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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를 여는 생각
절망의 인문학오창은 지음
이매진 펴냄
‘인문학의 위기’ 담론이 휩쓸고 지나간 우리 사회 한편에선 인문학 강좌와 인문 고전 읽기가 확산되고 있다. 기업들도 인문학의 인기를 돈벌이에 활용하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인문학을 각종 사업에 동원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과거지사가 됐나?
“한때 대학은 부당한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진지였고, 견고한 지배체제에 거리를 둬 미래 사회의 희망을 잉태하는 둥지였다. 그러나 대자본에 대학 사회가 잠식되면서 자본의 바깥을 사유할 수 있는 곳이 사라지고 있다. 학생 편의시설은 스타벅스, 파파이스, 던킨도너츠 같은 대자본 브랜드로 채워지고, 대학 신축 건물은 SK경영관, 호암관, LG경영관, CJ어학관같이 대기업 로고로 빛나고 있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거리를 두는 인문학이 위기에 놓인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체제 이데올로기 재생산 기구로 전락한 대학에서 문학·역사·철학과는 경쟁력 없는 학과로 치부돼 통폐합되고 ‘골프와 비즈니스’ ‘취업역량 개발’ 등이 새로운 교양과목으로 각광받는다. 한국 인문학은 여전히 외국 이론 수입에 의존하면서 주체적 언어도 없이 “한국적 학문 축적 체제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 등의 계량적 성과 위주 학문지원 시스템은 오히려 자본에 의한 학문 식민화를 부추기고 있다. 자신을 “반(半)제도권 비평가”로 자처하는 인문학자 오창은(중앙대 교수)은 <절망의 인문학>에서 말한다. “한국 학문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한국 사회도 바뀌지 않는다. 사회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자유가 투쟁의 성과이듯, 학문의 자유 또한 고통스러운 노력의 결실이다.”
책은 인문학을 바꾸려는 지은이가 발로 뛰어 확인한 인문학 현장보고서다.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을 뒤집어놓은 <절망의 인문학>은 그러나 절망(絶望)만 곱씹는 건 아니다. 그 절망은 진짜 인문학을 향한 간절한 소망(切望)이기도 하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노숙자 등 소외계층 대상의 인문학 강의 ‘클레멘트 코스’를 만든 미국의 얼 쇼리스는 ‘희망의 인문학’을 설파했지만, 이 땅의 인문학자 오창은은 ‘절망의 인문학’을 얘기한다. 그 절망은 진짜 인문학을 향한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다. 사진은 얼 쇼리스가 2006년 1월 방한했을 때 대한성공회 성당에서 ‘가난한 이들의 희망수업’을 하는 모습. 윤운식 <한겨레21>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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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절망의 인문학을 희망의 인문학으로 바꾸는 것은 약소자의 정체성과 감수성, 그리고 연대다. 중요한 것은 체계 바깥에 대한 지적, 예술적 상상력으로 현재 상황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서구 전통의 인문학(human science, Humanities)은 ‘인간다움, 인간적인 삶’을 규명하려는 학문이다. 오창은 중앙대 교수가 <절망의 인문학>(이매진 펴냄)에서 인용한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동녘)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4가지로 꼽았다. 첫째는 인류의 역사와 업적을 습득하려고, 둘째는 지금과 다른 대안에 관한 관심 때문에, 셋째 비전을 얻으려고, 넷째는 비판정신을 획득하기 위해서다. “종합하면, 인문학은 현재의 지배적 관점에서 벗어나 비판적이면서도 다른 대안에 입각해 비전을 마련하려는 학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특히 1980년대 이후 금융자본이 세계를 평정한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인문학의 산실인 대학이 자본의 식민지로 변했다. 교육의 수월성을 높이고 경쟁력을 높인다는 미명하에 대학에서 가르치는 인문학은 기성 체제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와 산업 예비군 재생산 도구로 전락했다. 4가지 ‘절망’의 장으로 구성된 <절망의 인문학> 제1장 ‘호황의 절망’에서 지적하는 절망의 근원이 바로 자본의 식민화다.
그 결과 만연한 인문학의 위기감 속에 등장한 것이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었다. 2006년 얼 쇼리스의 방한과 <희망의 인문학> 번역 출간 뒤 이 땅에도 제도권 바깥에서 인문학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에 따른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또 다른 부작용도 낳았다. 그런 ‘시민 인문학’ 열풍에 비판적인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그것을 “시장 논리와 연동하면서 상품화되고 있는 양상”으로 봤다. “삶의 가치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정치적 시민의 복권”을 이루는 것이 인문학의 과제 중 하나인데 “인문학이 시장의 영역에 포섭됨으로써 오히려 말랑말랑한 교양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제2장 ‘내부의 절망’은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는 도제적 학문시스템에 관한 현장보고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대전에 있는 정보통신부의 한국정보통신대학원(KAIST-ICC)에 들어간 ㅍ씨는 지도교수와 의견차이로 몇 번 충돌한 뒤 페널티를 받았다. “프로젝트를 완료한 상태인데 연구비 지원을 바로 끊어버린 거 있죠. 발끈했죠. 너무 불합리하지 않습니까?” 지도교수를 바꾸고 연구실도 옮겼는데 문제의 그 교수를 논문심사 과정에서 또 만났고 그 전의 충돌이 걸림돌이 돼 그는 결국 석사과정을 포기했다.
