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4. 10. 01:27ㆍ조선근대
설민석의 설화(舌禍)로 한바탕 논란이 벌어졌다. 역사는 그만큼 중요한 가치로 사회에 머물러 있다. 더욱 진실에 다가가려는 치열한 학문적 노력과 당대 사람들의 마음을 알려는 ‘공감적 해석’의 관점이 없다면, 역사는 자신의 이념이나 가치관에 의해 굴절되고 왜곡되고 잘려져 버린 그야말로 조각나버려 도대체 실체를 알 수 없는 ‘넝마’가 되어 버릴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낮술을 먹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양념’ 이야기가 사실을 왜곡시키는 것은 어쩌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설민석도 이런 함정에 빠져서 그것이 사실이라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왜곡된 역사를 대중에게 설파했을 것이다. 그가 3‧1운동 당시 그 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백성과 학생들의 거룩한 운동이 가려져버렸다는 생각에 집어넣은 ‘양념’은 오히려 그가 그리도 사랑하는 대중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들려주는 아이러니로 귀결되었다.
당시 3‧1운동을 회고한 이방자 여사의 술회는 당대의 상황을 조금은 더 정확하게 우리에게 전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고종황제의 국장은 3월 3일로 정해졌다. 그러나 고종황제의 죽음이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이것을 발화점으로 민중의 반일감정이 폭발됐다. 장례 2일 전인 3월 1일 전 조선이 봉기한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3·1운동이다. 당시 서울에는 인산을 구경하려고 방방곡곡에서 유림들이 모여들어 백립白笠을 쓴 가람들이 가득했고 (국상 때는 흔히 갓을 썼다) 남녀 학생들이 울부짖는 “대한독립 만세” 소리와 고종황제의 승하를 조상弔喪하는 울음소리가 어우러져 장안이 떠나가는 듯했다. 거리의 이곳저곳에서 맨주먹으로 만세만 부르는 학생들을 일본헌병이 치고 때리고 잡아갔지만 만세운동은 더욱 번지기만 했다. 3.1운동의 소식은 일본궁중에도 알려져 굉장한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방자 여사 회고록 - 歲月이여 王朝여(7)〉, ‘高宗 승하’. 《경향신문》 연재 (1984년 5월 15일). 황태연,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미발간초고에서 재인용.
1919년 3월 1일 현장은 조국의 독립에 대한 갈망과 고종의 죽음에 대한 분노가 어우러진 백성들의 거룩한 항쟁이었다. 이 시위는 1909년 “오로지 독립이라야 나라이고, 오로지 자유라야 백성이니”라며 나라의 독립과 백성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고종에 대한 일제의 독살에 분노한 백성들의 항거이며, 자유로운 백성이 되기 위해 백성들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여 분연히 일어난 운동이었다.
3‧1운동은 천도교 손병희를 중심으로 하는 300만 천도교인들의 전국적 조직에 힘입었다.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는 이 운동의 핵심인물이 손병희였다고 밝히고 있으며, 시위는 전적으로 전문학교 학생들이 맡고, 선언문 배포는 중등학교 학생들이 담당하는 역할을 분담하고, 3월 5일 반혼제(고종황제를 장사 지낸 뒤 신주를 궁궐로 모셔오는 의식) 때 다시 대규모 시위를 열 계획이었다고 한다. 특히 이 시위대의 경로가 미국 영사관과 프랑스 영사관 앞으로 반드시 거치도록 한 것이 “파리강화회의를 주도할 나라들의 외교공관 앞에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전하려 했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 그만큼 치밀히 준비하고 그 목표는 명확하게 비폭력 정치투쟁을 통한 조국의 독립, 즉 광복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은 3월 1일 이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일제의 고문으로 목숨을 잃거나 광복의 그날까지 일제에 맞서 싸웠다.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손병희는 1년 8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출옥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년 반 만에 죽었고, 양한묵은 고문으로 재판 중 사망했다. 33인 중 변절자는 최린, 정춘수, 박희도 3인 뿐이었다. 나머지 30인은 목숨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빼앗긴 들에 봄이 오도록 ‘분투’했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민석의 주장대로 장구한 역사의 거대한 흐름은 백성들의 삶의 궤적이다. 그들을 역사의 장면에서 빼지 않으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렇다고 민족대표 33인의 피어린 독립운동의 사실을 왜곡해서 백성을 드러내겠다는 발상은 잘못된 것이다.
이번 일이 설민석과의 싸움과 설민석에 대한 고소문제로 협소화되어서는 안 된다. 왜 매번 반복적으로 역사왜곡을 낳고 있는지, 그 근본적 문제를 시정할 수 있는 사회적 토론 또는 역사학계의 반성적 토론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과거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과거의 역사를 과장해서는 안 되겠지만, 과거의 역사를 비하하는 것도 문제다. 그런다고 미래의 역사가 건강해질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공과 과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자랑찬 역사로 또는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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