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호를 보며, 세상을 대하는 자세를 바꿔야 한다.

2011. 9. 4. 15:42everyday photo

 

충주호에서 내려다 본 전경을 사진에 담았다. 자연이 주는 편안함과 경이로움은 우리의 작음을 보여주기도 하고 공존의 아름다움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인간을 넉넉하게 받아주었던 자연 앞에서 인간들은 응석을 부려댔다. 오만한 이성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절대지식의 함정 속에서 말이다. 그런 인간의 전지주의적 오만은 수많은 인간 살상으로 나타났고, 이제는 드디어 자연파괴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이 없는 자연은 있는 그대로 모자란 곳을 채워주고 가득 차인 것은 덜어주는 그 고유의 자연미덕으로 지구를 평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의 등장으로 가득 차인 곳을 착취하고 그곳이 비워지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착취하는 그야말로 착취의 광란시대를 열어버렸다.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사임에도 인간은 무엇이든 알 수 있다는 그 오만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렇게 스스로를 파괴하며 앞으로만 갔다. 성찰이라는 그 기괴한 용어도 어찌보면 이성의 찌꺼기일지 모른다. 이성을 부르짖으며 권력에 열중하는 그 권력자들의 이야기는 인간사의 위계를 구조화했고, 끊임없는 자연파괴의 역사로 채워졌다.

 

쓰나미가 와서 수많은 인명을 파괴하고, 원자력의 괴물이 수많은 인명을 파괴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인간들은 그제서야 공존의 미덕과 자연의 문제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유전자를 변형하고 자연을 착취하며 성장과 발전의 신화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세상을 대하는 자연을 대하는 자세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런 변화없이 공존과 미덕, 미래는 존재 불가능의 영역이 될 것이다.

 

충주호의 두 풍경,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자연의 풍광, 그리고 인간과 결합되어 쓰레기 더미로 변해버린 충주호의 풍광...이런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탈피해야 한다. 무엇이든 인간이 손을 대면 변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려야 한다. 한강을 바꿔 르네상스를 만들겠다는 발상...르네상스를 통해 인간을 발견했고 르네상스는 계몽으로 이어졌다. 이성의 발견, 그 이후 진보와 발전의 신화로서 산업화와 위계적 관료체제의 시대가 만들어졌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지성주의의 시대를 탈피해야 한다. 한강의 르네상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한강의 파괴이며 뒤이은 인간에 대한 재앙이다.

 

 

 

한강에게 물어보자. 콘크리트로 장식한 모습이 예쁜지? 아니면 흙과 나무, 풀과 숲으로 치장한 모습이 예쁜지?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올 후보들은 꼭 한강에게 물어봐야 한다. 어떤 모습이 예쁜지. 항상 새로운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 새로운 것이 새로워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경험 속에서 얻어진 결과다. 현실이 즐겁지 않다는 축적된 경험이 새로운 것을 요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는 그냥 새로운 것을 얘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의 경험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변해버린 자연과 사물을 대변하는 것이다. 서울시장 선거가 서울시민들의 지속적인 불만의 경험과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며, 성장과 발전이라는 도그마에 의해 망가진 자연과 사물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권자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깃발들고 내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오만한 전지주의(全知主義)적 후보가 아닌 유권자의 경험을 존중하고 그것을 대변하는 후보를 뽑는 것이다. 그래야 세상이 편안하다. 뭘 많이 하겠다는 것은 참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서울시민 스스로가 알아서 그들의 삶을 만들어가게 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무위이치(無爲以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