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아리랑] 우리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 망루에 올랐을 뿐

2009. 10. 22. 14:54파놉틱 정치 읽기

 

 

우리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 망루에 올랐을 뿐

 

 

용산아리랑

 

용산참사는 대한민국의 ‘슬픈 기억’이다. 살기 위해 몸을 던져야 했던 약자들의 저항이었다. 약자들의 저항마저도 품을 수 없는 나라라면 누가 나라를 위해 충성을 할 것인가?

 

 

▲ 검찰 구형이 끝난 직후 용산 범대위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고 이상림 씨의 부인이자 이충연 위원장의 어머니인 전재숙 씨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전재숙 씨 옆으로 이충연 씨의 형 이성연 씨, 부인인 정영신 씨. ⓒ프레시안

 

징역 8년 구형, 징역 7년 구형, 7명의 약자들에게 너무나 커다란 구형이 이루어졌다. 이 모든 참사의 원인은 공간에 있다. 성장과 발전의 도그마, 그것은 이제 물신으로 화해서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의가 되어버렸다. 누구를 위한 성장인지 누구에게 돌아가는 발전인지 그것은 중요치 않다. 단지 성장하고 발전하면 그것이 선이 되어버리는 세상으로 가고 있다.

 

용산참사의 아픈 기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용산아리랑을 불러야 한다. 슬픈 기억을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중단되지 않고 세상에 메아리쳐져야 한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망루에 오른” 그들의 절박한 이야기들을 되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약자들에게 미래는 ‘희망 없는 게토’에 불과하다.

 

도시빈민의 ‘엑소더스’(exodus)

 

*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의 철거현장 사진

 

과거 개발지상시대에 재개발은 원주민들을 외곽으로, 지하로, 옥탑으로 내몰았다.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집안 살림 다 정리해서 서울로 올라온 농촌의 농민들은, 이제 세찬 환경 속에서 억센 노동으로 하루하루의 삶을 만들어 가는 도시빈민이 되었다. 내 온 삶은 뼈가 부러지고 살이 갈라지더라도 내 자식만은 공부시켜서 성공시키겠다는 그 일념하나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일상은 도시빈민의 보편적 정서였다.

 

* 수몰지구의 사진. 공간의 재편은 항상 이런 군상들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 일념은 단 순간에 무너져버렸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 많은 시간을 통해 만들었던 ‘기형적이고 허물어질 것 같은’ 달동네도, 물도저와 포크레인에 의해 단 몇 시간 만에 무너져 내렸다. 살기 힘들지만 훈훈한 정이 오가던 달동네의 공동체는 그렇게 무너졌다. 그리고 서울 외곽 경기도로 하나 둘씩 떠나야만 했다. 서울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지하로 들어갔다. 서울 시내 그 많은 반지하, 지하 연립주택으로, 그리고 옥탑으로 스며들어갔다. 그들은 빛을 보지 못하거나 아니면 너무나 많이 빛에 노출되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아니면 정든 땅을 떠나 타지로 이동해야만 했다.

 

공간을 장악하려는 자본의 기세는 지금도 사그러들고 있지 않다. 뉴타운, 재개발, 재건축의 광풍은 건설자본의 욕망과 결합되어 지금도 약자들을 내몰고 있다. 이제 생존을 위한 저항은 ‘도시 테러리스트’로 규정되고 말았다. 살기 위한 저항이 테러리스트로 규정된 것이다. 검찰의 구형이유를 들어보면 답답하다. “폭력으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사회적 약자들이 모두 화염병을 들고 거리로 나서게 될 것”이란다.

 

검사들의 상상력은 너무나 무궁무진하다. 모든 약자들이 폭력으로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된다면, 그들 모두가 화염병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대한민국의 모든 약자들이 화염병을 들었던가? 대한민국의 약자들은 합리적 사고도 하지 못하는 ‘도시 테러리스트’들이란 말인가?

 

검사들에게 구형의 권한을 뺐어버린다면, 검사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그들은 약자들이 아니라서 그리고 폭력으로는 무엇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저 수용하고 살아갈까? 풋내기 검사들이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대통령을 대하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자본과 권력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공간으로 도시를 방치할 수 없다. 그곳에 사람은 없고 공간을 장악하려는 자본과 권력의 숨소리만 가득할 것이다. TV CF에 나오는 상업적 휴머니즘의 공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돈이 필요하다. 약자들에게는 없는 돈이 말이다. 그래서 새롭게 만들어진 공간은 약자들에게는 ‘갈 수 없는 유토피아’다. 그저 CF로만 대리만족을 느껴야 하는, 눈으로만 아이쇼핑을 해야 하는 그런 공간이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이 땅을 점령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재개발과 뉴타운의 가나안은 이제 자본과 권력이 점령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하느님은 가나안을 약자들의 풍요로운 삶이 영위되는 공간으로 예언하지 않았을까? 핍박받고 설음당한 사람들의 편안한 안식처를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을까?

 

가아안족은 최초로 알파벳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마 지금 대한민국의 철거민들은 그 땅의 최초의 주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본과 권력의 ‘속삭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만들어주겠다는 그 속삭임에 속아서 그 땅에 살 수 없게 되었다.

 

원주인은 사라지고 새로운 주인이 들어선다. 그곳의 땅은 가진 자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화된다. 그렇게 하나 둘씩 ‘땅따먹기’처럼 잠식해 들어온다. 이제 공간은 자본과 권력의 활동무대로 변질된다. 그 땅의 원주민들은 게토로 게토로 들어간다.

 

 * 멀리서 본 타워펠리스

 

대한민국 부의 상징 타워펠리스의 함정으로, 덫에 걸려 넘어가버린다. 갈 수없는 동경에 대한 갈망, 그리고 왜곡된 부에 대한 욕망의 전차가 세상을 지배한다.

 

보통사람들을 위한 공간투쟁

 

이제 공간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공간을 보통시민들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변형시키는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대안적 방향이 없다면 제2, 제3의 용산참사는 재발될 것이고 중형선고의 악순환은 되풀이될 것이다. 아니 이제 무서워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건설자본에게 규제 없이 활개 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공간의 공공적 재구성’이다. 서민들의 삶의 공간에서 진보성을 부활시켜야 한다. 자본과 권력이 추구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서민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공간의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1차적 목표지점은 지방선거가 될 것이다. 이제 8개월도 남지 않았다. 도시공간의 ‘공공적 재편’이라는 대안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서민을 위한 공간으로 도시를 탈바꿈시키자. 시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지는 도시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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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든 지하철, 우리가 만든 버스정류장, 우리가 만든 관청, 우리가 만든 도로, 우리가 만든 공원을 우리를 위해 변화시키자는 것이다. 이 모든 공간을 자본이 잠식하도록 방치하지 말자는 것이다. 지하철은 온갖 상점이 들어찬 공간이 아니라, 서민들은 위한 복지공간과 생활공간으로 탈바꿈시키자. 공무원을 위한 관청이 아니라 주민을 위한 관청이 되도록 만들자. 가난한 동네에 더 많은 공원을 만들자. 그리고 땅을 밟을 수 있도록 하자. 성냥갑 같은 아파트시대는 사라지고 있으니 보통사람들을 위한 공동체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건출물을 창조하자.

 

이 공간투쟁은 새로운 공동체 연대의 문화를 만들 수 있는 창고가 될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공간에서 공동체의 희망과 미래를 만들어가는 상상을 현실로 바꾸자.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뚜벅뚜벅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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