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다음날의 단상] 힘겨운 일상에서 연대의 밀알을

2009. 10. 5. 17:17sensitivity

 

힘겨운 일상에서 연대의 밀알을 ...

 

 

힘겨운 일상을 뒤로 하고 명절 추석이 지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전국으로 이동하는 시간, 그리고 급박하게 변화하는 공간,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기억들...

 

그렇게 시간, 공간이 어울려 기억을 만들어낸다. 그 기억은 어떤 사람도 변화시킬 수 없는 개인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육신의 한계 시간까지 남아서 세상을 뱀돈다. 그 기억은 어느날 갑자기 유령처럼 나타나 전체를 뒤흔들고 어느 새 사라져 뇌리 속으로 들어간다.

 

이 어두운 신자유주의 터널의 시간은 양극화라는 거대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절망이라는 기억을 도처에 양산하고 있다. 그래 그것은 벽이다.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끼"는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에 나오는 벽이다.

 

모두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는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공간에서 생존을 위해 버둥거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어쩔 수 없는 벽' 그 벽을 허물어뜨려야 한다는 호기의 혁명 프로젝트도 20세기의 유물로 사라져버렸다.

 

대안없고 갈 길 헤매는 21세기는 그렇게 '저것은 벽' 허물 수 없는 성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쌓이고 쌓여 도대체 넘을 수 없는 산으로 변한다. 어쩌면 저것은 산이다. 넘을 수 없는 산이다. 그래서 절망의 기억들이 쌓이고 절망의 공간으로 재편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한탄한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간다.

 

어찌할까? 어떻게 해야할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연대의 희망, 함께 함의 즐거움...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이 절망적인 양극화의 공간 속에서 우리는 어렴풋이 연대의 기억을 떠올린다. 절망의 공간을 온통 뒤덮어 희망으로 전변시키는 수천 수만의 연대의 유령이 도처에서 움틀거린다. 그 양극화의 절망적 공간을 부여잡고 희망의 기억을 만들어간다. 그래 우리에게 조금씩 천천히 서로의 손을 잡고 넘어넘어 작고 힘 없는 것들의 연대의 어깨동무가 되살아난다.

 

그것은 빛.

동지와 맞댄 어깨동무와 그 동지의 팔뚝에 맺힌 땀방울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임을 확인한다. 그것이 연대이다. 탁상공론과 같은 연대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몸짓에서 우리는 연대를 발견한다. 그 땀방울을 확인하지 않고 연대를 말하지 말자. 그것은 거짓이다. 진실을 말하자. 부대끼고 느끼는 일상의 연대를 만들어가자.

 

그것은 희망.

사회적 소수로 낙인찍혔지만 그들은 세상의 다수이며 세상의 생산력이다. 그 억센 노동의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현대화된 공간도 존재할 수 없었다는 자긍심. 그것은 소수자의 기억이다. 다수임에도 소수로 낙인찍힌 '주홍글씨'들의 힘이다.

 

이제 그 벽을 넘어가자.

소외된 사람들의 힘겨운 노동의 시간, 성장과 개발로 짓눌리고 쫒겨난 공간 속에서 도처로 퍼져나가 또 다른 공간을 개척하는 새로운 공간, 그리고 그 온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만들어진 담쟁이 기억으로 새로운 희망의 평원을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