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프트-가쓰라 밀약'의 잘못된 해석에 대한 문제제기와 그 교정

2017. 9. 25. 22:59조선근대



190511을사늑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이 박탈당하기 전 725일 미국과 일본 간에 테프트-가쓰라 밀약이라 불리는 비망록(대담의 합의된 비망록[agreed memorandum of conversation])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미국, 미국 의회, 미국 국무성의 문서기록자나 주일 미국공사에게도 알리지 않고 숨긴 비망록이라는 점이다. 아래 기사의 의도는 알겠다. 일본의 외교적 책략이며 미국은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점을 밝히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사실이어도 이 상황에서 이것을 밝히는 것이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미국을 믿을만한 나라가 못 된다는 주장하는 사람들의 단골 레퍼토리가 테프트-가츠라 밀약인데, 이것이 오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래 기사의 모든 논지가 뒤흔들린다. 일본은 확실하게 이 밀약을 공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외교적 의도를 드러내고 외교전을 전개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떠했는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1905731일 이 비망록에 대해 당신이 가쓰라와 가진 대담은 모든 점에서 절대적으로 올바르다. 당신이 얘기한 말을 내가 구구절절이 추인한다(confirm)”는 답신을 테프트에게 보냈다. 아래 기사를 작성한 전 외교관이 인용한 타일너 데넷(Tyler Dennett)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President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저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 테프트-가쓰라회담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비망록은 미국 외교사에서 최초의 ‘(비밀)행정협정이었다. 동시에 미국은 1882522일 체결한 조미수호조약 제1관의 거중조정의무도 위반했다. 대한제국이 일본(조약에는 3’)에 의해 부당한 대우나 억압을 당할 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대한제국과 필리핀의 쌍방 덤핑 교환을 했다. 그것은 뒤이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에 논란을 벌일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아래 기사에서 주장하는 결론부분은 정말로 문제다. 조선을 꽁꽁 옭아 매기 위한 것이 테프트-가쓰라 회담의 목적이라면 비판해야 마땅하다. 그저 이런 의도의 일환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것이 아니란 말이다. ‘현실정치의 냉엄한 원리를 고려한다면, 국가 간 맺은 조약 등을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행태에 대한 비판을 통해 국익 또는 국력(?)에 의해 자기 마음대로 국제정치를 혼란에 빠뜨리는 국가들에게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것이 올바르다.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국제정치라는 논리를 수용하는 것은 정말이지 근시안적 단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조선 조정은 회담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는 비난도 사실과 다르다. 전 외교관 필자가 일본의 고도의 언론플레이로 주장한 고쿠마신문의 보도가 1905101일이므로, 그 이후 18대한매일신보기사에서 이미 밀약의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신보가 고종의 자금에 의해 창간되었다는 점에서, 고종도 이미 이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양한 방식의 외교적 노력을 전개했던 것이다. , 고종의 이승만 미국 파견, 고종의 러시아 황제에 대한 친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일본의 의도를 깨기 위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아래 기사의 결국 헛된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매달리다 망국의 비운을 맞았다는 그야말로 자학적 사관과 식민지 사관으로 우리의 미래와 외교를 펼칠 수 없다. ‘테프트-가쓰라 밀약이후 미국은 그 밀약의 상대방에게 진주만 침공을 당했고, 꽃다운 미국 청년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자강(自强)은 핵심이다. 동시에 평화와 공존의 외교를 통한 해법의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 탐문과 확인, 조율보다 중요한 것은 진심과 원칙이다. 그렇지 않으면 폭력과 거짓으로 일관되고 그 결과는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와 삶의 파괴뿐이다.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것이 오히려 21세기 대한민국 외교에 던지는 역사적 교훈이다. 동시에 이 글을 전 외교관 필자에게 진심어린 선물로 선사한다.


카츠라-태프트 밀약은 밀약이 아니다...한국인들에 주는 3가지 교훈!

글 | 신상목 전 외교관/일식당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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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가츠라 다로.

‘가츠라-태프트 밀약’은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권익을 인정하는 대가로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한 비밀 협정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믿을만한 나라가 못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과연 그런 것인가?
 
정확히 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일단 ‘밀약’은 정식 외교용어가 아니다. 밀약이라는 외교 용어가 있을 리가 없다. 본래 문건의 명칭은 “Agreed Memorandum”이다. 1905년 7월 29일 미국 육군장관(secretary of war) 윌리엄 태프트(William H. Taft)와 일본 총리 가츠라 타로(桂 太郞)사이의 회담 내용에 대한 기록이다. 합의각서, 비망록(備忘錄) 정도로 보는 것이 맞는 문건을 왜 밀약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주인공은 미국의 역사학자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이다. 데넷은 1924년 미 의회도서관에서 태프트-가츠라간 비망록 전문(電文)을 발견하고, 이를 소재로 'President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밀약은 이 논문의 ‘secret pact’에서 유래한 말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루즈벨트의 밀약’이라면 모를까 ‘카츠라-태프트 밀약’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더 엄밀히 말하면 대화의 내용은 당사자를 법적으로 구속하는 약속이 아니므로 pact라는 말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밀약이건 비망록이건, 중요한 것은 미국과 일본은 회담을 통해 상대국의 입장이 자국의 이익에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였다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그 확인을 바탕으로 각자 행동하면 되었다. 법적으로 구속하는 약속도, 지루한 교섭도 필요 없었다.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것이 가츠라-태프트 회담의 본질이다.
 
