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재벌의 나라] 과도한 부의 집중

2012. 2. 13. 11:22discourse & issue

 

 

경제

경제일반

장관이 총수 만나자고 하면 “급이 안맞아서…”

등록 : 2012.02.12 19:50 수정 : 2012.02.13 09:52

5대 재벌 경영지표 (※클릭하면 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0.1% 재벌의 나라
①과도한 부의 집중
1986년 가을 골프장 풍경
신현확 전총리, 이병철 회장에 허리 숙여서 인사
경제권력, 정치권력 위에 올라서며 흔든 지 오래

1986년 가을 ‘안양 컨트리클럽’(현 안양베네스트 골프클럽). 신현확 삼성물산 회장과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은 이병철 삼성 회장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이 회장은 골프 카트에 탔고, 신 회장과 홍 회장은 카트를 뒤따라 걸었다. 홍 회장은 이 회장과 사돈 관계, 신 회장은 1980년 국무총리에서 물러났다가 얼마 전 영입된 처지였다.

 

삼성과 가까운 한 대학교수는 “총리를 지냈던 분이 재벌 총수에게 허리를 굽히는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재벌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며 이 일화를 소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시절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치 권력과 재벌 권력 사이 힘의 저울추는 이미 오래전부터 재벌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삼성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는 저서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이렇게 썼다. “노무현 정부에서 삼성에 불리한 것은 거의 없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제안한 정책을 정부가 채택한 사례는 아주 흔했다. 이학수(삼성 전 부회장)는 아침 모임만 하루 두번씩 가졌다. 호남 출신 주요 인사들 대부분이 삼성과 인연을 맺게 됐다. 정권이 바뀌어도 재벌이 주요 인맥을 장악하는 데는 1년이면 충분했다.”

 

실제로 매년 열리는 ‘호암상’ 시상식에선 각료회의를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 연출된다. 지난해 6월 열린 시상식엔 김황식 총리 외에 현승종·이홍구·이한동 전 총리, 이귀남 법무부장관, 이현구 대통령 과학기술특보, 김도연 국가과학기술위원장 등 주요 장관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꾸로 총리나 장관이 총수를 불러 만나기는 힘들다. 현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과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해 동반성장을 설득하기 위해 재벌 총수와의 연쇄 회동을 제안했다가 몇몇 총수와의 비공개 만남에 만족해야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급이 안 맞는데 어떻게 공개 회동을 하나”라며 “대통령 주재 자리가 아니면 총수가 움직인 사례는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0년 이후 장관급 인사가 총수와 공개 회동을 한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다.

 

관료 사회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고위 관료 집단에 대한 재벌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고위 관료들의 재벌기업행은 이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송광수·이명재 전 검찰총장은 두산, 오세빈·이태운 전 서울고법원장은 현대차에서 각각 사외이사로 몸을 담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총괄했던 김현종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삼성전자 사장(해외법무 담당)으로 갔다가 지난해 자리를 옮겼다.

 

꼼짝 못하는 관료사회


평소 인맥관리 길들여져…퇴직 뒤엔 대기업행
규제 얘기 꺼냈다간 “경제 거덜내려 하나” 질책

 

경제 부처는 더 심하다. 경제정책 자체가 재벌 이해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 등 몇몇 대기업의 주가가 주식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이들의 수출 실적이 무역수지와 외환시장에 바로 영향을 주다보니 경제 정책 자체가 이들 위주로 짜이는 것이다. 공정위 한 국장은 “부처 간 협의 과정에서 대기업 집단(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문제 삼으려고 하면 매번 ‘우리나라 경제 거덜내려고 하냐’는 식의 반응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고위 관료들이 이미 재벌기업에 의해 인맥관리를 당하고 있는데다 스스로도 재벌기업이 흔들리면 나라 경제에 큰일이 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요즘 관가에서는 재벌기업으로 갈 자리를 찾는 관료는 있어도 재벌 개혁에 손대려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게 현실이다.


이동걸 전 금융연구원장(현 한림대 객원교수)은 “재벌이 배 불러야 경제가 좋아진다는 시각은 현 정권 들어 한 걸음 더 나갔을 뿐이지 그 이전에도 주류를 형성했다”며 “(현 경제구조상) 재벌 개혁은 단기적 경제 후퇴나 일시적 충격을 감수하고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일반 개인도 재벌의 힘과 영향력 아래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재벌의 행태에 혀를 차면서도 이들 기업에 입사원서를 내려고 구직자들이 몰리는 게 취업시장의 현주소다. 모든 경제 시스템이 재벌 중심으로 움직이고, 중견기업이나 중소기업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다 보니 어떻게든 재벌 기업에 입사하려고 몰려드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1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천재론을 실은 서적 등은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현재 이 회장의 일대기와 경영 철학 등을 다룬 서적만 20권이 넘는다.

