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14. 15:36ㆍNK_lecture
[김정은 집권 10년]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 불안·초조한 北 '파워엘리트'

조용원(왼쪽부터) 북한 노동당 조직비서, 김여정 당 부부장, 박정천 당 비서,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연합뉴스
어려지고, 짧아지고, 빨라졌다.
김정은 집권 10년의 인사를 총평하는 키워드다. 김 국무위원장은 2012년 27세의 어린 나이로 권좌에 오르자마자 ‘올드보이’들을 내치고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중용한 인물을 장기간 주요 보직에 두는 일은 드물었다. 인사 교체 주기는 잦았고, 노동당과 군 간부들의 계급은 수차례 롤러코스터를 탔다. 현재 북한의 ‘파워엘리트’ 면면에는 인사를 통해 국정을 장악하려는 김 위원장의 의도가 그대로 투영돼 있다. 김정은식 세대교체는 2013년 12월 고모부 장성택 처형을 계기로 본격화했다. 이 즈음 툭 튀어나온 사람이 조용원이다. 50대로 북한 권부에서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그는 2014년 조직지도부 말단지도원에서 부부장으로 승진해 김 위원장의 현지시찰에 동행했다. 2019년 제1부부장을 거쳐 올해 1월 8차 당대회에서 조직비서 겸 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2월 제8기 2차 전원회의에서는 경제부문 간부들을 호되게 질책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명실상부한 북한 내 ‘2인자’로 거듭났다는 의미다.
‘어린 실세’도 등장했다. 1988년생으로 추정되는 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이다. 남매는 북한 고위급 인사 중 유일한 청년세대다. 2014년 3월 제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김 위원장을 수행하며 얼굴을 노출한 그는 이듬해 당 선전선동부를 장악했다. ‘김정은 우상화’ 총책을 자임한 것이다.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을 시작으로 남북ㆍ북미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최측근 실세임을 여실히 증명했다. 주요 대남ㆍ대미 담화 역시 도맡아 북한 대외정책 ‘스피커’ 역할을 하고 있다. 김여정은 9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5차 회의에서 최고 정책결정기구인 국무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돼 조용원과 국정 운영의 투톱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1월 열린 북한 제8차 노동당 대회에서 최룡해(앞줄 왼쪽)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덕훈 내각총리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발언을 받아 적고 있다. 뒷줄에 북한 최고 실세 조용원(두 번째줄 왼쪽 두 번째) 당 조직비서와 김여정 당 부부장의 모습도 보인다. 조선중앙TV 캡처 연합뉴스
김정일 시대 ‘선군(先軍)정치’를 떠받든 군부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추락했다. ‘회전문 인사’란 별칭에서 보듯, 군부 인사들은 부침을 거듭했다. 김 위원장은 ‘승진→강등→복권’을 반복하며 긴장감을 불어넣고, 충성 경쟁을 유도하는, 특유의 군부 다잡기를 지속하는 중이다.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던 군부의 힘을 톡톡히 체감했던 터라 과거와 같은 득세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시도다. 단적인 예가 군서열 1ㆍ2위로 탄탄대로를 달렸던 리병철과 박정천의 뒤바뀐 처지다. 리병철은 핵ㆍ미사일 개발 주역으로 공을 인정받아 정치국 후보위원과 중앙군사위 위원에 올랐다. 2016년 김 위원장과 맞담배를 피운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올 6월 방역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박정천과 함께 실각했다. 리병철은 현재 모처에서 자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천은 곧장 부활했다. 강등 두 달여 만에 권력 서열 5위에 해당하는 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발탁된 것. 리병철의 자리를 꿰찬 그는 단번에 ‘군 서열 1위’에도 등극했다. 언제 내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절대 복종을 가능케 하는 버팀목이 된 것이다.

