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10. 02:55ㆍ파놉틱 정치 읽기
이인영 국회의원이 제시하는 진보의 결론은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고지선이라는 뜻이다. 그런가?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면 대중은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① 금융자유화 ② 노동유연성 ③ 재벌부자감세 ④ 규제완화 ⑤ 민영화 ⑥ 복지축소 ⑦ 작은 정부 ⑧ FTA추진”의 반대로 가면 대한민국은 좋은 나라로, 국민은 행복한 나라로 변화되는가?
‘제3의 길’은 ‘낡은 진보’의 대결주의적 계급주의적 갈등과 적대의 방법에서 탈피했다. 시대의 변화에 천착했다. 이유는 바로 유권자들이다. 시대의 변화를 만드는 것이 유권자이고, 그런 유권자의 변화에 맞게 정치를 변화시켜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제3의 길’은 20세기 말에 진보정치를 회생시켰다. ‘낡은 진보’로부터 엄청난 야유와 기회주의라는 공격을 받으면서, 그런 것은 야당의 정치가 아니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으면서 ‘제3의 길’을 갔다. 그리고 성공했다.
이인영 국회의원의 페이스북 들 제2편을 읽으면서 감상은 “왜 여전히 그들은 ‘낡은 진보’로 보이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번 글에서 비정규직 출신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다며, 이 시대 다수의 비정규직을 위한 정치가 필요하다던 그가, 이번 글에는 보수정권의 대기업노조 공격을 방어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 의도는 노-노 간의 갈등을 부추기려는 전술이라고, 또 임금피크제도 세대 간의 갈등을 부추기려는 전술이라고, 또한 기업과 노동의 불평등 문제와 노동 내부의 소득격차 문제를 동렬에서 보지 말라고 그것은 본질에 대한 왜곡이라고, 근본원인과 파생결과를 혼동하는 시각이라고,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놓쳐버린 협소한 관점이라고…
이래서 낡았다고 하는 건가 보다. “나는 옳으니 나의 말을 따르세요. 적의 말에 교란당하지 마세요. 당신들은 근본적 원인과 구조적인 모순을 잘 볼 수 없는 분들이니,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제 말을 잘 들어야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답변은 단순하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머리가 나쁘진 않아요. 우리도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 원인과 구조적 모순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요. 그러니 너무 강요하지 마세요.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젠 동등하게 얘기할 때도 됐잖아요.”
기업과 노동의 불평등이 자본주의의 핵심적 문제이며 난제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그런데 대기업노조의 이기적 행동이 벌어지는 것도 현실 아닌가. 임금피크제는 노동자의 돈을 단지 다른 곳으로 나눠주는 것이니, 그 숨은 의도를 깨트리기 위해 기업과 투쟁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겠지만, 노동자들의 자주적 결정을 통해 세대의 고통을 완화하는 방법도 가능한 것 아닌가. 이인영 국회의원의 말씀대로라면 기업과의 전면적 계급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적확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계급전쟁을 바라지 않는다. 서로의 이해와 타협, 절충을 통해 새로운 대안적 방법을 모색하길 바란다.
애꿎은 중도를 빌려와서 진보가 더 세련된 것처럼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절충과 타협의 방식이 중도가 아니라, 민심의 반영이 중도일 것이다. 겉으로는 절충과 타협으로 보일지 몰라도 대중은 누구에 의해 누구를 압도하는 방식의 극단을 선호하지 않는다. 노동자를 위한 국가가 관료와 철인통치자의 독재로 귀결되었고, 자본을 위한 국가가 인간을 소외하고 자본독재로 귀결되었듯이, 무엇이 무엇을 압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억압해야 하고 누군가는 소외당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회에 반대한다. 우리는 사랑과 연대에 기초한 정의와 복지사회를 지향한다.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우리는 목적을 이야기해야 한다. 반대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꼰대’라는 말이 있다. 어린 사람들에게 “이것은 이러니 이렇게 해야 한다. 내가 살아보니 이렇더라. 그러니 이건 하지 말고 이건 하고 등등등.” 정치권 ‘86세대’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꼰대짓’이다.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꼰대짓’이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진보의 방향, 재벌개혁과 같은 전략이나 전술이 아니다. 당신들 보다 잘 하는 사람들 많다. 그들의 이야기 경청하고 그들과 토론하면 된다. 이제야 말로 귀 쫑긋 세우고 눈 똑바로 뜨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다. 정치권 ‘86세대’들이 지금의 이 문제제기에 대해 가슴이 쓰릴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대중의 생각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라고 항변하기보다는 왜 그들이 당신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지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는 아닙니다”라는 항변부터 시작하고 있다. 사람들은 정치권 ‘86세대’의 항변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변질되었는지 반성을 듣고 싶어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세상이 변하는 소리를 제대로 잘 파악하라고 정치권 ‘86세대’에게 요청하고 있다. 1980년대 선배들이 걸어왔던 그 힘든 가시밭길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런 삶의 흔적을 지우고 있는 그 이후의 여정이 안타깝다. 이제 항변할 것이 아니라 행동하길 바란다. 시대가 당신들을 버리지 않길…당신들이 그 마지막 끈을 놓치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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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두 번째 글]
2. 왜 여전히 진보의 길을 가야 할까요?