 

여론마저도 쥐락펴락


언론, 광고 의존도 커 ‘재벌논리 전파’ 나팔수로
일부 대기업은 전담팀 꾸려 SNS에도 개입나서

 

재벌은 여론의 형성과 향배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형의 힘이다. 10대 재벌은 지상파 3사 방송광고의 20% 이상을 차지한다. 신문이나 잡지도 재벌 의존도가 높기는 마찬가지다. 재벌 광고 없이 생존할 수 있는 언론 매체는 찾아보기 힘든 게 현실이다. 재벌 광고에 의존하는 언론 매체들은 재벌의 전근대적인 세습 경영이나 문어발식 사업 확장에 대한 지적보다 ‘오너 리더십’을 조명하는 등 재벌 체제를 합리화하는 데 많은 힘을 쏟는다.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 정부, 언론 등은 공공연히 재벌의 논리를 전파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대기업이 성장해야 일반 국민이 먹고살 수 있다는 낙수효과(트리클다운) 이론이다. 이 이론은 고용 없는 성장이 계속되면서 실효성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재벌 논리에 포섭된 정책 당국자, 여론 주도층은 계속 이를 전파하고 있다. 청년실업과 사회양극화 대책 등은 정부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김민기 숭실대 교수(언론홍보학부)는 “특정 대기업에 대한 광고 매출 비중이 확대됨에 따라 언론이 광고주의 눈치를 보게 되고 결과적으로 여론 왜곡이 빚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최근 일부 대기업들이 수십명씩 전담팀을 꾸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개입하는 것이 여론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총수 중대 범죄에 법원은 으레 ‘집유’

등록 : 2012.02.12 19:44 수정 : 2012.02.12 22:20

0.1% 재벌의 나라

 


①과도한 부의 집중
배임 이건희엔 “회사 발전에 상당히 기여”
횡령 정몽구엔 “경제적 파급효과 1위라서”
분식회계 최태원엔 “국가 경제 이바지 해서”
‘떡값’ 관리에 거대로

특별검사의 기소로 법정에 선 이건희(70) 삼성전자 회장은 2008년 10월 임직원들의 명의로 주식을 차명보유해 양도소득세를 내지 않고 증권거래법을 위반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법원은 에버랜드 전환사채(CB)와 에스디에스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자녀들에게 헐값에 넘겨 회사에 손실을 끼쳤다는 이 회장의 배임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했다.

 

그러나 2009년 5월 대법원은 항소심에서 무죄가 됐던 에스디에스 배임 부분을 유죄로 판단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징역형이 3년이 넘어가면 형법상 집행유예를 붙이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회장의 파기환송심에서는 실형이 선고될 거라는 게 법조계의 ‘상식적인’ 관측이었다. 그러나 같은해 8월 서울고법은 파기환송 전 항소심 판결과 똑같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1+1=1’이 되는 희한한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파격적인 이 판결을 두고 “삼성에스디에스의 발전에 이 회장이 상당히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900억원대의 회삿돈을 횡령하고 계열사에 2100억원대의 손실을 끼친 혐의로 기소된 정몽구(74) 현대자동차 회장은 2008년 6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저소득층을 위한 문화시설 건립과 환경보전 사업 △전경련 회원들을 상대로 한 준법경영 강연 등의 ‘이색 사회봉사명령’을 부과하면서 1심의 실형 선고를 집행유예로 낮췄다. 재판부는 “우리나라에서 현대차가 미치는 경제적 파급효과는 1위이며, 정 회장은 현대차의 상징 … 현대차가 경제에 미칠 영향이 꺼려진다”고 밝혔다.

 

수백억원의 회삿돈을 빼돌려 선물투자에 유용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은 최태원(52) 에스케이(SK) 회장은 지난달 불구속 기소됐다. 2003년 분식회계와 배임 혐의로 구속 기소됐던 최 회장은 2008년 8월 사면된 직후에 재범을 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수사팀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검찰 수뇌부가 ‘동생인 최재원 수석부회장이 횡령 혐의로 구속 기소됐으니 최 회장은 선처하자’고 주장해 그의 기소 직전까지 검찰 내부에서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법조계에서는 법원·검찰의 이런 비상식적인 판결·수사가 거대 로펌을 통한 교묘하고 은밀한 로비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거대 로펌이 법원·검찰 출신의 유능한 ‘전관’들을 해마다 직급별로 영입해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해놓고, 사건이 들어올 때마다 담당 판검사와 친밀한 변호사들을 투입해 ‘선처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드러난 ‘삼성 떡값’처럼 불법적이고 위험성 높은 ‘직접 관리’는 이미 옛날 방식이고, 거대 로펌을 이용한 ‘합법적인 로비’가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판사를 지낸 한 중견 변호사는 “거대 로펌은 사건 수임 뒤 담당 판검사와 매우 친밀한 변호사를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 붙여놓는다. 판검사들은 퇴임 뒤 거대 로펌에 영입되기를 희망하거나 법조계에서 자신들의 평판이 저하되는 것을 두려워해 거대 로펌의 요구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며 “거대 로펌이 합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법조계의 구조적인 문제를 손질해야 법원·검찰의 재벌 봐주기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0.1% 재벌, 서민의 삶 포위하다

