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2009. 11. 10. 10:43theory & science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30년이란 시간이 흘렸다. 강산은 변하고 변해 아무 것도 과거를 찾아보지 못할 것 같은 빠른 변화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불러오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호명되는 그 이름 박정희.

그 이름은 슈퍼맨처럼 보수의 입에서 입으로 호명된다. 로보트 태권V를 부르면 슈퍼맨을 부르면...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짱가가 나타난다.

 

그렇게 보수의 시대에 박정희란 호명은 신화처럼 나타나 시대의 발걸음을 묶어두곤 한다.

성장의 신화, 발전의 신화, 경쟁의 신화, 효율의 신화...

1960~70년대 박정희는 신화가 아니었다.

그런데 21세기 박정희는 신자유주의와 결합되며 신화가 되고 있다.

 

불을 발견했던 발명가로

근대화를 실천한 산업전사로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지도자로

새마을운동과 '현지지도'의 자애로운 아버지로

 

왜 박정희란 이름을 호명하며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보수의 유일한 안식처이기 때문일까?

왜 보수의 시대에 보수의 호명이 넘쳐나는 걸까?

아직도 불안한 걸까?

아니면 영구집권과 권력의 무한성을 증명하려는 걸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인가?

그 호명에 고개들어 쳐다보고 끄덕이는 우리는?

 

구구절절

박정희의 살아온 이력을 들춰내고 싶지도 않고

그가 집권한 시간동안의 과오를 끄집어내고 싶지도 않다.

그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니 신화로 역사를 왜곡하지 않도록 하면 될 일이다.

 

우리는 단번에 알 수 있다. 인혁당 사건으로 죽어간 8인의 그 슬픈 사연을 알고 있다면

기억을 숨길 수 있다고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시대와 그 지도자를 보면서

 

그리고 30년이 넘어 판명된 인혁당 사건의 실체를 보면서

억울하게 죽어간 8인과 그 가족들의 슬픈 가족사의 편린을 보면서

그리고 그들을 배제하고 내몰았던 우리 안의 파시즘을 보면서 말이다.

 

이제 이런 역사는 반복되지 말아야 하며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은 복원되어야 한다는 것을

 

* 아래 내용은 한국경제정책연구회와 한겨레신문사가 공동 주최한 <<박정희 시대 재평가 토론회>>에 대한 한겨레 기사내용이다.

 

 

 

“보수세력, 민주개혁 막으려 박정희 신화 꾸며”
[박정희 시대 재평가 토론회] 정치분야
한겨레 이세영 기자
» 한국경제정책연구회와 <한겨레>가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동 한성대 에듀센터에서 함께 주최한 ‘박정희 시대의 재평가’ 정치분야 토론회에서 임혁백 고려대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비장미 넘치는 비극의 역사라도 두번째로 재탕되는 순간 우스꽝스런 희극이 되고마는 게 역사의 진리다. 2009년 가을,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희극으로 재연되는 ‘박정희전’이다. 참모진을 대동한 채 논두렁에 앉아 막걸리잔을 기울이는 지도자의 모습에 훈훈한 감동보다 쓰디쓴 실소를 머금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의 의문은 이렇다. 왜 국민의 외면을 받고 심복의 총에 목숨을 잃은 30년 전 독재자가 향수와 모방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9일 오후 서울 혜화동 한성 에듀센터에 모인 사회과학자들의 의문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시대의 재평가’라는 이름 아래 모인 이들은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이 전무후무한 역사적 성취였는지, 인권과 민주주의를 희생시킨 박정희의 성장전략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등 ‘박정희 논쟁’의 핵심 논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국경제정책연구회와 <한겨레>가 함께 주최한 행사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산업화에 유리한 계급구조·미국 파격적 원조 작용
경제성장 원인 복합적인데 “박정희 덕분” 왜곡시켜
1978년 총선 야당에 득표율 뒤지는 등 당대평가 외면

 

“박정희 신드롬은 한국 보수주의자들의 ‘아버지 콤플렉스’가 낳은 퇴행적 병리현상이다.”