저는 1997년 이후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했다고 판단합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그래도 민주복지 요소와 신자유주의 요소가 중첩되었는데, 이명박 -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완벽한 신자유주의 시대가 확립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는 8개의 깃발을 들고 우리 앞에 등장했습니다.
① 금융자유화 ② 노동유연성 ③ 재벌부자감세 ④ 규제완화 ⑤ 민영화 ⑥ 복지축소 ⑦ 작은 정부 ⑧ FTA추진 등이 그것입니다.
이로 인해 한국 자본주의 문제점은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난폭했던 그들에 의해 무엇보다 소득분배구조 악화, 사회적 불평등 확장 등 이른바 양극화로 지칭되는 한국사회의 모순은 보다 깊어지고 확장되었습니다. 노동자 내부의 소득격차문제 보다 근본적이며 일차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보수정권은 노동자 내부의 소득격차를 빌미로 대기업노조의 이기심을 공격합니다. 쉬운 해고를 통해 정규직의 일자리를 쪼개서 비정규직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며 노-노간의 갈등을 부추깁니다. 노사간의 자율로 결정되면 그만일 임금피크제를 동원해 심지어 아버지 세대의 임금을 깎아 아들 세대에게 나눠주고 청년실업을 해결하자고 세대갈등도 선동합니다.
일부 민주진보진영에서도 기업과 노동의 불평등 문제와 노동내부의 소득격차 문제를 동렬에 놓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본질에 대한 왜곡입니다. 근본원인과 파생결과를 혼동한 시각입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놓쳐버린 협소한 관점입니다.
만약 우리가 신자유주의가 쌓아온 문제점을 해결하고 그 난폭성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우리의 방향은, 우리의 정치노선은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① 금융의 자유화가 아니라 금융의 민주화/자주화가 대안이어야 합니다.
② 노동의 유연화가 아니라 당연히 고용의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③ 재벌부자 감세가 아니라 법인세의 정상화/부자감세의 철회를 일관되게 주장해야 합니다.
④ 재벌규제 완화가 아니라 시장에서의 독과점 규제는 강화하고, 중소기업에게 높은 진입장벽은 완화해야 합니다.
⑤ 민영화가 아니라 다시 공공성과 사회적 균형을 도모해야 합니다.
⑥ 복지축소가 아니라 보육과 급식을 넘어 실업과 의료분야에서도 지속적으로 보편적 복지의 영역을 담대하게 확장해야 합니다.
⑦ 산업과 토건은 작은 정부로, 사회정책 분야는 적정 정부 또는 능동정부로 가는 새로운 정부모델을 구축해야 합니다.
⑧ FTA가 아니라 북한의 문을 열어 평화공존공영의 동북아경제권에 대한 주도적 구상을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같은 우리의 방향을 명확히 할 때
이른바 중도는 하나의 방법으로, 유연성으로 우리에게 다가 올 수 있습니다.
금융의 약탈성을 민주화하는 방향에서 100을 50으로 타협하고 조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금융자유화를 100으로 하려다 50으로 타협하는 것은 우리의 길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비정규직을 줄이는 방향과 비정규직을 늘리고자 하는 방향 사이에서 솔직히 중도가 노선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정규직을 줄이는 원칙을 지키되 100을 줄일 것인지 50을 줄일 것인지 유연성을 가질수 있고 그것이 중도라면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정규직을 줄이는 방향에서 유연성이지 늘리는 방향에서 타협하고 절충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세철회 문제도 법인세를 25%로 정상화 하지 못할 때 23 또는 24를 할 수 있지만 25를 22로 내리는 과정에서 23 또는 24가 되도록 하는 것은 저들의 입장일 뿐입니다.
경제민주화 실현을 위해 금산분리, 상호출자금지, 출자총액제한 등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없으면 할 수 있는 것부터 도입할 수는 있어도 모두 안하려다가 어느 하나부터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 주요 기간산업에서 전기 통신 석유 등의 민영화를 넘어 철도 교육 의료의 영역까지 민영화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도를 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만은 안된다는 것에서 버티는 것이지, 모두 다 민영화 해야 하는데 이것부터 민영화 한다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요?
보편적 복지를 위해 급식과 보육과 노후부터 시작하지만 실업부조의 확장과 공공의료까지 확대되야 한다는 신념이 우리의 것이지 전 분야에서 복지철회를 해야 하는데 우선 의료와 실업부터 철회하자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요?
명백하게 정부영역에서 산업육성의 영역은 줄이고 사회서비스 영역은 확대하자는 것이 우리 입장이지 사회서비스가 과대하니 축소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입장은 아니지 않을까요?
공정무역 즉 Fair Trade Agreement는 차치하더라도 우선 불평등 조항이라도 개선하자는 것이 우리의 비젼이지 Free라는 이름 하에 불평등을 팔자로 받아들이자는 것이 도대체 우리의 비젼 방향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저는 이런 점에서 진보나 보수가 방향이라면 중도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당 부분은 절충과 타협의 중도적 방식이 민주진보진영의 유연성에서 해소될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별도의 신천지를 향하는 방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대부분 중도는 우리당 안에서 타협주의로 직결됩니다.
그러면 “야당성을 상실했다” 혹은 “기회주의”라는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또한 정체성 대혼란의 원인이 됩니다.
다음은 “왜 여전히 재벌개혁인가” 대해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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