등록 : 2012.02.12 19:14 수정 : 2012.02.13 09:00

 

 

김황식 국무총리, 허창수 전경련 회장, 이건희 삼성 회장, 김승연 한화 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왼쪽부터)이 지난해 3월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회장단 만찬에서 정몽구현대기아차 회장의 제안으로 건배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재벌개혁 시리즈

삼성전자 갤럭시에스(S)2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깼다. 회사원 김서민씨는 씨제이(CJ)의 햇반과 김으로 아침을 때웠다. 제일모직의 로가디스 정장을 입고 엘지(LG)패션의 해지스 코트를 팔에 걸친 김씨는 롯데 레쓰비 캔커피를 들고 주차장으로 나섰다. 밤새 내린 눈 때문에 김씨는 현대로템이 운영하는 지하철 9호선을 타고 출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지하철은 스마트폰에 빠진 승객들로 초만원이다. ‘에스케이(SK)텔레콤의 3세대(G) 통신망이 부쩍 안 터지는데, 4세대 엘티이(LTE) 엘지유플러스로 바꿔볼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 회사에 도착했다. 삼성전자 컴퓨터를 켜고 일과를 시작했다.

 

입고 먹고 쓰고 보고 듣고…
재벌 제품·서비스가 지배

30대 재벌 연매출 1134조
국내총생산의 96.7% 달해

부의 집중 넘어 사회 장악
무소불위 권력자로 고착화

 

아내 박선이씨는 엘지전자 진공청소기를 들고 집안 청소를 마쳤더니 벌써 오전이 끝나간다. 친구들과 점심때 만나기로 한 박씨는 남편이 두고 간 현대자동차 쏘나타의 시동을 걸었다. ‘기름이 떨어졌네.’ 집 근처 지에스(GS)칼텍스로 갔다. 점심은 씨제이푸드빌의 ‘비비고’에서 먹고, 신세계 스타벅스에서 수다를 떨었다. 이마트에 들러 현대카드로 결제하고 저녁거리를 장만했다. 삼성물산 래미안아파트에는 한진택배에서 두고 간 물건이 있었다.

 

일반 개인의 일상에서 재벌그룹은 공기와 같은 존재다. 어디를 가도 이들의 제품과 서비스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재벌의 수가 많은 것도 아니다. 적으면 10개, 많으면 30개 정도다. 이들이 개인의 삶을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오늘날 재벌 없는 대한민국은 상상할 수 없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이 분석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30대 재벌그룹의 전체 자산은 1460조5000억원에 이른다. 국내총생산(GDP) 1172조원보다 300조원 가까이 많다. 연간 매출은 1134조원으로, 국내총생산의 96.7%에 이른다. 1980년부터 2011년까지 30대 재벌의 자산은 70배, 매출은 48배로 불어났다. 1990년대 들어 급상승한 30대 재벌의 매출액은 2000년 들어 상승 속도가 주춤하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 다시 급증했다. 재벌(총수)의 부가 곧 국부가 됐고, 재벌 중심 사회체제는 더욱 굳건해지고 있다.

 

삼성·현대차·에스케이·엘지·롯데 등 5대 재벌그룹으로의 경제력 집중은 훨씬 심각하다.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의 분석을 보면, 국내총생산에 견준 5대 그룹의 매출액 비중은 2001년 49.5%에서 2010년 55.7%까지 늘어났다. 1980~90년대 2세 승계가 이뤄진 뒤 갈라져 나온 친족그룹까지 포함하면 이들의 몸집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다. 삼성·신세계·씨제이·보광·한솔 등 범삼성그룹, 현대차·현대백화점·현대중공업·성우·한라 등을 아우르는 범현대그룹, 엘지·지에스·엘에스(LS)·희성 등 범엘지그룹을 포함한 5대 재벌그룹의 국내총생산 대비 매출액 비중은 2001년 59.0%에서 2010년 70.4%까지 커졌다. 인구의 0.1%도 안 되는 재벌 총수와 일가친척들이 나라 경제력의 70%를 쥐고 흔드는 셈이다.


