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한겨레] 본말 전도된 학술진흥재단 평가

2010. 3. 4. 10:17discourse & issue

 

 

본말 전도된 학진 평가…‘논문 아닌 학문’을 허하라
천정환 교수 ‘신자유주의 대학체제’ 비판
* 학진 : 학술진흥재단
한겨레 이세영 기자 김종수 기자

 

 

 

 

 

“비슷한 문체, 비슷한 구성을 가진 많은 글들이, 거의 똑같은 투고 규정을 가진 학회지에 의해 대량생산된다. 논문이 양산되니 인문학은 발전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글쓰기의 다른 존재방식인 ‘비평’과 ‘책’을 죽이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한 40대 소장 국문학자가 2000년대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지배적 지식생산 기제로 자리잡은 ‘학진(학술진흥재단) 시스템’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3일 연세대 국학연구원이 일본 도쿄대 철학연구센터와 함께 마련한 국제워크숍에서 ‘신자유주의 대학 체제에서의 글쓰기와 학진 시스템’이란 글을 발표한 천정환(41·사진) 성균관대 교수다. <근대의 책 읽기>(2003) <대중지성의 시대>(2008) 등의 저작을 통해 한국 지식문화의 형성과 변천 과정을 추적해온 그는 이번 글에서 대학의 학문 활동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마련된 국가기관의 평가-지원 시스템이 연구자의 성찰적 글쓰기와 자유로운 지식 생산을 어떤 형태로 억누르고 규율하는지를 파헤쳤다.

 

학진 등재지 논문 숫자로 학문성과 판단
전문가집단에 의한 평가방식 정착했지만
획일적 글쓰기로 다양한 지식생산 억눌려

 

천 교수는 학진 시스템을 ‘학술진흥재단(지난해 한국연구재단으로 통합)의 각종 평가-지원 체계와, 평가의 근거가 되는 학술지 논문 쓰기 등의 제도·관행’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 시스템은 대체로 2000년대 초 본격 도입된 뒤 연구 결과물에 대한 동료 전문가 집단의 합리적 평가체계를 정착시켜 정교한 학문적 글쓰기를 가능케 하고, 객관화된 평가 결과에 기초해 대학과 연구자의 학문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대학사회에 만연했던 정실·연고주의의 폐단을 바로잡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과거 교수사회 은어 가운데 ‘주바야테’란 말이 있었다. ‘낮에는 학교 나와 바둑 두고, 해 지면 집에 가 텔레비전 보며 안빈낙도한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놀고 먹는 교수들이 많았다는 얘기인데, 요즘은 어떤가. 주바야테, 철밥통으로 불리던 정규직 교수들도 열심히 논문을 쓴다. 이 점은 ‘신자유주의 대학’이 가져온 긍정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평가-지원 시스템이 연구자들의 학문 세계를 평균화·획일화하는 방향으로 이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젊은 연구자 집단에서 한층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4년 기한의 연구교수 자리라도 확보해 안정된 연구활동을 이어가려면 학진의 등재 학술지에 될수록 많은 논문을 실어 자신의 연구실적과 학적 능력을 계량화된 수치로 입증해야 하는 현실과 무관치 않다. 이 상황에서 논문이 아닌 다른 형식의 글을 쓰는 데 공력을 쏟았다간 ‘학문적 시민권’ 얻기를 포기한 사람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천 교수는 “(논문에 전형적인)서론-본론-결론의 구성과 국문초록-영문초록-국문 핵심어-영문 핵심어 등의 액세서리는 거추장스러운 현실이지만, 점점 글쓰기의 본연을 잊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고 자조한다.

 

이런 전도된 현실은 대체 어디서 연유하는가. 천 교수가 볼 때 그것은 정부의 대학정보공시 제도와 거대언론의 대학 평가에 의해 부추겨지는, 대학 간 서열 경쟁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국가와 기업, 언론은 왜 이런 경쟁에 개입하는가. 천 교수에 따르면 대학의 서열 경쟁이 “(국가-자본-언론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지배동맹 전체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대학 평가는 지배동맹의 구성원들이 자기존재를 과시하고, 출신 대학에 따른 위계를 확대 재생산해 기존의 지배구조를 공고화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평가 결과에 따라 국가·기업의 지원 규모와 대외 평판도가 결정되는 상황에서, 대학 당국이 취할 수 있는 선택비용이 적게 드는 평가 부문의 성과를 높이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학들이 등재지 발표 논문 편수를 임용·승진·포상 등과 연계시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천 교수는 되묻는다. “글쓰기의 목적이 자기존재를 성찰하거나 ‘사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심사’를 통과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게 과연 진정한 글쓰기인가.” 그가 볼 때 이것은 ‘타락’이다. 문제는 그 타락이 “윤리와 혼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 교수는 이 암울한 상황을 타개할 묘책을 제시하진 않는다. 그의 말대로 “당장 제도 전체를 극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신 천 교수는 지금의 경쟁체제가 만들어낼 ‘양가적 상황’에 기대어 보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극심한 경쟁체제는 “한편으로 학문세계를 황폐화하고 고통을 증대시킬 것이지만, 다른 한편 제도가 가진 힘을 희화화하고 무화할 다양한 상황도 연출해낼 것”이란 판단에서다. 그 결정적 상황이 도래할 때까지 자유롭고 비판적 글쓰기가 가능한 ‘제도의 외부’를 마련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쟁과 논문식 글쓰기가 지배하는 ‘제도의 내부’에서도 지금보다 한층 합리적인 방향을 추구하거나 인간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시도를 멈춰선 안 된다고 천 교수는 말한다. 학진 시스템의 내부 역시 “인간 대 화폐, 인간 대 신자유주의란 가치가 맞붙는 인문학의 최전선”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다.

 

글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사진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기사등록 : 2010-03-03 오후 07:38:23
한겨레 (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