더 중요한 것은 회담의 추진 경위와 내용이다. 가츠라-태프트 회담은 철저하게 일본이 기획한 것이다. 러일전쟁의 승리를 확신한 일본은 전쟁의 종결 과정과 향후 극동(동북아시아) 질서에 미국을 깊숙이 개입시키고자 했다. 구상의 핵심은 영•미•일이 사실상의 동맹(de facto alliance)을 맺어 러시아를 역내 질서에서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영•일 간에 의견일치가 있었다. 카츠라-태프트 회담이 벌어질 당시 고무라 쥬타로(小村 壽太郞) 외상은 영일동맹 개정을 위해 영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츠라-태프트 회담은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영•일간 공조외교의 일환이었다.
 
미국은 전통적 고립주의 방침에 따라 타국과 명시적 공수동맹을 맺는 것을 극력 피하는 상황이었다. 러시아나 일본이나 모두 황제를 두고 있는 제국(帝國)이었고, 양쪽 모두 경계의 대상이었다. 국무성에는 친일파와 친러파가 공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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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대통령은 ‘차르’가 지배하는 러시아보다 일본에 더 호감을 갖고 있었다.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이 외교적 노력으로 얻어낸 외교 자산이었다. 영국과 일본은 그 틈을 노렸다. 가츠라는 회담을 철저히 비밀에 붙일 것을 태프트에게 요구하고, 집요하게 자신이 원하는 주제로 대화를 이끌었다. 심지어 당시 주일전권공사이던 그리스콤(Lloyd Griscom)에게도 비밀로 할 것을 태프트에게 요구했다. 법관 출신의 태프트는 아무런 권한의 위임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 부담스런 주제가 제기되는데 대해 찜찜해 했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일 뿐임을 전제하고 대화에 임했다.
 
대화의 핵심은 극동에서 영•미•일간의 협조체계 구축에 대한 서로의 입장이었다. 일본은 삼국이 극동에서 공동의 이익을 향유하며, 명시적 동맹은 불가하더라도 실질적 동맹(alliance in practice)은 가능한 것이 아닌지 묻는다. 태프트는 어떠한 경우에도 상원의 동의 없이, 명시적이건 비밀이건, 동맹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다만 미국은 극동의 평화 유지에 대한 일본과 영국의 정책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미국 정부는 필요시 적절한 행동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한다.
이것이 회담의 본령(本領)이었다. 필리핀과 조선 문제는 그러한 양해를 도출하기 위한 부수적 사안에 불과했다.
 
데닛 자신도 회담에서 필리핀과 조선이 상호 대상물(quid pro quo)로 교환된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데닛 교수가 ‘밀약(secret pact)'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실질적으로 동맹 체결에 해당하는 언질을 의회와 협의 없이 타국에 전한 것은 행정명령(executive order)으로 외교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행정부의 월권에 해당하는 것임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즉, 미국의 국내적 권력 분립, 절차적 문제를 제기하는 차원에서 ’밀약‘이란 자극적 표현을 사용한 것이지, 미•일간 조선과 필리핀 교환의 부당성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데닛은 가츠라-태프트 회담은 미국이 일본의 외교에 농락당한 것(outstepped) 이라고 분석한다. 불편한 입장에 있는 태프트의 의견을 집요하게 얻어내 그를 국내정치와 외교에 이용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고쿠민(國民)신문은 10월 4일자 사설에서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권익을 인정하는 대가로 미국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free hand)을 인정했으며, 미국은 영•일동맹의 일원”이라고 주장하였다. 극비를 요청해 놓고 먼저 정보를 슬금슬금 흘리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불쾌할 수밖에 없는 언론 플레이였고, 해석도 일본의 아전인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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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8월 미국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일본 고무라 주타로와 러시아의 세르게이 비테를 비롯한 두 나라 대표들이 러일전쟁 강화회담을 열고 있는 모습.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조약 주선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가츠라-태프트 회담을 미국을 믿지 못할 나라로 기억하며 울분을 토로하는 사례로 삼는 것은 각자의 자유이다. 단, 세 가지를 더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첫째, 일본이 조선을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외교전을 펼쳤는지를 상기해야 한다.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은 각 열강의 동의를 확보하며 이중삼중으로 조선을 꽁꽁 옭아맸다. 가츠라-태프트 회담은 그 일환에 불과하다.
 
둘째, 미국의 조선에 대한 입장은 극동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한 전략적 이해관계 속에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극동에서 미국의 이익은 만주를 포함한 중국의 문호개방에 방점이 두어져 있었고, 미국은 어느 나라건 이러한 전략적 이익에 합치하는 제안을 하는 상대와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츠라-태프트 회담을 누가 누구를 배신하고 해코지한 사례로 보는 것은 감정의 배설은 될지 모르나, 현실정치(realpolitik)의 냉엄한 원리를 외면하는 근시안적인 단견에 불과하다.
 
셋째, 정작 조선은 가츠라-태프트 회담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 조정은 러일전쟁의 결과로 촉발된 국제정세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외교정보 유통망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결국 헛된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에 매달리다가 망국의 비운을 맞았다.
 
가츠라-태프트 회담이 밀약이라면 그러한 밀약은 지금 이 시간에도 워싱턴DC, 도쿄, 베이징에서 시시각각 벌어지고 있을 터이다. 북핵문제, 사드(THAAD) 배치 문제 등으로 한반도정세가 혼란스러운 요즘, 미•일•중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대한 입장을 탐문하고 확인하고 조율하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의 국익에 반하여 한국을 옭아매는 외교전을 펼치고 있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어디인가? 동북아지역에 있어서 한반도를 종속 변수로 만드는 강대국의 전략적 이익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과연 한국은 그러한 밀약에 참가하고 있는가, 배제되어 있는가? 그것을 묻는 것이 가츠라-태프트 회담이 21세기 대한민국 외교에 던지는 역사적 교훈일 것이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