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7. 13:25ㆍ파놉틱 정치 읽기
파국을 막은 시민의 연대 의식과 공감, 정의감에 대한 찬사
(어느 선배 정치학자의 신문 칼럼에 대한 의문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선배이자 사석에서는 형이라 부르는 정치학자의 칼럼이 중앙일보에 실렸다. 제목은 ‘파국적 갈등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 파국은 인간에 대한 불신과 정치의 양극화 심화를 의미하며, 그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한 것은 헌정 체제를 무너뜨리고 ‘비상입법기구’를 만들어 입법부를 독점하고, 선관위를 무너뜨려 선거제도를 독점하고, 주요 사법부 인물을 불법 구금해서 사법부를 독점하는 윤석열 극우 파시스트 시대였다. 그것을 평범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맨몸으로 총과 장갑차를 막았고, 국회의원은 담치기로 국회 본회의장에서 비상계엄을 해제했고, 어쩔 수 없는 명령에 투입된 계엄군은 태업과 방관으로 내란 세력의 준동을 지체시켰고, 국회 앞에 운집한 수많은 시민의 집단행동이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고, 거대한 민심이 새로운 세상으로 이동하는 힘을 만들고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대 의식, 시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정의감이 더 극악무도한 폭력 모리배를 압도했던 것이 ‘12.3 내란 사태’의 본질이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공감과 정의감으로 소수의 사이코패스적 폭력 무리배를 고립시킨 인간의 힘이다. 이 상황에서 이 정치학자의 논리는 “인간은 천사가 아니다. 대립과 증오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서로에 대해 야수가 될 수 있다. 지금 상황은 그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이다. 인간은 천사일 수 없고, 인간이다. 인간은 대립과 증오가 아니라 공감과 연대, 나눔과 사랑의 본성을 가지고 서로 연대하며 공동체를 구성하는 존재다. 따라서 야수일 수 없다.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이 정치학과 결합하면 나타나는 병리학적 진단일 뿐이다. 수많은 사회과학자가 범하는 오류다. 데카르트, 칸트를 이어 니체로 이어지는 합리주의 철학의 중대한 오류다. 그 귀결이 바로 20세기 히틀러(나치당)에 의한 유대인 대량 학살이다. ‘12.3 내란 사태’의 극복을 시민의 생명에 대한 사랑, 공동체의 정의를 지키려는 인간의 본성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정치를 여야의 문제로 축소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기술로 축소하고, 다양성의 병렬적 배치를 안정시키는 것으로 축소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정치는 사랑과 공감의 공동체를 국민(시민) 스스로 자치하며 만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국가는 ‘약자에 의한 약자를 위한 약자의 공동체’이다. 내란은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고, 생명을 권력에 포박하려는 것이다. 수천 년을 투쟁으로 쟁취한 ‘자유와 평등’의 기본권을 말살하는 것이고, 권력의 손에 ‘생사여탈권’이 독점되는 것이다. 이것에 착수한 자를 ‘내란 우두머리’, ‘내란 중요 임무 종사자’라 하고, 이것에 동조하는 자들을 ‘내란 동조 세력’이라 한다.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다. 그런데 이 글을 쓴 정치학자는 “민주당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내란 동조’ 세력으로 몰아가는 나쁜 선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비판한다.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가? 국민의힘 의원들을, 한덕수, 최상목 등 국무위원을 내란 동조 세력으로 몰아서인가? 체포영장 집행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고동운 공수처장을 비판해서인가? 일단의 내란을 동조하고 선동하는 사람들을 비판해서인가? 글쓰기는 명료해야 한다. 어떤 이들에 대한 민주당의 규정이 문제인지 특정해달라.
마지막으로 의도는 알겠으나, 이 문장이 찝찝하다. “대선 승리만 생각하는 것은 안이한 꿈이다. 무책임한 일일 수 있다. 상황은 생각보다 나쁘다.” 선배 정치학자부터 대선이라는 시간표에서 시선을 돌리시라. 내란이 진압되지도 않았는데, 한가하게 조기 대선을 슬며시 끌어들이시나! ‘파국적 갈등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주체가 바로 시민(국민)이다. ‘다수 유권자 연대’를 통해 상식과 공정의 공감대 속에서 공동체가 운영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용과 연대의 정치’는 중요하다. 그러니 인간의 본성을 믿으시라. 인간을 야수로 매도하지도, 대립과 갈등을 공존과 평화의 방법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 존재자로 폄훼하지 마시라!
언제나 시민은 학자들의 글보다 빨랐으며, 학자들의 예견보다 정확했으며, 학자들의 비판마저 포용했던 존재들이었다. 그들을 믿지 못하니, 그들의 생명을 손에 쥐고 권력을 얻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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