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⑫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

2009. 6. 30. 15:58theory & science

“히스테리…남성언어가 파괴한 여성자아의 흔적”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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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⑫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1944~)은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나 독일과 영국, 미국 등지에서 수학한 철학자이자 문화이론가이다. 영화제작자로도 활동했다. 젠더와 이념사의 관계, 영화 및 매체 이론, 반유대주의의 역사와 관련된 많은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으며, 50여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텔레비전 특집물도 제작했다. 1969~1981년 프랑스 파리에서 작가 및 영화제작자로 활동하다가 이후 독일에서 문화이론가 활동에 몰두했다. 1994년부터는 베를린 훔볼트대 문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베일 속의 현실, 이슬람과 서구의 여자>(2007)와 <비아(非我), 논리, 거짓말, 리비도>(1985)가 있다.

 

서구의 정신문화사는, 자기 안에 모든 것을 통합하려는 남성적 ‘대문자 자아’가 자신을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하는 여성의 ‘소문자 자아’마저도 자신의 언어로 규정해 소멸시킨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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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폰 브라운을 페미니즘 사상 안에서 위치지우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는 프로이트, 라캉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데리다처럼 문자 언어나 자아 개념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분명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계보를 잇고 있지만, 실제 프랑스어권에서 활동했던 엘렌 식수, 뤼스 이리가레, 줄리아 크리스테바와 같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과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독일어권에서 홀로 진행된 그의 작업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무엇보다 여성주의적이며 해체적이었다. 그는 ‘히스테리’라는 여성 특유의 질병 현상에서 출발하면서, 이를 토대로 서구 문명사 전반에 깔려 있는 남성적 자아상을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히스테리, 거식증 그리고 분열성 정체성 장애는 소위 ‘여성 질병’으로 표현되어 왔다. 거식증에 걸린 환자는 대부분 여성이며,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자아분열 증상을 보이는 것도 여성이라고 여겨진다. 오늘날 이 질병에 주목하는 것은 의사나 심리학자뿐만이 아니다. 성직자, 철학자, 사회학자 그리고 예술가들까지도 이 질병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커다란 관심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이 질병의 정의와 원인을 규명하는 데서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며 치료의 성과도 아직 보잘 것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옆에 함께 살고 있는 많은 여성들이 이 질병을 앓고 있는데도 아무도 그 병이 무엇이라고 말해 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언감생심 완전한 치료는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 의학의 아이러니인 것이다.

 

여성주의 문화 이론가이자 철학자인 폰 브라운은 여성에게 자주 발견되는 히스테리 증상이 특정 남성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그녀는 문제의 증상들이 남성 주도적 문자(알파벳) 사회에서만 병으로 규정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이로부터 서구의 알파벳 문화가 처음부터 여성의 몸에 모순되는 상징체계를 부여했고 따라서 여성들은 끊임없이 고통을 겪어왔다고 주장한다. 곧 우리가 히스테리라고 부르는 증상들은 여성의 생물학적 상태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알파벳 문화의 상징적 젠더 질서로 인해 나타난 여성의 심리학적 상태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폰 브라운은 국내에 <히스테리>란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던 <비아>라는 책에서 남성 주도적 문자 사회 혹은 알파벳 문화의 특징을 ‘대문자 자아(Ich)’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브라운에 따르면 ‘대문자 자아’는 문자 문화의 역사 속에서 남성들이 추구해온 이성적 자아상으로서 완전성과 단일성을 추구하는 자아이다. 대문자 자아는 자신을 특정한 성을 가진 존재로 이해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무한의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으며 자기 안에 모든 것을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소문자 자아(ich)’는 자신이 어떤 특정한 성에 속한다는 것을 아는 자아이며, 이러한 점에서 자신을 유한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인식하는 자아이다. 폰 브라운에 의하면 서구 문명의 역사는 대문자 자아가 소문자 자아를 파괴해 온 역사이며, 이를 통해 성적 차이가 은폐되는 역사이다. 곧 서구의 정신문화사는 자기 안에 모든 것을 통합하려는 남성적 대문자 자아가 여성마저도 자신의 언어로 규정하려 했던 역사였으며, 이를 통해 여성의 소문자 자아뿐 아니라 남성의 소문자 자아마저도 소멸시킬 수밖에 없었던 역사였다는 것이다.

