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기본합의서와 남북정상회담

2000. 5. 4. 12:47파놉틱 평화 읽기

새 천년 첫해 한반도는 평화와 희망의 소식으로 시작되었다. 올 4월 10일 남북한 정상회담 합의 공동발표가 그것이다. 실로 반세기만에 최초로 진행되는 남북 정상간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 평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한반도는 반세기동안 반목과 질시, 대결과 대립의 악순환을 걸어왔다. 그 과정은 필히 남북 국민들의 심각한 억압과 고통을 내포했다. 하지만 이제 새 천년 한반도는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평화와 협력의 디딤돌을 만들었다. 이러한 성과가 나오게 된 배경은 두 가지의 측면에서 고찰해볼 수 있다. 하나는 1980년대 말부터 남북대화를 통해 마련된 '남북기본합의서'(이하 합의서)이고, 둘째는 김대중정부 출범 이후 일관되게 진행된 대북포용정책의 성과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합의서가 갖는 현재적 의미는 무엇이며, 향후 전개될 남북정상회담과 합의서의 상관관계을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남북기본합의서의 주요내용

합의서는 1989년 2월 8일부터 시작된 '남북고위급회담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하여 6차례의 예비회담(1990. 9. 4∼1992. 2. 21)을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진행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각고의 작품이다. 1992년 2월 19일 남북 양측은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효시키고, 「남북고위급회담 분과위원회 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서명·발효시켰다. 분과위원회는 남북정치분과위원회, 남북군사분과위원회, 남북 교류·협력분과위원회이다. 합의서는 통일이라는 대전제를 두고 쌍방이 향후 남북관계를 민족의 공동번영을 위한 과정으로 인식하며, 남북관계의 개선과 평화적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가기 위한 기본 틀을 제시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또한 기존의 남북간 회담이 각자의 일방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려던 제로섬게임(zero-sum game)식의 접근이 아니라, 서로를 적이 아닌 동반자의 관계로 인식하는 가운데 진행된 최초의 포지티브섬 게임(positive-sum game)이었다는 점에 있다. 합의서의 내용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남북화해(1장), 남북불가침(2장), 남북 교류·협력(3장), 수정 및 발효(4장)이다. 내용들을 살펴보면, 남북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거시적인 기본 틀들이 모두 집대성되어 있다. 또한 동시에 발효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은 평화적 환경을 위협할 수 있는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금하도록 명시했다. 동시에 이를 검증할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를 두도록 하였다.
이상과 같이 1992년 채택된 합의서는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정의하면서 제반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한 포괄적 기본 틀을 만들었다. 이를 "남북관계의 바이블(The Bible of South-North relations)"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남북기본합의서의 현재적 의의

하지만 남북기본합의서는 현재까지 사문화(死文化)되어 있다. 특히, 1993년 북한의 핵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사찰문제로 발생한 한반도의 긴장고조와 김일성주석 사망 이후 남한사회에서 발생한 '조문파동'은 합의서를 유명무실한 휴지조각으로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북한도 그 책임을 모면할 수는 없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은 현재 우리에게 두 가지의 의미를 부여한
다. 하나는 역사적 실패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는 점이다. 남북관계의 대립과 격화를 막아내기 의해 합의서에는 거시적인 법적·제도적 완충장치를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남북 당국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관계를 풀어나가려기 보다는 이데올로기적 방식으로 대립을 격화시키는 오류를 범하였다. 따라서 합의서는 남북관계에 있어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합의서에 명시된 법·제도적 장치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합법적 남북관계의 룰을 조성해나가야 한다. 둘째는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진 합의서를 현재에 적실하게 구현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이미 김대중정부는 합의서의 정신과 내용에 입각한 남북관계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따라서 정상회담 이후의 남북관계는 합의서에 입각한 발전경로를 채택해야 할 것이며, 여기에 변화된 측면들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상당한 수준의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한 합의서를 갖고 있다. 이것을 기준으로 시작해야 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이미 우리는 절반 이상 와 있는 것이다.

새 천년 남북정상회담의 의의와 과제

역사적인 최초의 남북 정상간의 회담이 진행된다. 그 의의는 첫째, 55년 분단으로 얼룩진 불신과 대립의 관계를 청산하고, 화해·협력을 통한 평화정착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남북한 공존·공영의 기반을 조성함과 동시에 경제적 균형발전의 초석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남북한 쌍방이 서로를 동반자적 파트너로 인정했다는 점과 동시에 정상회담을 합의하는 과정이 남북 양측의 주체적인 협의와 타협의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 결실을 위해서는 헤쳐 나아가야 할 일이 산적하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상황과 조건에 근거해서 남북관계를 풀어나가는 실사구시의 정신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리고 정상회담 예비접촉을 둘러싼 문제 속에서 사소한 것에 얽매여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김대중정부 또한 철저히 정치적 고려를 배제하고, 민족 번영
과 평화통일의 대장정 속에 정상회담을 위치 지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