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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구(72) 유닉스전자 회장이 헤어드라이어 부문 세계 히든챔피언에 오른 성공 비결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객의 눈’에 맞춰 세심하게 살폈다는 점을 강조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중소기업 강국의 길
1부 히든 챔피언에서 배운다
④ 한국의 히든 챔피언
대체적으로 대기업에 우호적인 경영 환경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작지만 강한’ 중소기업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소수의 강한 중소기업(강소기업)들이 있다. ‘한국형 히든챔피언’으로 꼽히는 유닉스전자의 이충구 회장(72), 시몬느의 박은관 회장(58)을 통해 국내 강소기업 탄생의 요건을 듣고 앞으로 과제에 대해 물었다. 사업 초기부터 세계 시장을 목표로 두는 넓은 시야와 자신있는 분야에 깊이 있게 매진하는 전략 등 기본 요건을 충실히 지켜온 점은 어느 나라의 히든챔피언과도 공통된 특징이다.
핸드백 ‘외길’ 박은관 시몬느 회장
창업 직후 미국행, 명품 계약 따내
■시작부터 세계 시장을 무대로 지난달 25일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시몬느 본사에서 만난 박은관 회장은 핸드백과 인연을 맺게 된 1979년을 회상했다. 연세대 독문학과 졸업 뒤 “더 큰 세상을 보겠다”는 생각으로 분야와 상관없이 수출회사를 찾던 그는 ‘청산’이라는 핸드백 제조업체에 입사했다. 신입사원 때 이탈리아 출장에서 만난 ‘무지개빛 다양한 색상의 바지’는 그가 지금까지 패션 사업에 매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충격이었죠. 남자 의상이 그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으니까요.”
1987년 자신의 회사 창업 직후 박 회장은 바로 미국 뉴욕으로 날아갔다. 당시 최고 유명세를 타던 디자이너 도나 카란의 핸드백 브랜드인 ‘디케이엔와이(DKNY)’의 납품 계약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미국 백화점에서 그 브랜드 가방 7개를 산 뒤 이탈리아산 가죽과 부자재로 똑같이 만들어 회사 구매담당자를 만났습니다. 품질에는 만족하면서도 ‘우리 가방은 메이드 인 이태리이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누가 메이드 인 코리아를 사겠냐’고 퇴짜를 놓더군요.” 박 회장은 물러서지 않고 “이탈리아 제품도 시작이 있었을 것 아니냐. 물량의 1%만 실험적으로 달라”고 요구했고, 그렇게 거래가 시작됐다.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시몬느는 현재 핸드백 제조자설계생산(ODM) 방식의 미국 시장 30%, 세계 시장 8%를 점유하는 1위 업체로 성장했다.
박은관(58) 시몬느 회장이 사업 초기부터 세계 최고 브랜드를 겨냥해 제조자설계생산(ODM) 방식의 ‘명품 핸드백’을 만들었던 경험을 말하고 있다. 권오성 기자 |
드라이어 1위 유닉스 이충구 회장
미국 미용사 ‘맞춤형 제품’ 개발
■고객에 대한 집중에서 비롯한 전문성 1978년 설립된 유닉스전자는 히든챔피언 개념 창시자 헤르만 지몬 교수가 직접 꼽은 한국의 강소기업 가운데 하나다. 헤어드라이어 기기 부문 국내 1위이자 세계시장 점유율 25%가량를 차지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원효로 유닉스전자 본사에서 만난 이충구 회장은 성공의 비결로 “제품을 사용자 입장에서 세심하게 살피라”고 조언한다. 미국 헤어디자이너들이 해마다 뽑은 ‘최고의 드라이어’로 6번이나 선정된 자체 브랜드 ‘치(CHI)’의 성공 과정에 그 내용이 녹아 있다. “2003년 직접 미국을 돌며 보니 미용사들이 무거운 드라이어 때문에 어깨 질환으로 고생하더군요. 그래서 당시 유명 제품이었던 이탈리아제 드라이어의 절반 무게로 만들었습니다.” 유닉스전자는 잇따라 시끄럽던 미용실에 착안해 소음을 줄인 제품, 임산부 디자이너의 건강을 생각해 전자파 차단 제품들을 내놓으며 시장의 사랑을 받았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자신감은 ‘고급화 전략’의 바탕이 된다. 박은관 회장은 “시몬느는 경쟁사에 비해 10%가량 더 비싸게 받지만 전혀 문제가 없다. 그만큼의 가치를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품질은 물론이고 신뢰까지 철저하게 보장하는 ‘전문가 정신’을 들었다. 2011년 납기를 맞추기 위해 제품을 비행기로 실어 보내느라 들어간 비용만 130억원이라고 했다. 유닉스전자는 최근 5년 사이 중국의 저가 제품 공세 등으로 수세에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사정이 바뀌고 있다고 이 회장은 말한다. “중국으로 거래선을 바꿨던 일본 샤프가 최근 우리와 다시 거래를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와 올 5~6월부터 공급할 예정입니다. 가격은 30~40%가량 높지만 품질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죠.”
