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23. 16:53ㆍ공간 일상 담론
기억이 공간과 만나면
4-1) 주마간산 기억 떠올리기: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2층 버스와 자전거
갑갑한 심정으로 전시관을 빠져나왔다. 도로와 건물 숲으로 나오니 왠지 편안해졌다. 충격이 좀 컸던 것 같다. 우리의 출장이 홀로코스트와 동독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데 첫 장면부터 이렇게 마음이 무거우면 앞으로 남은 일정을 어떻게 감당할지 겁이 났다.
그래서 일상은 다시 평정을 되찾는 공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또 이 길을 걸어가고 새로운 것을 만나면 다시 평정으로 돌아갈 것으로 믿는다. 참 희한하다. 쳇바퀴 도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일상으로의 복귀는 이런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은 보면 볼수록 희한하고 어렵다. 왜 도대체 일상을 연구해야 하는 것일까? 이 의문의 출구를 이번 여정을 통해 부분적으로라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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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을 이루는 두 개의 교통수단이 겹쳐진다. 2층 버스와 자전거…서울에서 2층 버스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도입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직접 현장에서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베를린호텔을 나와서 첫 이동을 버스로 했는데, 그 때 2층에 자리를 잡았다. 2층에서 바라보니 전경이 확 트여서 그런지 느낌이 좋았다. 1층에서 ‘세상보기’보다는 2층에서 ‘세상보기’가 더 좋아보였다. 위로 올라가는 것이 좋은 것이어서 그럴까?
가장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이동수단이 버스일 것이고, 새롭게 청정 이동수단으로 각광을 받는 것이 자전거다. 자전거는 매연 대신 땀과 몸 안의 나쁜 물질을 배출한다. 그리고 사람과 공간을 건강하게 만든다. 서울도 자전거타기의 열풍이 불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오가는 것은 불편하다. 그만큼의 인프라가 만들어지지 않은 까닭이다.
얼마 전 서울 상암경기장을 갔을 때, 자전거를 무료 대여해주는 시설을 보고 “어 이런 곳도 있었어!”하며 기분 좋았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타고 자 하는 사람보다 턱 없이 부족한 자전거 때문에 2시간의 긴 기다림 후에야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대제와 말단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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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시내를 따라 걷기를 하던 중 길 중간에 서 있는 한 건축조형물을 발견했다. 프로이센의 왕으로 장장 46년간 권좌를 지켰다고 한다. 따라서 독일민들에게 이 왕은 프로이센의 영토를 확장하고 유럽 최강의 군사강국을 만든 위대한 인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조형물에 왕이 갖추어야 할 자질로서 정의, 용기, 지혜, 관용 등 4개 항목을 명시하고 있다. 4면에 주요 인물들의 모습이 있는데 전면에는 프리드리히 국왕을 보필한 정치인, 장교, 관료, 귀족 등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말 꼬리 부분에 지식인이 배치되어 있다. 그 지식인 중에는 칸트도 포함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들은 이렇게 천대받는 것 같다.
천대받을 행동을 하니까 천대받는 것일까? 아니면 거대하게 중앙 집중화 된 관료체제 속에서 전개되는 위계화의 어쩔 수 없는 결과일까? 앞에 있다고 뒤에 있다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시대는 항상 변하고 위계도 전환되는 것일텐데…
역사의 궤적에 맞게 시대를 풍미하는 사람도 있고, 시대를 잘못 만나서 시대와 충돌하며 사는 사람도 있고, 당대에 즐겁게 살았으나 후대에 욕을 얻어먹는 사람도 있고, 당대에 힘겹게 시대와 충돌했으나 후대에 추앙받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베를린 시내 중심가에 큰 조형물로 상징하는 것을 보니 프리드리히 국왕이 독일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그 역사로 인해 독일의 역사가 그렇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베를린 국립도서관과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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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베를린 국립도서관을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보았다.
‘위로부터의 시각’에 대한 전면적인 전복이며 성찰이고 각성이 담긴 내용, 책을 읽는 노동자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어느 책 읽는 노동자는 의문에 빠지기 시작한다. 권력자들에 의해 위정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저 거대한 성과들이 그들의 땀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억센 팔과 근육을 가진 자들의 노동이 아니면 그 성과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저 장대한 역사의 시간 동안 만들어진 산물이 ‘노동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그들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다.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고 그들만이 세상을 전복시킬 힘을 가진 주체라는 것을, 의문 속에서 서서히 알아간다.
68혁명이 지나고 나서 파리의 노동자들이 생미셸가에 책을 훔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과 토론하기 위해 한참을 머물렀다고 한다. 의문에서 토론으로 토론에서 실천으로 그리고 세상의 변화로…
계급, 혁명이라는 단어의 추상적 구호가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우리는 연대를 어떻게 느끼는가? 우리는 동일한 계급적 처지에 처해 있기 때문에 연대하는가? 그렇다면 그렇게 수도 없이 많은 노동자들은 왜 단일하게 연대하지 못하는가? 이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의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파업의 연대는 함께 건 동료의 어깨 위에 흐르는 땀을 통해서 확인되는 것처럼, 일상의 진보적 변화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연대와 공동체를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의문이 언제쯤 풀릴까? 또 우리는 백마를 탄 왕자가 나타나 키스를 해주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브레히트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그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이 있다. 그 왕들이 바위 덩어리들을 끌어 왔던가?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 그때마다 누가 그렇게 많이 그 도시를 재건했던가? 황금빛 찬란한 라마에서 건축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완공된 날 그날 저녁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는 개선문들로 넘친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던가? 흔히들 칭송되는 비잔틴에는 그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의 나라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 땅을 삼켜버리던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들은 그들의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시저는 갈리아를 쳤다. 적어도 취사병 한명쯤은 데려가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 당하자 울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이겼다. 누군가 그 외에도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십년마다 한명씩 위대한 인물이 나온다. 누가 그 비용을 계산했는가
그처럼 많은 사실들. 그처럼 많은 의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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