 

정상호 명지대 교수는 한국 사회를 휘감은 박정희 열풍을 ‘파파보이 콤플렉스’로 규정했다. 박정희가 죽은 뒤 독자적이고 체계적인 보수 이념을 만들어내지도, 박정희에 견줄만한 ‘훌륭한 자식’을 가져보지도 못한 보수세력이 탈냉전과 민주화라는 거시적 흐름에 적응하기보다 ‘위대한 아버지’ 품에 안기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이 박정희 신드롬이란 결과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박정희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생각만큼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점인데, 그 근거를 정 교수는 임기 내내 ‘선거 압력’에 시달렸던 점, 1978년 총선에선 야당인 신민당에 득표율에서 뒤질 정도로 민심 이반이 심각했던 사실 등을 든다.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를 꿈꿨던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그에 대한 평가가 인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 박정희는 어떻게 부활했을까. 정 교수는 박정희 현상의 확산에는 세 차례의 계기가 존재했다고 본다. 첫번째 계기가 87년 대선국면에서 이뤄진 유신세력(공화당)의 정치세력화라면, 두번째는 1990년 3당 합당을 통한 유신세력의 집권층 편입, 마지막은 김영삼 문민개혁의 실패에 따른 반사효과다.


“철학빈곤이 낳은 퇴행적 현상”
 

당시 보수세력이 박정희를 호명하는 데 주력했던 것은 박정희가 문민·민주정부의 약점을 드러내주는 가장 효과적이고 대중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념과 철학이 빈곤한 한국 보수주의자들은 대처나 레이건 같은 새로운 보수주의 전사를 만들기보다, 김영삼의 문민개혁과 김대중·노무현의 민주개혁을 좌절시킬 목적으로 박정희를 영웅화하는 복고주의 전략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단언한다. “신드롬의 주인공인 박정희는 독립적 자아를 형성하지 못한 못난 자식,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발견하고 꾸며낸 상상의 구성물이다.”


»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들머리에 붙어 있는, 박 전 대통령의 생전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 류우종 <한겨레21> 기자 wjryu@hani.co.kr
임혁백 고려대 교수는 이렇게 탄생한 ‘상상의 구성물’의 핵심으로 육박해 들어간다. 임 교수가 볼 때 박정희는 이데올로기보다 실익을 중시하고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데 능숙한 ‘마키아벨리적 근대군주’이자, ‘친정치적 행동주의 장교’였고, 일본 육사교육과 장교생활을 통해 군국주의를 내면화한 ‘메이지 근대화 모델의 수제자’였다. 이런 박정희의 집권시기에 한국이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 것은 사실인데, 문제는 ‘박정희 신화’가 이 시기의 성취를 박정희 개인의 역량 덕으로 돌려버린다는 사실이다. 이런 편향은 ‘권위주의적 근대화론’이나 ‘발전국가론’ 같은 학적 담론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이에 대해 임 교수는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을 통해 지주계급이 몰락하면서 한국의 계급구조가 산업화에 적합한 형태로 형성돼 있었다는 ‘구조적 설명’과 미국의 동북아 전략에 따른 파격적 원조와 지원을 강조하는 ‘지정학적 행운론’ 등의 반박이 이미 이뤄졌음을 강조한다.

 

‘3당 합당’등 통해 신드롬 확산

 

요컨대 박정희 집권기의 성장은 “국가-시장 간 적절한 분업구조 형성과 효과적인 발전전략 같은 내생적 조건에, 도시중심 산업화에 친화적인 계급구조 형성, 국제분업구조 변화와 미국의 자비로운 헤게모니 같은 외생적·우연적 조건 등 다양한 변수들의 결합으로 가능했다는 설명이 타당하다”는 얘기다.

 

문제는 승승장구하던 박정희 체제가 왜 그렇게 허망하게 종말을 맞았냐는 것이다. 임 교수는 “박정희 1인에 의존하는 인치적 권위주의 체제”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그에 따르면 박정희의 통치는 1970년대 후반 2차오일쇼크를 계기로 중화학공업 우위의 축적전략이 위기를 맞고, 이것이 정치위기로 심화되면서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는데, 여기에 미국 카터행정부와의 관계악화가 정권의 대외적 정통성을 약화시킴으로써 총체적 위기로 전환한다.