지몬 교수는 히든 챔피언의 두 기둥으로 ‘시장 집중’과 ‘세계화’를 꼽는다. 자신이 확실하게 잘할 수 있는 분야로 좁게 시장을 정의하는 대신, 해당 분야에서는 세계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는 전략이다. 이는 유닉스전자와 시몬느의 사례에도 정확히 일치한다.
세계화·시장집중이 성공 비결
긴 안목으로 준비된 ‘무한도전’
■작기 때문에 강할 수 있다 이충구 회장은 유닉스전자의 강점에 대해 “작은 기업이기 때문에 끌어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미국에 진출할 때 직원들과 함께 1년 12번씩 미국을 찾았습니다. 결정권자가 현장을 알고 담당자와 직접 소통할 때 불필요한 절차와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죠. 대기업이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상명하달식의 민첩함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사업 초기 직원들이 새로운 제안을 내놓아 투자했다가 실패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 너무 문책하면 직원들은 다시는 제안을 하지 않게 되죠. 결정을 내리고 나면 책임은 내가 진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두 기업은 지속적으로 도전에 나서지만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무리하지 않는다. 시몬느는 지난해 8월 자체 브랜드 ‘0914’를 선보였다. 바탕에는 그동안 쌓인 디자인 감각과 노하우가 있다. 하지만 박 회장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세계 유명 브랜드와 겨루는 국산 브랜드로 성장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패션 제품의 특성상 문화적 역량과 국제적 감각의 축적이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시몬느가 브랜드 출시에 발맞춰 서울 신사동에 세계 최초의 핸드백 박물관 ‘백스테이지’를 연 것도 그 때문이다. 유닉스전자는 드라이기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 마사지 기기 등 연관 가전제품과 전문 미용재료 쇼핑몰인 ‘유닉스뷰티’ 등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더 많은 국내 히든챔피언 탄생의 요건으로 이 회장은 공정한 경쟁과 준비된 창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국내 시장도 세계화하면서 해외 대기업들이 중소기업 영업 인력을 빼가는 사례 등이 늘고 있습니다. 인력 유출을 막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는 예비 창업자에게 “이런 환경에서 성공하려면 누구나 베낄 수 있는 제품으로는 안 된다. 한 분야에 최소한 10년을 투자한다는 계획으로 국내·세계 시장을 아우르는 충분한 조사가 핵심”이라고 조언했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중소기업 육성 ‘컨트롤타워’가 없다 |
정부주도로 유사정책 중복 없애야
양보다 질로… 패러다임 전환 필요
국내 히든챔피언 육성 정책은 헤르만 지몬 교수의 히든챔피언 개념이 확산된 뒤 최근 2~3년 사이에 정부와 은행 등에서 앞다퉈 신설됐다. 그만큼 늦은 셈이다. 전문가들은 개별 정책마다 도입 취지는 공감하지만, 서로 연계해서 상승작용을 낼 ‘컨트롤 타워’가 없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정부의 대표적인 육성 정책은 주무 부처인 중소기업청의 ‘글로벌 강소기업 육성 사업’과 옛 지식경제부(지금 산업통상자원부)의 ‘월드클래스 300’을 들 수 있다. 정부조직법 개편에 따라 중견기업 정책이 산업부에서 중기청으로 이관되면서 두 정책은 중기청 관할로 최근 통합됐다. 각각 2010년, 2011년 첫 대상 기업을 선정해 시행에 들어갔으며, 지금까지 선정된 기업은 각각 287개와 67개다. 여기에 국책은행인 한국수출입은행의 ‘히든챔피언 사업’, 정책금융공사의 ‘프론티어 챔프’, 한국거래소의 ‘히든챔피언 선정’ 등도 같은 취지의 사업들이다. 일반 은행들이 가세해 만든 유사한 정책만 10개가량이 되고, 대상 기업도 2000개가 넘는다.
조봉현 기업은행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정책이 벤처, 녹색 등 유행에 따라 우르르 몰리는 특성이 있는데 히든챔피언 역시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집행이야 각 기관이 나눠서 하더라도 정부가 통합적인 관리를 해야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각 부처에 산재해 있던 중소기업 정책도 배경으로 지적된다. 최복희 중소기업중앙회 정책총괄실장은 “지난해까지도 정부 부처 13곳에 200개 중소기업 사업이 각자 진행돼 중복과 비효율 지적이 있어왔다”고 말했다.
통합적 지원을 위해 중기청에 컨트롤 타워의 구실이 요구되지만, 난관도 만만치 않다. 최복희 실장은 “중기청장의 국무회의 배석으로 부처 간 협업의 단초는 마련했지만, 의결권이 없고 산업부 외청이라는 한계도 여전하다”고 말했다.
앞으로 정책 추진에 있어선 양에서 질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연구본부장은 “(히든챔피언으로) 대기업 1차 협력회사를 선정해, 결국 대기업을 지원하는 셈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매출액, 수출액 등 양적 기준만 선별 요건으로 삼다가 발생할 수 있는 문제다. 김 본부장은 “독자 브랜드를 가졌거나 글로벌 밸류체인에 들어 있는 기업들로 뽑겠다는 기준을 제시해, 기업의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오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