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사진 손홍주 <씨네21> 기자 lightson@cine21.com
자크 랑시에르 지음, 진태원 옮김
길·2만2000원정치란 무엇일까? 이는 인간이 공동체를 구성해 삶을 꾸려나간 이후부터 줄곧 제기된 물음일 것이다. 이 물음에 답하는 여러 방식이 있다. 국가의 통치, 권력의 획득·유지·행사, 사회 구성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제 형태, 사회적 희소가치의 권위적 배분 등등.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불화>에서 정치의 본질을 정의하는 서구 정치철학 전통을 한꺼번에 의문에 붙인다. 정치철학은 결국 정치를 제거하려는 기획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랑시에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한다.플라톤은 정의란 구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그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받는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자신의 일터를 비우고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없는 장인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부정의를 논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 능력을 정치의 토대로 삼았다. 하지만 이는 노예의 예가 보여주듯 로고스(말 그리고 그것에 대한 셈)를 가진 자들과 로고스를 갖지 않고 그저 쾌락이나 고통을 느끼고 소리를 지를 뿐인 자들을 분할하지 않는가? 이처럼 자리와 부분들의 몫의 분배는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갈등의 여지가 있다.사회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몫이 빈틈없이 존재할 뿐, 몫 없는 이들의 몫과 같은 결핍이나 보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가 있다. 랑시에르는 이를 ‘치안’이라고 부른다. 그는 치안과 정치를 동일시함으로써 정치 자체를 제거하는 정치철학의 세 가지 형상으로서 아르케정치(플라톤), 유사정치(아리스토텔레스), 메타정치(마르크스, 사회과학)를 분석한다. 그리고 오늘날 정치철학의 귀환, 합의민주주의, 무한한 타자성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는 윤리의 확산 등이 어떤 점에서 여전히 정치의 제거/실현에 기여하고 있는지 살핀다.반면, 몫의 분배에서 셈해지지 않은 것이 있으며 그것을 하나 더 셈해야 한다는 논리가 있다. 랑시에르는 이를 ‘정치’ 또는 ‘평등 과정’으로 부른다. 예컨대 주인이 노예에게,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명령하고 복종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후자가 불평등한 질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전자의 말을 똑같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불평등이 가능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평등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민의 전략에서 관건은, 자신도 똑같이 말할 수 있고, 공통의 사안에 대해 의논하고 논증할 수 있는 지적으로 평등한 인간임을 증명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상대가 자신의 말을 말로 알아듣거나 셈하지 않는 상황(‘불화’)에서 공통의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 하여, 이 공통의 무대를 설립할 가능성, 이 무대에 출현한 자의 존재와 자격 자체를 둘러싸고 갈등(‘계쟁’)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인민은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 직분, 기능에서 이탈하면서 ‘정치적 주체화’를 겪는다. 이런 것들이 있을 때에만 ‘정치’는 존재한다.<불화>는 1990년대 프랑스 사회당의 집권과 더불어 시작된 합의의 분위기, 정치의 종언 또는 정치철학의 귀환 담론, 유고슬라비아 내전 등과 같은 특정한 정세 속에서 작성됐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뤄지는 정치적 무대/장면-아벤티누스 언덕에서 농성을 벌이던 로마 평민들, 파리의 재단사 파업, 보편 선거권 쟁취 투쟁을 벌이던 프랑스 여성들 등-은 그것의 (비)동시대성 덕분에 이 땅의 상황과 쉽게 연결될 수 있다. 이 책에는 노동자 시위에 대한 공권력·사측·언론의 비난, 여론조사와 시뮬레이션 투표를 통한 정치활동의 제거, 민주적 지식 유통에 맞서 교육학적 통제권을 펼치는 정치, 공동체의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공동체에 참여하게 만드는 정치 등에 대한 논의가 나온다.
양창렬 철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