북한을 움직이는 '파워엘리트'. 그래픽=강준구 기자
‘빨치산 혈통’도 예외는 없다. 2014년 김 위원장의 초대 총정치국장이었던 최룡해는 임명 4개월 만에 황병서 당시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자리를 빼앗겼다. 빨치산 후광이 ‘보신’을 담보할 수 없다는 메시지였다. 그는 이후 2016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 3년 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 오르면서 공식 서열 2위가 됐으나 실권은 그리 많지 않다는 평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겸 노동당 총비서.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2011년 12월 17일 독재자 아버지의 급사로 27세 젊은이가 권좌에 올랐다. 어린 독재자는 국제사회의 우려 섞인 시선에도 10년을 너끈히 버텼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며 줄곧 개혁도 부르짖었다. 하지만 반(反)개혁은 여전히 강고했고, 국민의 살림살이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아사자가 속출한 1990년대를 떠올릴 정도다. ‘김정은의 시간’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지난 10년, 그에게는 독자적 리더십 구축에 성공했다는 평가와 세습의 굴레를 떨쳐내지 못했다는 비난이 혼재한다. 정부 관계자는 13일 “불안한 실험은 진행형”이라고 했다. 김정은의 북한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그의 10년을 주요 키워드로 돌아봤다.
①‘P’eople(인민): 통치술 극대화 ‘애민 리더십’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10월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 연설 도중 울먹이고 있다. 조선중앙TV 캡처 뉴시스
김 국무위원장은 선대와 다른, 독특한 통치 스타일을 선보였다. ‘감성’이다. 특히 눈물을 내보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지난해 10월 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 정점을 찍었다. 대북제재와 감염병 확산, 수해의 삼중고로 고생하는 주민들에게 눈물로써 고마움을 표한 것이다. 주민들의 생활 수준을 실질적으로 향상하는 ‘인민대중제일주의’란 용어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관영매체의 관련 언급은 2013년 14회에서 지난해 76회로 폭증했다. 몸을 낮춘 최고지도자의 ‘애민 리더십’은 다목적 효과를 노린, 계산된 연출에 다름 아니다. 회의 때마다 “인민의 권익을 최우선하라”고 간부들을 질책할 수 있는 동기가 됐다. 특권층엔 경각심을, 인민들에겐 충성심을 자극하는 용도로 애민 통치가 적극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②‘A’uthority(권위): 당(黨) 중심 1인체제 다져

올해 6월 개최된 북한 노동당 제8기 제2차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리병철(붉은색 원)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는 실각 뒤 복권하지 못했다. 조선중앙TV 캡처 연합뉴스
짧은 후계자 생활로 집권 기반이 미약한 김 위원장에게 ‘1인 지배체제’ 완성은 생존 과업이었다. 그는 ‘시스템 정치’에서 답을 찾았다. 먼저 군에 과도하게 쏠렸던 권력을 당정에 고루 분산시켰다. 이어 노동당 중심으로 각급 회의체를 운영해 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성과를 독려했다. 그 결과, 당이 군부를 압도하는 ‘선당(先黨)정치’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1980년 이래 35년간 열리지 않았던 당대회는 2016년 제7차 대회부터 5년마다 한 차례씩 개최되고 있다. 집단지도체제의 외형을 갖춰 독재 의심을 피하면서도, 김 위원장이 사실상 쥐락펴락하는 당 체제 완비를 통해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틀어쥔 것이다. 군부 길들이기도 1인 체제를 뒷받침했다.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운구차를 호위한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은 자취를 감췄고, 고모부 장성택은 처형됐다. 누구든 작은 권력을 가질 조짐만 보여도 가차 없이 싹을 자르겠다는 협박이었다. 김 위원장은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 체제도 기존 3인에서 5인(김정은ㆍ최룡해ㆍ조용원ㆍ김덕훈ㆍ박정천)으로 확대해 최고인민회의(국회), 내각, 군부 인사권을 모두 손에 쥔 데 이어, 1월 8차 당대회에선 선군정치 용어도 헌법에서 빼버렸다.
③‘I’ndependence(독립): 홀로서기 끝 '김정은주의'