 

임 교수는 그러나 당시 박정희에게도 탈출구가 존재했다고 본다. 중국 공산당처럼 권위주의 체제 안에서 후계자에게 권력을 이양하거나, 북한처럼 자식에게 세습하는 것, 그도 아니면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세 가지 모두를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임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박정희 스스로가 죽음에 이르는 상황까지 권력을 추구하는 홉스형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박정희의 몰락과 유신체제 붕괴는 박정희의 선택이란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집권때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가장 위협”
[박정희 시대 재평가 토론회] 정치분야
한겨레 이세영 기자

박정희 시대의 정치를 주제로 발표한 연구자들은 한결 같이 내적 모순의 폭발성에 주목했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는 파국을 향해 치닫던 권위주의 체제와 저항운동의 길항적 상승작용을, 김동노 연세대 교수는 박정희와 한국 보수주의 이념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강조했고,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박정희 시대 헌법질서의 변화가 가져온 민주주의-헌정주의 간 모순으로 눈길을 돌렸다.

 

정해구 교수는 정치적 정당성이 취약했던 박정희의 지배가 18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을 식민통치와 전쟁을 거치며 형성된 ‘강한 국가 대 약한 시민사회’의 구조에서 찾았다. 하지만 박정희 체제가 강압에만 의존한 체제는 아니었다. 정 교수가 볼 때 박정희가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경제발전 성과와 안보위기의 적절한 활용이었는데,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급속한 경제성장의 부작용이 분출되고, 장기집권 시도에 따른 민주화 세력의 저항이 강화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박정희는 영구집권 보장을 위한 제도화된 독재체제로서 유신체제 구축에 나서는데, 이런 상시적 비상체제의 구축과 운영은 그 자체로 정권의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오히려 민주화 운동의 강도를 높이는 효과를 낳았다.

 

결국, 박정희 시대 18년을 통해 지속된 통치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갈등은 억압과 저항을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나선형으로 갈등의 강도를 높여가는 과정이었고, 결국에는 박정희 체제의 종말을 가져온 정면 충돌로 치닫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게 정 교수의 분석이다.

 

김동노 교수는 박정희 신드롬의 사회적 기반인 한국의 보수세력과 ‘역사적 박정희’ 사이의 이념적 긴장을 파헤쳤다. 김 교수가 볼 때 보수주의자들이 신성불가침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가장 위협받았던 시기는 박정희 시대다. 박정희 모델은 시장의 실패에 국가가 개입하는 차원이 아니라, 국가가 시장을 대신해 경제성장을 이끌면서 총량 위주의 업적을 지향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인데, 이는 이념적으로 ‘국가(사회)주의’에 가깝다는 게 김 교수의 진단이다.

 

이런 박정희 체제의 국가(사회)주의적 성향은 교육평준화와 개발제한구역 설정, 국가의료보험 등에서 한층 두드러졌는데, 이런 점에서 박정희와 보수세력의 유착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정치이념에 내장된 혼란과 무원칙성을 드러내는 ‘잘못된 만남’이었다고 김 교수는 단언한다.

 

박정희 시대의 헌법과 헌정주의를 고찰한 박명림 교수는 이 시대를 “한국 헌법 가운데 가장 미국적인 5·16 헌법에서 가장 권위주의적인 유신헌법으로 극적으로 전이한 시기”로 규정한다. 박 교수가 무엇보다 주목하는 점은 유신헌법의 특성인 간선제가 전두환 헌법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박 교수는 1987년 6월항쟁이 “유신헌법과 전두환 헌법 모두에 대한 극복 시도”였다고 본다. 문제는 박정희 시기 이루어진 헌법 시스템의 변화가 상시적인 헌정파괴 상태를 지속시킴으로써, ‘헌정회복=민주주의’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박 교수는 이런 인식의 한계가 이명박 정부를 거치며 비로소 가시화됐다고 본다. “법치·헌정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가 크게 위축되는 상황을 체험하면서 헌정주의와 민주주의가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학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세영 기자

 

 

