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멈퍼드 지음, 문중만 옮김] 기술과 문명

2013. 9. 9. 15:08Book

 

 

기계의 시대, 기계의 미학

등록 : 2013.09.08 18:42수정 : 2013.09.08 18:42

루이스 멈퍼드(1895~1990)

       

 

기술과 문명
루이스 멈퍼드 지음, 문중만 옮김
책세상·3만2000원

문명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들이 있다. 고대의 조각과 신전,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과 건축들,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과 문학 작품들. 그리고 갈릴레오, 뉴턴, 다윈의 과학 등. 반면에 방적기, 용광로, 먼지와 소음이 가득한 공장, 윙윙 회전하는 전동기, 뉴욕의 브루클린 다리를 문명의 결정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1934년에 출간된 루이스 멈퍼드(1895~1990·사진)의 <기술과 문명>은 기술이라는 것이 문명을 이해하고 이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존재임을 보여줬다. 멈퍼드의 책은 대중적으로 성공했고, 기술 철학자와 기술 사학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멈퍼드 이후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크게 바뀌었다.

멈퍼드는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 태어나 스스로 학비를 벌면서 공부했다. 그는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전기, 캐비닛 제작, 목공과 대장일, 주조와 관련된 기계적 과정을 배웠는데, 이런 경험을 통해서 일찍부터 기술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었다. 그가 <기술과 문명>을 출간하기 1년 전에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국제박람회는 ‘과학은 발견하고, 산업은 응용하고, 인간은 순응한다’는 표어를 내걸었다. 당시 사람들은 전기, 자동차, 비행기 같은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게 시대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기술의 발전은 그 자체가 곧 진보였다.

멈퍼드의 <기술과 문명>은 이런 소박한 기술관에 대한 비판이자 대안이었다. 우선 멈퍼드는 인간이 더 유용한 것을 만들기 위해 기술을 발명한다는 생각을 부정했다. 기술은 유용한 것을 만들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서의 어떤 특정한 갈망과 욕구가 외재화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기술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자 하는 갈망, 세상에 대해 더 큰 힘을 발휘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기술은 인간 본성의 발현이지만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진 것처럼 기술 복합체를 이루고, 이것이 다시 인간의 삶과 본성에 영향을 끼친다. 그는 이 기술 복합체를 원기술 시기(1000~1750년), 구기술 시기(1750~1900), 신기술 시기(1900년 이후)로 나누는데, 이 각각은 동력원과 재료에서 ‘수력-나무’, ‘증기-철’, ‘전기-합금’의 복합체로 특징 지어진다. 원기술 시기는 기술이 인간의 삶과 도시를 풍요롭고 활력 넘치게 만들었던 시기인 데 반해, 소위 1, 2차 산업혁명기라고 불리는 구기술 시기는 기술이 대량 살육, 혼돈, 노동자의 지위 하락, 환경 파괴를 낳았던 암울한 시기였다. 새로운 야만주의가 횡행하던 이 시기에 기계적인 것은 유기적인 것을 완전히 지배했다.

멈퍼드는 비관론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신기술 시기에 새롭게 등장한 전기와 화학기술에 주목한다. 신기술은 기계를 더 정교하게 자동화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했으며, 과거의 기계를 넘어서 유기적인 기계의 시기를 열고 있었다. 새로운 기계는 전기, 화학, 생물학을 그 영역에 끌어들여서, 불필요한 기계를 폐기하면서 환경의 보존을 낳고, 인간의 노동과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기술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통제가 이루어지고, 기계적 합리성을 포괄하는 새로운 유기적인 조화가 달성되면 진정한 바이오기술(biotechnic) 시대가 열릴 수 있었다. 신기술의 긍정적 속성과 인간의 적극적 대응은 인간과 환경, 기계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 도시와 농촌 사이에 새로운 조화를 회복시킨다는 것이 그의 희망이자 신념이었다.

멈퍼드의 이런 낙관론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크게 바뀐다. 그는 후기 저작에서 기술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기술과 그렇지 못한 기술로 나누고, 지금의 시대가 후자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민주적 기술과 독재적 기술이라는 구분을 제시하기도 했고, 기술의 지배를 극복하는 가능성을 예술에서 찾으려고도 했다. 상대적으로 낙관적인 초기 멈퍼드와 비관적인 후기 멈퍼드 중에 어느 것을 선호하고 선택하는가는 우리의 몫이다. 그렇지만 문명을 이해하고 이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기술에 대한 통찰과 개입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은 멈퍼드의 전 생애를 관통하며, 이는 우리에게도 실천적 의미를 지닌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