북한이 지난달 18일 6년 만에 '3대혁명 선구자 대회'를 개최했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대회 참가자들이 복도에 걸린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초상화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조선중앙TV 캡처 연합뉴스
그는 집권 5년차인 7차 당대회를 기점으로 ‘홀로서기’의 내실을 갖춰 나갔다. 주로 선대 지도자들에게 부여하는 ‘위대한 영도자’라는 호칭도 이때부터 사용됐다.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할아버지ㆍ아버지 반열로 격상한 것이다. 과거 흔적 지우기에도 매진해 같은 해 6월 최고인민회의에서는 김정일 시대 최고통치기구였던 국방위원회를 폐지했다. 대신 국정 전반을 운영하는 국무위원회를 신설하고, 대외적인 국가수반의 자격을 얻었다. “북한도 정상국가를 지향한다”는 제스처였다. 1월 8차 당대회에서는 헌법상 김정일에게 영구 부여했던 총비서 직책 역시 획득해 ‘김정은의 북한’을 대외에 거듭 각인시켰다. 올 들어서는 ‘김정은주의’라는 독자적 사상체계, 우상화 작업에도 착수했다. 노동신문은 4, 5일 열린 군사교육일군대회 소식을 전하며 김 위원장을 “탁월한 스승”으로 묘사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사상적 지도체계를 선대와 차별화하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주체’, 김정일의 ‘선군’에서 독립해 김정은 시대를 관통하는 이념 정립에 골몰하고 있다는 얘기다.
④‘N’uclear(핵): 자신감의 원천 '핵 무력'

김정은(오른쪽 두 번째)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7년 11월 '화성-15형' 시험발사에 성공한 뒤 기뻐하고 있다.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집권 10년의 최대 결실은 역시 핵 전력의 비약적 발전이다. 실전 가능한 전략무기체계를 개발하겠다는 그의 집념 덕에 북한의 핵ㆍ미사일 능력은 진일보를 거듭했다. 김 위원장은 2013년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하여’라는 법령을 채택, 핵을 갖겠다는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이후 6차례의 핵실험을 강행한 끝에 2017년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시험발사에 성공하면서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핵은 김 위원장에게 좋은 협상 매물이었다. 그는 2018년 1월 신년사에서 “핵 단추가 내 책상 위에 놓여있다”며 미국을 대놓고 협박했다. 뒤이은 핵 협상은 대북제재 완화를 유도해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한 노림수가 분명했다. 2018년 6월 사상 첫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과 이듬해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까지, 그의 도박은 거의 성공하는 듯했으나 결국 빈손 합의에 그쳤다. 협상 결렬에도 북한의 국방력 강화 기조는 조금도 후퇴하지 않았다.
⑤‘PAIN’(고통): 협상 실패의 결말, 경제 파탄

김덕훈(가운데) 북한 내각총리가 9월 평양의 방직공장을 현지 시찰하고 있다. 평양=노동신문 뉴스1
거꾸로 핵과 경제를 맞바꾸려던 김정은식 담판 외교의 실패는 거센 후폭풍을 몰고 왔다. 고립은 심화됐고, 경제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북미관계 악화는 남북관계에까지 도미노 경색을 불러 인도적 지원 통로마저 막혀 버렸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면서 북한은 ‘자력갱생’를 외치는, 폐쇄 사회로 회귀했다. 악재는 겹쳤다. 북한에 ‘조건 없는 대화’를 요구하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출범으로 비핵화 논의는 아직도 협상 테이블조차 꾸려지지 않았다. 핵 무력을 한층 더 가다듬으려면 경제적 고난을 계속 감수해야 하고, 국가경제를 살리자니 핵을 포기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김기정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은 “경제만 놓고 보면 김정은의 10년은 실패”라고 단언하면서 “다음 행보는 핵과 경제 사이의 근본적 모순을 푸는 새 전략을 짜는 데 할애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정은 집권 10년 주요 일지. 그래픽=박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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