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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칼의 날 |
사망아동 이름으로…영 경찰, 시민단체서 ‘암약’
1968~94년 시위전담반 요원들
위장잠입해 프락치 활동 드러나
1990년 영국에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운동단체에서 활동했던 클레어는 3년째 알고 지내던 ‘존 바커’라는 동료 운동가와 사랑에 빠졌다. 바커는 더없이 다정했다. 그는 클레어에게 ‘저물녘 함께 노을을 바라보는 사이좋은 부부’로 늙어가자고 했다. 그러나 2년 뒤 바커는 뚜렷한 이유 없이 급작스레 클레어 곁을 떠났다. 클레어는 그의 행방을 추적했으나 소용없었다. 바커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국립사망기록보관소를 찾은 클레어는 기절할 뻔했다. 바커가 남겨두고 간 신분증 복사본에 기록된 부모 이름, 출생지 주소 모두 같았지만, 사망자 서류 속 바커는 이미 1968년 8살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이였다. ‘편집증 환자’라는 말까지 들어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클레어는 결국 2010년에야 ‘애인 존 바커’는 ‘짐 다인스’라는 영국 런던경찰국 소속 ‘특별시위전담반’ 요원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가디언>은 3일 런던경찰국이 1968~1994년에 ‘특별시위전담반’ 요원들을 이미 사망한 영유아 80여명의 신원을 훔쳐 프락치 활동을 벌이게 한 사실을 폭로했다. 요원들은 죽은 아이들의 인적 사항을 이용해 운전면허증, 국가보험 번호를 받았으며 반자본주의 시위단체부터 우파그룹까지 여러 정치사회단체에 잠입했다. 이들은 다인스가 클레어에게 했듯이, 여성 동료들과 연애를 하며 신뢰를 얻고 정보를 빼냈다. 요원들은 자신들이 도용할 죽은 아이들의 기록을 찾아다니는 행동을, 이와 비슷한 내용의 스릴러 소설 <자칼의 날>(1971년 작)에 빗대 ‘자칼의 도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네살에 죽은 ‘피트 블랙’이라는 아이의 이름을 훔쳐 썼던 한 요원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위장생활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죽은 아이의 부모가 이런 사실을 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죄책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런던경찰국은 이에 대해 공식 조사에 들어갔으며 “현재는 이런 관행이 없다”고 해명했다. 이처럼 죽은 사람의 신분을 훔치는 관행은 사망기록이 전산화된 1990년대부터는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런던경찰국은 수사 결과 2003년에도 이런 범행을 저지른 사례를 발견했다. 특별시위전담반은 2008년 해체됐다. 영국 의회 산하 내무위원회는 5일 청문회를 열어 신분증을 도용한 요원들과 사적인 관계를 맺은 여성들의 증언을 들을 예정이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