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홍제동 거리와 똘레랑스(上)

2000. 5. 25. 14:38파놉틱 평화 읽기

이제부터 "똘레랑스, 그리고 관용"과 관련된 저의 경험을 연재하려고 합니다. 워낙 글을 못쓰지만 성심 성의껏 만들어가겠습니다.

88년 홍제동거리와 똘레랑스(上)

폭염이 짓던 6월.
갓 대학을 들어와 선술집 주위를 맴돌며, 세상을 배우고 낭만을 찾던 88년의 여름은 무덥기만 하던 시간이었다. 우리의 울분만큼이나, 우리의 현실만큼이나 갑갑하고, 습기가 모든 것을 잡아먹는 듯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통일은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쉽게 통일은 다가왔다. 통일에 관해서는 "우리의 소원"이라는 노래밖에 모르던 내게, 북한에 관해서는 그저 이상한 빨갱이의 나라라고 밖에는 인식하지 못하던 내게.

일상의 둔 턱에서 그저 즐길 수 있을 줄만 알았던 대학 교정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오히려 혼란만이 나를 엄습했고, 그 혼란에 뒤뚱거리며 선술집 모퉁이만 돌아야 했다. 머리는 끄덕였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던 그 시절! 쉽사리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흔들었던 4월의 교정과는 달랐다. 이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낮은 두려웠고, 밤의 거리에서 술을 처먹는 것이 나의 위로의 처세술이었다. 그렇게 암울하게 6월은 다가왔다. 그리고 나에게 6월은 새로운 눈을 뜨게 한 전환점이었다.

1987년 겨울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왔던 김중기씨에 의해 제기된 남북청년학생회담은 4.19 이후 최초로 제기된 학생운동진영의 통일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제기는 적어도 이제껏 기득권을 누리는 세력에게는 위협요소였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으로" 5월은 이 함성으로 메아리쳤고, 통일은 우리의 주요한 논의로 떠올랐다.

맞는 얘기 같았지만, 그리 내키지 않는 얘기들이 우리의 세미나 현장에서 오고갔다. 역사적인 현장에서야 한다는 선배의 절절한 이야기는 그냥 귓전을 맴돌 뿐이었다. 그렇게 6월 10일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6월 10일.
그저 그런 마음으로 서울역으로 나갔다. 그리고 과거와 같이 싸웠다. 비폭력평화시위라는 말에 왠지 찜찜했지만, 지도부의 지침이니 따라야지 하면서 서울역을 배회했다. 이게 웬 일. 우리는 그 흔한 거리집회 한번 힘있게 못하고, 서울역을 배회하는 신세가 되었다. 1998년 초 서울역 노숙자처럼, 그렇게 맥이 빠진 모습으로 말이다.

어디선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홍제동이 어디야, 한번도 안 가봤는데. 아는 사람 없어". 우리가 가야할 곳은 홍제동이었다. 그 당시 홍제동은 서울의 변두리 어디쯤으로 여기고 있을 때였다. 약간은 머뭇거리는 마음으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드디어 홍제동.

아무런 인파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일상처럼 서민들이 자신의 일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어느 거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뒷골목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 친구 몇몇은 한탄만 했다. "이거 서울역 복사판 아니야". 투덜거리던 그 와중에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벌어진 광경이었다. 놀랍다는 표현 말고는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었던 그런 상황이었다. 씁쓸함을 더하던 담배 한 모금을 피우고, 끄는 둥 마는 둥 나도 그들의 거리로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