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인용] 책 "불화: 정치와 철학" 자크 랑시에르

2015. 12. 29. 18:33Book

이 책을 소개하는 기사에 의하면 플라톤에게 정의란 “구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그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서양의 ‘정의’는 정당한 몫을 확보하는 것이다. 왜 정당한 몫을 확보해야 하는지는 정치철학적 문제가 될 것이다. 그 전제는 불평등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인민의 전략에서 관건은, 자신도 똑같이 말할 수 있고, 공통의 사안에 대해 의논하고 논증할 수 있는 지적으로 평등한 인간임을 증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정의는 불평등의 조건을 해소하는 몫을 확보하는 것이고, 불평등의 전제이자 목표인 평등을 위해서 불평등한 인민은 지적으로 동일함을 입증해야 한다. 불평등한 인민은 이중의 역할을 해야 한다. 존재하는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해 인민이 지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고, 이에 근거하여 ‘공통의 무대’에 올라야 하며, 그곳에서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확보할 ‘갈등’ 또는 ‘투쟁’을 해야 한다.

이것이 오랜 서양철학의 지적 전통인 것 같다. 구조적 불평등을 깨기 위한 갈등과 투쟁, 지식 우선주의, 계급 충돌 등이다. 이성을 통한 지식권력의 행사와 무한한 진보로의 돌진, 왜 이성과 지식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 토론이 필요하다. 공자는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고 인간의 본성을 仁義禮智라 하고 지식을 말단에 놓았다. 정의가 필요한 것도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이며, 불평등을 지양하려고 하는 것도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정치철학이 결국 정치를 제거하려는 기획”이라는 논증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정치철학이 결국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개인적 연구 부분이 끝나면(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이 어려운 랑시에르를 비롯해서 지그문트 바우만, 조르지 아감벤, 바디우 등 서양 철학자들의 궤적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곤 하던데...어려운 사람들의 철학을 재음미해보는 시간도 어쩌면 즐거울지 모르니....과거 푸코의 저서들에서 느꼈던 그런 기분이랄까....


정치란?...몫 없는 이들의 몫을 확보하는 것

등록 :2015-12-24 21:03수정 :2015-12-25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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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사진 손홍주 
 <씨네21> 기자 <A href="mailto:lightson@cine21.com">lightson@cine21.com</A>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사진 손홍주 <씨네21> 기자 lightson@cine21.com



불화: 정치와 철학
자크 랑시에르 지음, 진태원 옮김
길·2만2000원

정치란 무엇일까? 이는 인간이 공동체를 구성해 삶을 꾸려나간 이후부터 줄곧 제기된 물음일 것이다. 이 물음에 답하는 여러 방식이 있다. 국가의 통치, 권력의 획득·유지·행사, 사회 구성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제 형태, 사회적 희소가치의 권위적 배분 등등.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불화>에서 정치의 본질을 정의하는 서구 정치철학 전통을 한꺼번에 의문에 붙인다. 정치철학은 결국 정치를 제거하려는 기획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랑시에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한다.

플라톤은 정의란 구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그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받는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자신의 일터를 비우고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없는 장인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부정의를 논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 능력을 정치의 토대로 삼았다. 하지만 이는 노예의 예가 보여주듯 로고스(말 그리고 그것에 대한 셈)를 가진 자들과 로고스를 갖지 않고 그저 쾌락이나 고통을 느끼고 소리를 지를 뿐인 자들을 분할하지 않는가? 이처럼 자리와 부분들의 몫의 분배는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갈등의 여지가 있다.

사회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몫이 빈틈없이 존재할 뿐, 몫 없는 이들의 몫과 같은 결핍이나 보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가 있다. 랑시에르는 이를 ‘치안’이라고 부른다. 그는 치안과 정치를 동일시함으로써 정치 자체를 제거하는 정치철학의 세 가지 형상으로서 아르케정치(플라톤), 유사정치(아리스토텔레스), 메타정치(마르크스, 사회과학)를 분석한다. 그리고 오늘날 정치철학의 귀환, 합의민주주의, 무한한 타자성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는 윤리의 확산 등이 어떤 점에서 여전히 정치의 제거/실현에 기여하고 있는지 살핀다.

반면, 몫의 분배에서 셈해지지 않은 것이 있으며 그것을 하나 더 셈해야 한다는 논리가 있다. 랑시에르는 이를 ‘정치’ 또는 ‘평등 과정’으로 부른다. 예컨대 주인이 노예에게,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명령하고 복종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후자가 불평등한 질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전자의 말을 똑같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불평등이 가능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평등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민의 전략에서 관건은, 자신도 똑같이 말할 수 있고, 공통의 사안에 대해 의논하고 논증할 수 있는 지적으로 평등한 인간임을 증명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상대가 자신의 말을 말로 알아듣거나 셈하지 않는 상황(‘불화’)에서 공통의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 하여, 이 공통의 무대를 설립할 가능성, 이 무대에 출현한 자의 존재와 자격 자체를 둘러싸고 갈등(‘계쟁’)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인민은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 직분, 기능에서 이탈하면서 ‘정치적 주체화’를 겪는다. 이런 것들이 있을 때에만 ‘정치’는 존재한다.

<불화>는 1990년대 프랑스 사회당의 집권과 더불어 시작된 합의의 분위기, 정치의 종언 또는 정치철학의 귀환 담론, 유고슬라비아 내전 등과 같은 특정한 정세 속에서 작성됐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뤄지는 정치적 무대/장면-아벤티누스 언덕에서 농성을 벌이던 로마 평민들, 파리의 재단사 파업, 보편 선거권 쟁취 투쟁을 벌이던 프랑스 여성들 등-은 그것의 (비)동시대성 덕분에 이 땅의 상황과 쉽게 연결될 수 있다. 이 책에는 노동자 시위에 대한 공권력·사측·언론의 비난, 여론조사와 시뮬레이션 투표를 통한 정치활동의 제거, 민주적 지식 유통에 맞서 교육학적 통제권을 펼치는 정치, 공동체의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공동체에 참여하게 만드는 정치 등에 대한 논의가 나온다.

양창렬 철학 연구자
양창렬 철학 연구자
역자와 출판사가 공을 들인 만큼 <불화>의 번역은 훌륭하다. 독자가 이 책을 중도에 덮는다면 그것은 역자의 탓이 아니라 책의 내용 자체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 접근하기 위한 길잡이로서 역자의 용어해설과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에 수록된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를 참조하길 권한다. 그리고 이 책을 덮은 뒤에는 그가 다른 책들에서 보여준 정치적 장면/무대로 넘어가거나 이 땅의 장면/무대로 눈과 귀를 돌려보자.

양창렬 철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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