부의 집중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재벌은 일반 국민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정치·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막강한 지배력을 구축해왔다. 그 반대쪽에는 재벌에 짓눌린 99.9%의 사람들이 있다. 사라져가는 골목상권을 바라만 보는 자영업자들, 자투리 일감마저 뺏긴 중소기업들, 독과점과 담합으로 호주머니를 털리는 소비자들, 매일 구조조정의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그들이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대통령도 손못대는 재벌 ‘권력은 이미 시장에…’

등록 : 2012.02.12 19:42 수정 : 2012.02.12 21:59

 

 

 

0.1% 재벌의 나라
①과도한 부의 집중

김대중 정부 ‘5+3 재벌정책’ 경제상황앞에 무력화
노무현 정부 개혁의지 초반 반짝이다 삼성에 기울어
이명박 정부 출총제 폐지 등 되레 재벌에 가까이

 

“권력은 이제 시장에 넘어간 것 같다.”

지난 2005년 5월16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의 발언 취지는 정부도 시장을 공정하게 관리하겠지만, 대기업 스스로 중소기업과 상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이 발언은 참여정부가 대기업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고백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았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기 재벌개혁에 적극적인 것으로 보였지만, 6개월 만인 2003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선언하면서 ‘성장’에 무게중심을 두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노무현 정부 당시 최대 재벌정책 이슈는 공정거래법 개정(출자총액제한제도 강화)과 금융산업구조조정법(금산법) 개정이었다. 금산법 개정은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삼성카드의 에버랜드 지분 매각과 이어져 있었다. 박영선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 금산법 개정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박 의원은 2005년 재정경제부 국정감사에서 “금산법 정부 개정안에 삼성쪽 주장만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덕수 경제부총리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김현미·문학진 의원 등도 거들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도,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박 의원을 지지하는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초기 김종인 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이 경제부총리로 거론되던 때가 있었다. 유종일 현 민주통합당 경제민주화특위 위원장도 경제부처 장을 맡을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그러나 대표적인 재벌개혁론자였던 두 사람은 참여정부에서 아무런 공직을 맡지 못했다. 두 사람이 배제된 배경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는 것이 당시 열린우리당 개혁파 의원들의 공통된 증언이었다.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를 삼성으로 꼽았다.

 

노무현 정부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삼성경제연구소로부터 많은 정책제안과 보고서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보고서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보고됐던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관한 어젠다’라는 400여쪽 분량의 책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무현 정부가 주창한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론’과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라는 의제도 삼성연이 제안한 것이다. 삼성연은 노무현 정부 시절 이광재·서갑원·백원우 등 당시 친노무현계의 핵심들이 모여 있던 ‘의정연구센터’와 자주 경제정책토론회를 열었다. 이런 토론회와 보고서를 통해 자연스럽게 삼성의 논리가 정부와 여당의 핵심들에게 전파될 수 있었다.

 

역대 정권에서 가장 강력하게 재벌개혁이 추진됐던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다.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이 계기가 됐다. 대기업들의 무절제한 문어발식 확장이 구제금융 사태의 근본원인이라는 공감대가 이뤄진 덕분이었다. 김대중 후보 당선 직후 유종근 대통령 경제고문 등이 아이엠에프 실무진들과 협상하면서 김대중 캠프에서 그려왔던 재벌개혁안이 아이엠에프를 통해 실현되도록 하는 방법 등을 썼다. 김대중 당선자도 직접 대기업 총수들과 만나 의견을 나눴다. 그 결과가 1998년 1월 김대중 당선자와 대기업 총수들이 합의한 △경영투명성 제고 △상호보증채무 해소 △재무구조 개선 △업종 전문화 △경영자 책임강화 등 5개항이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1999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제2금융권 경영지배구조 개선 △순환출자 및 부당내부거래 억제 △변칙상속 차단 등 3개 원칙을 내세웠다. 당시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김 대통령은 ‘재벌의 선단식 경영을 끝내야 한다’고 선언했다. 언론에서는 이를 사실상 ‘재벌해체 선언’이라고 평가했다. 이것이 김대중 정부 재벌정책의 상징인 ‘5+3’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도 5대 과제 가운데 김대중 정부가 끝날 때까지 성공적으로 지켜진 원칙은 상호지급보증 해소와 재무구조 개선 두 가지뿐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경제상황이 어려워졌다’, ‘새로운 성장동력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등의 재계 건의를 청와대와 여당이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점차 무력화된 탓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재정경제부 세제실장부터 국세청장, 행정자치부·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낸 이용섭 민주통합당 정책위의장은 “경제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정해진 정책과 원칙은 예외없이 실행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