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28. 15:51ㆍ파놉틱 평화 읽기
‘신(新)냉전 갈등구조’에서 ‘탈(脫)냉전 협력구조’로
* 이 글은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동향과 분석'(제134호 2009.8.27) 전문가 칼럼에 게재된 글이다.
탈냉전의 상징,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영면하셨다. 수많은 애도의 인파와 함께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성찰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관계는 아직까지 궤도 이탈 상황을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생 숙원이었으며 공들여 쌓아 올린 ‘평화의 탑’이 완성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한반도의 8월은 그야말로 요동의 시간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은 이미 그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4월 로켓 실험발사와 5월의 핵실험은 북한이 국제사회에 보내는 ‘폭력적’ 협상요구 시그널이었다. 이미 북한입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상의 수단을 내보였기 때문에, 일정 시점이 지나면 단계적 협상국면으로 진입할 수밖에 없다. 그 시점이 8월이었다.
북미관계 : 공식적 기본입장 유지와 비공식적 물밑대화의 two-track 접근
우선 북미관계는 공식적 기본입장 유지와 비공식적 물밑대화의 two-track 접근이 전개되고 있다. 북미 간 기본입장은 전제조건과 가정법에 기초하기 때문에 접점을 찾기가 어렵다고 판단된다. 북한은 내부적으로 핵보유국의 위상 관철을 목표로 하면서, 북미 직접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클린턴 국무장관의 언급(8.22)처럼 “북한이 완전하고 비가역적인 비핵화에 동의한다면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포함해 북한 주민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인센티브와 기회의 패키지를 제공할 용의가 있다”는 접근이다. 여기에서 인센티브와 패키지는 클린턴이 지난 2월에 언급한 북미관계 정상화, 항구적 평화조약, 에너지와 경제적 지원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공식적 기본입장으로 본다면 북미 간의 전제조건과 가정법을 충족시키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실질적인 흐름은 이런 비관적 전망을 새롭게 해석할 가능성을 주고 있다. 8월 4~5일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의 방북과 여기자 2명의 석방을 시작으로 북미관계의 새로운 변화 조짐이 점쳐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제임스 존스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북한은 미국과 ‘더 새롭고 더 나은 관계’(a new relation, a better relation)를 원하고 있다는 점을 내비쳤다”는 언급(8.9)은 북미 간 물밑대화가 이미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19일에는 빌 리처드슨 미국 뉴멕시코 주지사와 김명길 북한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공사 간의 대화를 통해 북한이 미국과 직접 대화를 원한다는 입장이 개진되었으며, 20일 “북한이 6자회담에서의 약속과 의무를 존중한다면, 미국은 앞으로 6자회담이 아닌 다른 형태의 회담도 고려할 수 있다”는 미 국무부 고위관계자의 언급(미국의 소리방송)이 있었다.
이는 미국의 가장 상위의 아젠다가 ‘반테러 비확산’이기 때문에 북한의 핵 확산을 제재의 방식으로만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과 동시에, 북한의 입장에서도 북미 간 관계개선 및 포괄적 해결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타개하지 않는다면 체제의 내구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당분간 북미 양국은 공식적 기본입장을 유지하면서 물밑접촉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면서 대화와 타협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접근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남북관계 : 강경입장 지속과 ‘부분적 접촉’ 수준의 ‘신냉전 갈등구조’ 유지
남북 당국 간 상호에 대한 강경 입장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부분적이고 한정된 영역에서 접촉’을 통한 대화의 모멘텀은 유지될 것이다. ‘부분적이고 한정된 영역에서의 접촉’의 돌파구는 북미관계의 점진적 변화와 동시에 시작되었고, 그 시발점은 8월 10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이었다. 뒤이어 이명박 대통령은 8월 15일 경축사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대화와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구상’을 추진하겠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현정은 회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과 함께 5개항 합의가 이루어졌고, ‘12.1’ 조치가 해제(8.20)되었다. 8월 21일 북한 조문단이 남한에 도착했고, 23일 이명박 대통령과의 면담도 성사되었다. 이 대통령과의 면담 성사는 남북 정상 간 간접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계기임에 틀림이 없다. 