 협동조합이 차지하는 비율 역시 2013년 4.3%, 2014년 3.3%, 2015년 2.7%로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협동조합이 지속가능한 발전의 견인차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협동조합 자체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기획재정부는 내년부터 2019년까지 시행할 제2차 협동조합 기본계획을 마련 중이다. 이 계획의 방향과 세부 추진과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기재부는 최근 관련 전문가들과 세미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최슬기 한국개발연구원(KDI) 정책대학원 교수는 “협동조합이 조합원 간 자율과 상생을 강조하는 조직운영 원칙하에 운영되는 기업의 한 형태이기에 조합원 교육 활성화를 통한 자생적 성장기반 방안이 연구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신나는 조합’ 이성수 상임이사는 협동조합의 전문경영인 부족 문제를 지적하며 “협동조합 경영의 경험과 노하우가 현장에 축적되어야 한다. 정부는 이러한 축적의 과정을 돕고 촉진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수원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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