박사과정은 또 다르다. “최근에는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사람이 직장인으로 채워지는 추세입니다. (…) 거의 일반화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심각하죠. 대부분 언론사, 방송사 간부나 관련업계에 있는 분들이에요. 일종의 투잡이니 학업에만 전념하지 못해요. (…) 박사학위를 ‘자격증’ 정도로 보는 거죠. (…) 이런 분들 때문에 박사과정 수업이 엉망이 됩니다.” 신문방송학 전공의 ㅇ씨는 “한국 대학원 교육은 붕괴됐다”고 했다.
자본의 학문식민화에 절망한다
도제적 학문시스템에 절망한다
정량적 평가시스템에 절망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정체성은
일상의 정치 속에서 만들어진다
새로운 삶의 감수성을 만들어내고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체계 밖을 상상할 수 있을 때
삶의 전망도 발견된다
2014년 시행 예정인 고등교육법 개정안은 시간강사들에게 교원 지위를 부여하고 4대 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등 한 해 1만명을 오르내리는 박사 졸업자들 강사노동 조건을 다소 개선했다. 하지만 대학들이 연봉을 시간강사 급여 수준으로 책정할 공산이 큰데다 채용문이 좁아져 3만여명의 시간강사들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는 대량실업 사태가 빚어질 거라는 예측도 있다. 번역이 홀대받는 관행도 바뀔 조짐이 없다. 돌파구가 없는 학문 후속세대들이 줄줄이 외국, 특히 영미권 유학으로 쏠리고 그것은 유학파 편중을 더욱 고착시켜 학문의 식민화를 심화시키는 악순환도 마찬가지.
제3장 ‘제도의 절망’은 등재 학술지의 정량적 평가에 의존하고 있는 교수평가 제도, 그것을 관리하는 한국연구재단 위주의 평가 시스템이 결과적으로 연구방향을 친정권 쪽으로 유도해 연구자의 학문의 자유를 억누르고 획일적인 전문적 글쓰기로 대중으로부터의 소외를 구조화하고 있는 점 등을 비판한다. 학술지에 서열을 매겨 유력한 학회 중심의 학문적 위계질서를 형성케 함으로써 소규모 또는 진보적 연구단체들의 활동은 위축되고 ‘비판학자 길들이기’가 용이해졌다. 대학 사회는 정부기구나 기업의 프로젝트 수행기관이 돼 가고 있다.
제4장 ‘약소자의 절망’에서 오 교수는 약소자의 감수성과 연대의 중요성에 주목한다. 약소자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통합 개념이다. “약소자는 유력자의 권력을 욕망하지 않는 방식으로 욕망의 배치방식을 바꿔야 한다.” 농민과 노동자일지라도 도시 소비자와 부르주아의 과잉소비를 욕망한다면 그 사람은 약소자가 아니라 유력자란다. 약소자론은 다음 4가지 문제 설정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첫째,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전일화는 체계 바깥을 상상하는 것마저 억압한다. 둘째, 현실사회주의 붕괴 뒤 구심력을 잃고 흩어진 저항 주체가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며 갑자기 부상하고 있다. 셋째, 전지구적 자본의 세계화가 빨라지면서 계급 문제가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넷째,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체제 변화 속에서 북한이 동북아 평화의 ‘폭풍의 눈’이 됐다.
“문제는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로써 감수성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온몸으로 세계의 모순을 느끼며 감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약소자의 정체성은 사회적, 계급적 위치를 지적이면서 감성적으로 느끼는 일상생활의 정치 속에서 만들어진다. (…)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행위만으로는 지배적인 세계질서를 궁극적으로 바꿀 수 없다. 반대를 넘어서 새로운 삶의 감수성을 만들어내고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오 교수는 그런 관점에서 우석훈·박권일의 <88만원 세대>(레디앙)도 비판한다. ‘억압당하는 20대’라는 세대론이 아니라 ‘고통받는 약소자’로서의 인식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기적이지 않고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극복하는 대자적 존재가 되는 것이 지금의 20대에게 요구되는 절실한 과제다.” 그래야만 자신과 사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약소자를 통해 윤리적 실천 가능성을 모색할 때 연민의 확산이 아니라 변혁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정세분석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 균열을 가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는 것이다. 눈을 부릅뜬다고 해서 현실의 균열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체계 안에서 체계 밖을 상상할 수 있을 때 삶의 전망도 발견된다. 지적 상상력과 예술적 상상력은 더욱더 열심히 ‘약소적’이어야 한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