북한 조문단이 “남북관계를 새롭게 시작하자”는 취지의 언급이 있었다는 점에서 일정 수준의 유화국면이 조성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남한은 비핵화를 기본전제로 국제사회의 제재 지속을 통해 북한을 압박하여 대화로 나오게 하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도 남한과의 전면적 관계개선보다는 미국의 직접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면서 남북관계의 부분적 개선을 국제사회의 대북압박을 약화시키는 상징적 조치로 활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 점에서 남북한 간 경제협력 분야에 대한 대화 창구를 열어놓고 실질적인 협상은 북미 직접대화를 통해 풀겠다는 이중적 접근이 북한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발상의 전환 :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의 선순환 구조 구축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를 확보하면서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요구하고 있고, 미국은 핵확산 차단을 위한 강력한 제재와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적절한 인센티브 제공하겠다는 채찍과 당근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남북관계는 이산가족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이 개최되는 등 대화의 물꼬가 열리긴 했으나 경제 영역의 수준에서 한정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6자회담의 전망도 불투명하다. 이는 북한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자구조의 공백을 의미한다. 미국의 북한 전문가들은 중국에 대해 강력한 제재를 요구하고 있으며, 북한의 붕괴 및 급변사태에 대비하여 탈북 난민수용에 대한 비용분담과 통일된 한반도에서의 미군 철수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제기한 바 있다. 향후 동북아지역 질서는 미-중-일 3국의 협력대화에 의해 진행되고, 이 협력대화 하위에 6자회담 또는 동북아 다자협력체가 작동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북핵 및 한반도 문제에 있어 남북 당사자원칙이 심각하게 훼손될 우려가 있으며, 남한의 외교적 개입능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현 상황은 한국 외교문제에 있어 ‘위기의 시기’가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즉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긍정적인 방향에서 상호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면서 북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추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남북관계와 관련, 우리 정부는 6․15와 10․4 선언에 대한 전향적 태도 표명과 실천적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산이며, 김일성 전 주석의 ‘유훈’임과 동시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치적 자산이기 때문에 양 선언에 대한 유연한 입장 변화가 필수적이라고 판단된다. 또한 최근 일련의 상황은 우리 정부의 능동적 정책선택의 이니셔티브를 가능케 하는 환경이 되고 있다.
두 번째, 미국의 ‘6자회담 구조 속에 북미대화 가능’ 입장에 대해 한미 간 협의를 통해 좀 더 유연한 접근을 추진하는 것이다. 즉 6자회담 개최를 전제로 회담 테이블 이외에서도 북미 간 직접대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제시함으로써 6자회담을 조속히 복원할 필요가 있다. 6자회담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며, 향후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위한 다자협력체의 모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북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6자회담 - 남북대화 - 북미대화’의 조화롭고 균형 잡힌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향후 대화국면에 진입하게 되면 북핵 문제를 해결할 구조는 다자대화로서 6자회담과 양자대화로서 남북 및 북미대화의 세 축이 중심적으로 작동할 것이다. 북한은 북미 직접대화에 중점을 두겠지만 북한의 의도대로만 전개될 수는 없다. 따라서 “6자회담(북핵문제 해결)-북미 직접대화(관계정상화)-남북대화(한반도 평화체제)”라는 전략적 배열을 구성하고, 이를 연계하여 선 순환하는 방향을 만들어가야 한다.
지금이 진정으로 실용적 접근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현재의 신냉전 갈등구조를 공존적 대화구조로 전환시키고 궁극적으로 탈냉전 협력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적대적 의존에서 협력적 대화로 빠르게 전환하는 것이 선결적이다. 대화 없는 제재는 충돌과 갈등으로 가는 길이다. 대화를 통해 평화와 공존을 모색하고 공영의 방법을 찾는 것이 현 단계 남북문제에 있어 진정한 실용적 접근이다.
또한 한미동맹이 공고하다고 하나, 미국의 안보정책 핵심전략은 ‘반테러 비확산’이기 때문에 핵 비확산의 원칙에 근거 한미 간 균열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 타임지(4.16)에 의하면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푸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북한과의 직접대화라는 사실은 미 국무부 관리들 사이에서 공유되어 온 공공연한 비밀에 해당”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어떠한 형태로든 북미 직접대화가 진행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미 간 긴밀한 대화와 협력은 필수적이다.
이제 동북아지역에서 점진적 변화의 계기들이 마련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이런 변화의 계기들을 간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계기를 적극적으로 포착하고 정책을 유연하게 전환하여 동북아지역의 외교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름길이다. 명분과 이념에 빠져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살벌한 외교전쟁에서 낙오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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