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황성순 화백 |
내 서재 속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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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베냐민 지음, 조형준 옮김
새물결 펴냄(2007)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사회를 선택했던 적이 없다. 오히려 우리 자신은 우리 사회가 선택하고 길들인 결과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는 자신이 길들여진 존재라는 자각에 이르러야만 한다. 태어나 눈도 떼지 못한 채 어느 집에 분양되어 길러진 애완견처럼 말이다. 오직 이럴 때에만 우리는 자유를 꿈꿀 수 있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 어느 순간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해야만 한다. 자기 삶을 자신의 신념과 이상에 따라 살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남들이 결혼을 하니까 자신도 결혼을 하려고 하고, 남들이 직장에 다니니까 자신도 직장을 다니고, 남들이 투표를 하니까 자신도 투표를 하고, 남들이 스마트폰을 사니까 자신도 스마트폰을 사고 있을 뿐이다. 어느 시대에 태어났어도 반드시 살아내야 할 나만의 삶은 없는 것일까? 이런 고민에 이르렀다면, 드디어 우리는 길들여진 자신을 넘어서 자신에게 숨겨진 야성에 주목하게 된 셈이다. 누구의 제스처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제스처를 찾으려는 열망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길들여진 존재라는
자각에 이르러야 한다
지금까지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면
단추를 풀어 다시 채워야 한다
유년시절을 돌아보는 건 그래서
향수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소망 비자발적 기억은 은폐하려 했던
과거의 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것은 삶이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를 구원하러 찾아온다 어쩌면 단추 채우기의 비유가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줄 듯도 하다. 지금까지 단추를 잘못 채워왔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만 남게 된다. 잘못 채웠다는 것을 무시하고 마지막 단추와 단춧구멍이 용케 맞기를 기대하며 단추를 계속 채워 나가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잘못 채웠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서 단추를 제대로 다시 채우는 것이다. 지혜롭다면 누구나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비록 느려 보이지만, 사실 이 방법이 가장 빠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모든 위대한 작가들의 처녀작이 유년시절에 대한 회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이 아닌 타인들, 즉 부모나 선생님들에 의해 채워진 단추를 풀지 않고서, 어떻게 자신만의 단추를 채울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부모나 선생님이 채운 단추를 긍정하고 계속 그런 스타일로 단추를 채워 완성된 옷이라면, 그것은 부모나 선생님의 옷이지 나의 옷일 수는 없으니까. 작가는 자신의 삶, 감정, 그리고 생각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표현해야만 한다. 작가가 반드시 유년시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 빼앗긴 자신의 삶을 되찾지 않고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자신이 영위하겠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의식적으로 과거에서 미래의 희망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예 그의 책 제목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을 정도다. 이제 오해하지 말도록 하자.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다는 것, 혹은 유년시절을 돌아본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애절한 향수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미래의 소망스런 삶에 대한 애절한 기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의 교훈을 가슴에 아로새긴 어느 섬세했던 독일 철학자가 있다. 그가 바로 20세기 가장 탁월했던 철학자 발터 베냐민(1892~1940)이다. 사람들은 베냐민을 문화철학자나 정치철학자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아우라’(Aura)라는 개념으로 유명해진 그의 논문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나 그를 뛰어난 정치철학자의 반열로 올린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의 모든 저서를 관통하는 한 가지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한다. 그것은 바로 과거에서 미래의 희망, 혹은 구원의 전망을 찾으려는 프루스트적 시선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등장하는 ‘비자발적인 기억’의 논리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입에 넣는 순간, 프루스트는 과거 유년시절을 보냈던 콩브레라는 마을의 모든 풍경이 생생하게 자신에게 밀려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비자발적 기억이란 바로 이런 식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반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기억, 즉 자발적인 기억은 현재 자신의 생각과 정서로 과거를 왜곡하기 쉽다. 예를 들어 젊은 시절 생활고로 인한 스트레스로 자식들에게 빈번하게 폭력을 행사했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노인이 되면 이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아름답게, 즉 자신은 자식들을 금지옥엽으로 키웠다는 식으로 채색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자발적 기억이 가진 위험성이다. 그런데 이미 나이든 아들과 목욕탕을 갔을 때, 노인은 아들의 등에서 작은 흉터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작은 흉터가 아들에게 매질을 하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생생하게 복원시켜줄 것이다. 이처럼 비자발적 기억은 우리가 애써 은폐하려고 했던 과거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독일어 번역자이기도 했던 베냐민이 비자발적 기억이 가진 중요성을 간과했을 리가 없다. 마침내 그 스스로 하나의 기념비적 작품, 즉 자신의 비자발적 기억에 주목한 작품을 쓰게 된다. 그것이 바로 1928년 출간된 <일방통행로>(Einbahnstraße)다. 비자발적 기억의 중요성을 음미해 보려면 다음 사례로 충분할 것 같다. 어린 시절 잠을 자다 새어나온 가스에 중독되어 죽다가 간신히 살아난 경험을 했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지금 그는 과거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것마저도 잊고서 평범하게 살고 있다. 어느 날 그는 동료들과 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10명의 동료와 같은 숙소에서 잠을 청하다가, 그에게는 갑자기 불쾌한 과거 경험이 밀려들게 되었다. 과거 가스에 중독되었던 경험에 대한 비자발적 기억이다. 숙소에서는 과거에 맡았던 것과 유사한 냄새가 조용히 번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당시 가슴에서 느껴졌던 동일한 위축감과 압박감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는 나머지 동료들의 몸을 흔들었다. 불행히도 나머지 동료들은 위기가 임박했다는 것도 모른 채 그의 말을 무시하고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나머지 동료들을 깨우는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 대목에서 <일방통행로>에 등장하는 강력한 구절 하나를 읽어보자. “생각된 대로 표현된 진리만큼 궁핍한 것도 없다. … 소동에 의해서든 아니면 음악에 의해서든 또는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에 의해서든 진리는 화들짝, 돌연 일격을 당한 듯 자기 침상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진정한 작가의 내면에 갖춰져 있는 비상경보기의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집필한다’는 것은 그런 비상경보기를 켠다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자발적 기억은 진리를 왜곡하기 쉽다는 프루스트적인 통찰이 분명해지는 구절이다. 책을 보면서 진리를 탐구하려고 해도, 진리가 우리에게 곧바로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리는 비자발적인 것으로 하나의 충격처럼 찾아드는 법이다. 숙소에 새어나오는 가스 냄새를 맡으면서 유년 시절 가스 중독으로 죽을 수도 있었던 경험이 엄습한 사람만이, 지금이 어떤 상태인지를 직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야 알겠다. 왜 과거에 구원의 희망이 있는지. 왜 프루스트나 베냐민이 유년시절이나 과거에서 희망의 불꽃을 점화시키려고 했는지. 나아가 왜 우리가 경험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그것에 정직하게 직면해야 하는지. 모든 진리를 그 순간 직접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때로 진리란 땅속 깊은 곳에 묻어둔 씨앗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강신주 철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