 

브라운에 의하면 근대에 이르러 대문자 자아로서의 남성은 자신을 이성 혹은 로고스로, 여성을 자연 혹은 몸으로 규정하고 자연으로서의 여성의 몸에 자신의 로고스를 각인하는 방식으로 통합의 욕망을 추구하였다. 예를 들어 근대국가는 여성을 아이들을 낳고 양육하는 몸으로 재현하는 전략을 통해 여성을 시민사회와 통합시켰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에 재현된 어머니의 몸은 독자적인 원리에 따라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로고스의 자연이다. 어머니는 로고스의 지침에 따라 재생산 이외의 섹슈얼리티를 자신의 몸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직 아이를 사랑으로 양육하여 훌륭한 시민으로 키워내는 일에만 ‘진심으로’ 매진하는 것으로 재현된다. 폰 브라운은 이러한 근대의 어머니 몸에 대한 재현은 모든 것을 자기 안에 종속시키려는 남성적 욕망의 표현이며 이러한 점에서 ‘가짜’ 혹은 ‘남근의(phallic)’ 몸이라고 본다.

 

브라운에 의하면 여성 불감증과 나르시시즘은 여성의 몸이 ‘가짜’ 혹은 ‘남근의’ 몸이라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남근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은 곧 그녀를 향하고 있는 남성의 리비도이며, 이러한 점에서 그녀는 별도로 남성을 사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몸의 불감증은 가부장적 핵가족을 지키고 사회통합을 공고화하는 데 완벽하게 기여한다. 그렇다면 여성은 이제 남성이 마련해 놓은 성 규범과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저항하여 자신의 소문자 자아를 회복할 수 없는 것인가.

 

여기서 폰 브라운은 여성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히스테리가 바로 소문자 자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곧 히스테리야말로 대문자 자아에 통합되지 않는 소문자 자아의 흔적을, 문자 언어에 의해 통합되지 않는 구전 언어의 흔적을 보여 주는 여성의 심리적 상태라는 것이다. 폰 브라운에게 히스테리는 자아를 잃어버리는 발작상태가 아니다. 그녀에 의하면 히스테리 속에서 여성들은 과장된 몸짓을 하는 자신을 뚜렷하게 보고 있다. 여성들은 히스테리를 통해 남성 욕망이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을 과대하게 포장하고, 거식증을 통해 남자보다 더 남근적인 몸을 욕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몸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욕망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곧 여성들은 히스테리적 과장을 통해 자신의 남근적 몸이 사실상 ‘연출’된 것임을 폭로한다. 그들은 대문자 자아에 의한 성의 통합과정을 인위적으로 모방함으로써 그것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폰 브라운은 대문자 자아에 의해 소문자 자아가 은폐되는 다양한 방식들을 문화사적으로 고찰하고 나아가 은폐방식의 변화와 함께 히스테리의 양상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도 살펴본다. 이러한 문화사적 고찰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성차의 이론을 발전시키고자 했던 여타의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다. 그러나 폰 브라운의 히스테리 이론은 몇 가지 한계도 지닌다. 우선 그녀는 히스테리 환자가 대부분 중산층 여성들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못했다. 그녀가 인용하고 있는 브로이어와 프로이트의 환자, 안나와 도라는 모두 가정이라는 영역에 머물러 있던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들이었다. 또 한 가지, 그녀는 잃어버린 소문자 자아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폰 브라운 스스로도 고백하고 있듯이, 히스테리는 하나의 동일한 언어, 곧 문자언어가 성적 차이를 은폐하고 있음을 폭로해줄 뿐 그래서 어떻게 우리가 잃어버린 성적 차이를 되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에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잃어버린 성적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이현재/서울시립대 연구교수

» 이현재/서울시립대 연구교수

이현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에서 인정이론과 여성주의를 접목시킨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근에는 페미니즘 유물론을 재구성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지구화와 더불어 나타나는 성적 실천과 규범의 변화를 분석하는 데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여성의 정체성-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책세상, 2007), <성/노/동>(여이연, 2007) 등이 있다. 현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에이치케이(HK)교수로 재직중이다.


기사등록 : 2009-06-26 오후 06:5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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