“재벌중심 ‘반짝 성장’…오늘날 양극화 유산남겨”
[박정희 시대 재평가 토론회] 경제분야
한겨레 이세영 기자 김명진 기자
» 유종일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맨 왼쪽)가 9일 오후 서울 혜화동 한성대 에듀센터에서 열린 ‘박정희 시대의 재평가’ 경제사회 분야 토론회에서 발제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박정희 체제의 ‘지속불가능성’에 주목했다. 단기간에 뚜렷한 양적 성과를 거둔 것은 맞지만 체제의 작동방식 자체가 ‘지속가능성’을 결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교수가 볼 때 박정희 체제는 ‘항상적 위기에 시달리는 체제’였다. 국내 저축이 부족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추진된 자본축적 전략은 인플레와 국제수지 적자 문제를 상존시켜, 개별 기업들 뿐 아니라 국가 경제 시스템 전체가 안팎의 위기에 취약한 구조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단명할 수밖에 없는 체제가 20년 가까이 지탱했으니 부작용이 없을 리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유 교수가 오늘날 양극화의 연원을 박정희 체제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가장 큰 실책으로 ‘양극화’를 꼽는 진보진영 주류의 시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유 교수는 “민주정부 아래서 진행된 양극화를 개탄하는 것은 옳지만, 이런 지적은 박정희 시대에는 양극화가 없었다는 논리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고 말한다.


» “재벌중심 ‘반짝 성장’…오늘날 양극화 유산남겨”
유 교수가 제시하는 것은 198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 변화해온 분배 지표들의 추이다. 자료들은 불평등(지니계수)·양극화(ER지수) 지표 모두 1980년대 높은 수준에서 완만한 하락세를 보이다가 노태우 정부 시절인 90년대 초반 상승세로 반전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무엇이 상황의 반전을 가져온 것일까.

 

유 교수에 따르면 노동운동이 활성화되자 대기업이 고용회피 전략을 구사하면서 제조업 고용비중이 감소한 게 한 요인이요, 또 하나는 재벌 기업의 시장지배력이 강화되면서 고용의 절대다수를 감당하는 중소기업 부문이 피폐화되고, 이에 따라 기업 양극화, 소득 양극화가 심화된 탓이다. 유 교수는 “양극화 저변에는 재벌중심 성장과 적대적 노사관계가 핵심 문제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박정희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란 점에서 양극화의 연원은 박정희 시대에서 찾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 역시 박정희 체제의 ‘지속불가능성’에 주목하는데, 그 핵심에는 재벌체제가 자리잡고 있다. “박정희 체제를 붕괴시킨 것은 체제의 최대 수혜자였던 재벌이었다”는 것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박정희 체제의 경제적 성공은 ‘정부→금융→재벌→노동’으로 이어진 수직적 자원배분 시스템 덕이다. 이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재벌의 과대성장과 노동운동의 조직화를 불러 심각한 위협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성공의 역설’이다.

 

특히 차입금에 기초해 외형확장 위주로 이뤄진 대규모 설비투자는 중화학공업분야에서 대기업집단의 급격한 성장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낸 재벌은 1980년대 후반 3저호황 국면을 계기로 독점자본으로 성장하면서 정부와 대립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재벌 합리화를 위한 최소한의 정부개입조차 무력화하면서 국민경제의 왜곡과 축적위기를 가중시키게 되는데, 1997년 외환위기는 자본시장 개방을 통해 축적위기를 돌파하려다 맞게 된 필연적 결과라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문제는 박정희 체제의 가장 큰 수혜자인 재벌의 지배력이 오늘날 박정희 신화를 지탱하는 핵심 동력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재벌은 박정희 신화 속에서 스스로 신화가 됐다”며 “박정희 체제의 진정한 극복을 위해서는 재벌 신화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자본 성장에 가려 노동자의 땀은 외면당해
[박정희 시대 재평가 토론회] 경제분야|산업·노동정책
한겨레 김수헌 기자

 

