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통치는 1953년 그의 사망으로 막을 내렸다. 그해 3월6일 소련 키예프에 있던 ‘고리키 전차 공장’에서 열린 스탈린 추도식. 교양인 제공 |
출신성분 이유 ‘인민의 적’ 낙인
공포의 내면 구술 방식 들려줘
찬사와 비판 동시에 받은 문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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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김남섭 옮김
교양인·각 권 2만3000원한국어판으로 두 권, 1100여쪽 분량의 이 책의 원제는 ‘속삭이는 사람들: 스탈린 시대 러시아의 사적인 생활’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올랜도 파이지스(54·런던대학 버크벡 칼리지 역사학 교수)는 1980년대 중반 모스크바 유학 때 이 책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 뒤 20여년의 구상과 2002년부터 5년에 걸친 조사·연구 작업 끝에 2007년 이 책을 내놓았다. 파이지스의 설명을 따르면, 러시아어엔 ‘속삭이는 사람’에 해당하는 두 낱말이 있는데, 하나는 ‘누가 엿들을까 두려워 소곤거리는 사람’, 또 하나는 ‘사람들 몰래 당국에 고자질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지은이는 두 낱말이 “소련 사회 전체가 이런저런 부류의 속삭이는 사람들로 구성됐던 스탈린 시대의 관용어법에 기원한다”고 주장한다. <속삭이는 사회>는 구술사 방식을 취한 역사서이다. 출간 뒤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은 논쟁적인 저작이다. 파이지스는 러시아 혁명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전통주의 시각에서 벗어난 수정주의 역사학자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이른바 좌파 진영 한쪽에서는 레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개인에 초점을 맞춘다는 이유로 보수주의 학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파이지스는 “스탈린 폭정 아래 살았던 평범한 소련 시민들의 내면세계”를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주겠다는 목표로 이 책을 집필했는데, 수많은 개인과 가족의 구술을 따라가며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 소련 현대사의 잔혹한 뒷면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이 구술사는 1917년부터 1925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의 삶의 궤적을 좇는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전후부터 2006년까지를 아우르지만, 책이 다루는 주된 시대는 스탈린이 정권을 장악한 1928년부터 그가 사망한 1953년까지다. 파이지스는 이 책을 위해 편지와 사진, 문서 등 개인과 가족이 간수해온 각종 사적인 자료뿐 아니라 러시아의 인권단체인 메모리알협회의 도움을 받았다. <속삭이는 사회>는 그렇게 1000여명을 인터뷰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되, 주된 서사는 골로빈 가족, 라스킨 가족, 시모노프 가족, 부슈예프 가족 등 열 가족의 이야기를 얼개 삼고 있다.가령, 골로빈 가족의 안토니나(1923~2006)의 경우를 보자. 안토니나의 아버지는 1930년대 농업 집단화 정책이 추진될 때 쿨라크(부농)로 체포되어 노동수용소(굴라크) 3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8살이던 안토니나는 어머니, 남동생 둘과 함께 시베리아로 추방당했고 그곳 특별정착촌에서 1000여 쿨라크들과 함께 3년을 보냈다. 이 가족은 1934년 12월 유형지에서 돌아와 아버지와 재회했다. 파이지스는 “그 충격적인 경험은 안토니나의 의식에 깊은 상처를 남겼는데 그중 가장 깊은 상처는 쿨라크 출신이라는 낙인이었다”고 적는다. 안토니나의 맘속엔 “우리는 쿨라크이기에 정권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고 잠자코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이 자랐고, 안토니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소비에트 사회에 적극 참여했다. 공산주의청년동맹에도 가입했고 출신을 숨기고 의과대학에 진학해 공부했으며, 레닌그라드의 생리학대학에서 40년 동안 몸담았다. 1991년까지 공산당원이던 안토니나는 훗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믿어서가 아니라 나와 가족이 의심받지 않기 위해 당원이 되었다”고 했다.이 책은 스탈린 치하 사람들의 사적인 삶이 어땠는지, 그 내면은 어땠는지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런데 책에는 볼셰비키 혁명 주역의 자식(옐리자베타 드라프키나), 비밀경찰 구실을 한 내무인민위원부(NKVD) 요원은 물론, 1930년대 프롤레타리아 작가로 소련 주류 문단의 거장이었던 콘스탄틴 시모노프의 가족처럼 스탈린의 억압을 받지 않은 가족도 일부 들어 있지만, 대부분은 혁명기와 스탈린 치하에 반혁명분자로 탄압을 받은 가족들이다. 책이 다루는 가족 대부분이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으로 새 사회를 건설하는 주류가 된 이들이 아니라, 인민의 적, 계급의 적으로 찍혀 처형당하거나 노동수용소·특별정착촌에 끌려갔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다.파이지스는 스탈린 치하 소련을 경찰국가로, 스탈린 통치를 독재권력에 의한 공포정치로 파악한다. 그는 스탈린 시기 1928~1953년 사이에 총살당한 사람들, 노동수용소에 끌려간 죄수, 특별정착촌으로 쫓겨간 부농, 오지로 추방된 소수민족을 합치면 2500만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는 1941년 2억명이던 소련 인구의 8분의1에 해당하는 수다.그가 이 책에서 던지는 질문은 국가 폭력이 잇따르는 가운데서도 소비에트 사회가 1991년까지 70여년을 버틴 동력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스탈린 체제가 사람들의 정신과 감정에 침투하여 그들의 가치관과 관계에 영향을 끼치고 내면을 지배했으며,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을 공포정치의 조용한 방관자·협력자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고 답한다. 나아가 그는 소련 인민들이 소비에트 가치를 받아들인 것은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니라, 계급투쟁 과정에서 사회 주류에서 배제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수치심 때문이라는 주장을 편다. 옮긴이 김남섭 교수(서울과학기술대·러시아 역사 전공)는 ‘옮긴이 후기’에서 이는 기존 일부 학계의 주장과 본질적 차이가 있는 주장이라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이 소비에트 사회의 기본 버팀목이었는지, 국가 폭력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순응주의적 태도가 원동력이었는지”는 앞으로 역사학자들이 중요하게 탐구해야 할 문제라고 짚었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