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 <한겨레>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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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 지음, 양효실 옮김
인간사랑·1만7000원 주디스 버틀러(사진). “여성주의 철학, 퀴어 이론, 정치 철학, 윤리학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하는 후기구조주의 이론가이며 급진적 행동주의자.” 그녀는 민족, 계급, 성별 등의 정체성이 확정된 소속이 아니라 일상의 퍼포먼스와 담론으로 매번 구성된다는 수행성 이론으로 유명하다. 곧, 인간의 본질은 없으며 그것은 행위에 따라(隨行) 결정된다는 것이다. 독특한 사유 방식, 깊고 광대한 지식,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열정. 쉽게 출현하기 힘든 매력적인 사상가다. 버틀러는 어려운 문장과 ‘이상한 문법’으로도 악명이 높다. “쉬운 글은 지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가독성은 사회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따른 익숙함의 결과이지 객관적으로 어려운 글은 ‘없다’. <윤리적 폭력 비판-자기 자신을 설명하기>는 예외에 속한다. 유려한 번역과 설득력 있는 문장 덕분에 버틀러 책치고는 쉽게 읽힌다.이 책은 9·11 이후를 성찰한 2004년 작 <불확실한 삶-애도와 폭력의 권력들>(양효실 옮김, 2008)과 연작이다. 두 권의 책은 미국 사회의 피해의식과 전세계를 향한 보복의 정당성에 대한 지은이의 비판적 개입이다. 본토는 절대 당하지 않는다는 확실성이 붕괴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한 미국은, 이제는 아예 상대방이 “그럴 것이라는 생각”, 그러니까 확신도 아니고 공포와 증오의 심증에 근거한 선제(preemptive) 공격을 대외정책으로 삼고 있다. 이들의 도덕적 확실성은 더는 부서질 건물조차 없는 아프가니스탄 등지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버틀러의 질문은 이것이다. 이 확실성을 판단하는 ‘나’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고대의 실재가 자연이라면, 중세는 신, 근대는 인간일 것이다. 근대의 열쇳말은 우리가 인간, 사람, 개인, 자아, 시민 등으로 부르는 주체(subject)다. ‘나’ 개념에서 모든 문제와 이론이 발생한다. 주체는 타자의 인질. 이 말은 인간의 개념은 어떻게 구성되고 인간임과 아님은 무엇이고 이들의 관계는 어떠한가를 집약한다.세상으로부터 독자적이고 스스로 합리적인 투명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나’(one)의 정의는 나로부터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타자가 아닌 사람, 타자를 설명하지 않고 나를 설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타자는 내가 아닌 나머지(others)로 나를 중심으로 설정된다. 근대의 인간 개념이 이러하니 자기를 설명하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사회적 전제들을 고려해야 하는데, 기존의 현실 초월적 도덕철학은 출발부터 이를 삭제(fore/closure)한다. 이들이 윤리적 주체가 될 때 폭력은 필연적이다. 인간은 본디 취약하고 불확실한 존재다. 망설이는 자아는 폭력을 성찰한다.책의 내용은 정체성, 책임감, 자아 개념의 사상가에 대한 버틀러의 해석이다. 인간 되기는 스스로 해소할 수 없는 곤궁에 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제 인간이 되는지 그게 가능한지 항상 불분명하다(테오도어 아도르노), 내가 누구인지를 묻지 말고, 내가 계속 같은 사람인지도 묻지 말라(미셸 푸코), 나는 항상 나에게 늦게 도착한다(프리드리히 니체), 나의 존재론적 수동성, 타자로부터 영향받는 나의 능력으로 인해 나는 관계로서 책임에 연루된다(에마뉘엘 레비나스),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나에게 요구하는 이 ‘너’는 누구인가?(장 라플랑슈), “너”는 근대에서 친숙하지 않은 용어다. 그러나 “너”가 없다면,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아드리아나 카바레로). 이 책은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먼저 출판되었는데 <윤리적 폭력 비판>은 그때 제목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부제가 된 원제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Giving an Account of oneself)가 좋다. 옮긴이의 전언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을 주기”는 나의 설명을 수신할 다른 사람의 존재와 관계를 전제한다.
정희진 여성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