박헌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박정희 정권이 채택한 재벌 중심의 불균형 성장 전략이 현재까지 우리 경제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막는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비민주적인 절차에 의존하고 재벌 등 특정 세력과 결탁해 성장을 추구하는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이 박정희 정권에서 시작됐으며, 그 유산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정책 선택 범위를 제한하고 사회 시스템의 기능을 저해하고 있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특히 박 교수는 박정희 정권이 시장이나 국유기업을 통한 근대화 전략이라는 대안이 있었음에도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을 선택했고, 이는 정경유착과 대기업-중소기업의 극심한 격차 등으로 이어져 1997년 외환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좀 더 구체적으로 하향식 권위주의, 편중된 산업지원정책, 성장 만능주의, 전투적인 성장 속도 등 네 가지를 박정희 정권의 왜곡된 통제경제정책이 불러온 부작용으로 꼽았다. 하향식 권위주의는 경제발전 초기 단계에서는 효과적이었지만, 경제성장과 더불어 시민들의 의식이 높아지고 정치적 역량이 강화되면서 오히려 유연한 혁신과 변화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는 한국 경제의 경직과 불안정을 야기했고, 재벌의 문어발식 팽창과 더불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심각한 불균형을 낳았다는 게 박 교수의 분석이다. 이와 함께 재벌을 비롯한 특정 경제집단에 편중된 산업지원정책은 정실주의와 정경유착으로 이어졌다. 성장만능주의와 전투적인 성장속도에 대한 집착은 사회적 비용을 무시한 채 재벌과 결탁해 급격한 성장만을 추구하는 전략으로 나타났고, 그 결과 일반 시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소수가 성장 이익을 독점하는 시스템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윤진호 인하대 교수는 박정희 시대에 경제발전을 실질적으로 담당했고,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서기도 했던 노동자·농민·도시서민 등 ‘민중세력’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박정희 시대를 찬양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비판적인 학자들도 당시 민중세력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다는 게 윤 교수의 평가다. 윤 교수는 “박정희 시대에 노동자 계급은 양적, 질적 성장을 통해 역사의 주체로 등장했다”며 “수출 제일주의를 위해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노동운동 억압정책을 버리지 못했던 박정희 정권은 성장해가는 민주적 노동운동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정권의 붕괴를 가져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김수헌 기자 minerva@hani.co.kr

 

 

압축성장 뒤편 땅값 100배·물가 12배 폭등
[박정희 시대 재평가 토론회] 경제분야|농업·물가·외자정책
한겨레 김수헌 기자

 

이정우 경북대 교수는 박정희 집권기 동안 땅값과 물가 폭등을 실증적으로 입증하면서, “박정희 정권이 경제를 구했다”는 주장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박정희의 집권기인 1963년에서 1979년까지 16년 동안 전국의 땅값 총액은 3조4000억원에서 329조원으로 100배나 폭등했다. 연평균 상승률은 33%에 이른다.

 

또 1953년에서 2007년까지 54년 동안 땅값 총액은 1만 배 넘게 폭등했는데, 전체 상승분 가운데 절반이 넘는 50.5%가 박정희 정권 때 이뤄졌다. 물가의 경우도 박정희 정권 때 11.8배가 올랐고, 연평균 상승률은 14.7%를 기록했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는 “박정희식 경제개발이 땅값과 물가를 폭등시켜 후대에 큰 부담을 안겼다”며 “독재가 경제를 살렸다는 속설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석곤 상지대 교수는 박정희 정권의 성장전략을 지칭하는 ‘압축성장’이라는 표현에 빗대, 박정희 시대는 한국 농업에 ‘압축쇠퇴’의 시기였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자원배분의 우선권은 제조업 분야에 집중됐고, 특히 1960년대 농업구조개선 논의가 흐지부지되면서 농업의 자립기반은 훼손됐다”며 “가격지지 정책에 연명하다가 이후 급속하게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고 분석했다.

 

박정희 정권의 외자 관리 정책에 대해서는 유철규 성공회대 교수가 “외국자본을 사실상의 국가보증으로 조달했고, 원리금 상환위기에 처했을 때는 국민경제 전체가 위험을 부담해주는 식으로 안정적인 외자 관리가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유 교수는 또 “외자조달과 관리 차원에서 박정희 정권의 정책은 비금융기업에 대한 규제와 지원 간에 최소한의 제도적 균형은 갖춰져 있었다”며 “하지만 1980년대 형식적 자유화 과정에서 이런 균형이 본격적으로 무너지는 바람에 현재 기업 지원제도는 규제 없는 일방적인 지원으로 전락해 있다”고 설명했다. 김수헌 기자

 

기사등록 : 2009-11-09 오후 09:16:17 기사수정 : 2009-11-09 오후 09:17:18
한겨레 (http://ww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