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의 정신, 통일의 자세(똘레랑스 3)
2000. 6. 14. 19:45ㆍ파놉틱 평화 읽기
평화의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금단의 땅 북녘은 단 1시간만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수많은 눈물, 수많은 죽음, 수많은 사연 속에 철저히 서로를 갈라놓았던 철책선을 비웃기라도 하듯, 남한의 정상을 태운 비행기는 유유히 철책선을 넘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흘러내렸을 기쁨의 눈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벅차온다. 그리도 오래 걸려야 했을까? 그리도 애절해야만 했던가?
만남에 목마르고, 반백년의 세월을 기다림 속에 애간장을 태우던 우리네 이산의 슬픔은 이제 망향의 귀신이 되어 구천을 헤매지 않아도 될 듯 싶다. 분단이 준 슬픔에 더 이상 괴로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련 듯 들려온다. "통일은 말이야 서울역에 가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달라는 거야"라고 말씀하신 문익환 목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저 따스한 흙 속에서 기쁨의 춤을 추실거라 생각한다. 가히 명복을 빕니다.
언론은 남북정상회담 문제로 온통 도배질을 하고, 희망을 미래를 얘기하고 있다. 어찌 한민족 구성원들이 기뻐하지 않겠는가! 이 희열을 어찌 가슴에 묻어둘 수 있겠는가! 얼마 전만 해도 갖은 욕설을 던져되던 그들마저도 기쁨은 한결 같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뒤를 돌아볼 줄 아는 미덕을 익혀야 한다. 우리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의 인간적 권리를 묵살했던 분단의 잔흔들을 청소하지 않는다면, 다시 한번 그 잔흔들에 의해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하나는 국가보안법의 철폐다. 이제 우리는 일상에서 국가보안법의 법적 테두리를 넘어서 활동하고 있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국가보안법을 어기고 있으며, 국가의 최고 관료들이 법을 어기고 있다. 어차피 우리가 지향했던 것이 법적 틀을 무시하고, 그것을 돌파하려고 하는 것이었다면, 지금 아주 속 시원히 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회합, 통신, 고무, 찬양, 반국가단체 구성 등등'의 죄목 속에서 인권을 유린당하고, 가정을 파괴당했으며, 정신이 황폐화되었다. 이제는 그 법을 넘어서서 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즉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인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저 쓸데없는 검찰의 행태는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대학에 인공기를 단 것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것이라면, 검찰은 정상회담 남쪽 대표단 모두에게 똑같은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소위 말하는 '초법적 통치행위'라는 미명으로 권력자들만의 행동을 예외 조항화 한다면 이미 그것은 정당성을 상실한 것이며, 통일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가 외치는 대북포용정책은 그 설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보수우익에 의해 재단되고, 강점되었던 분단역사관을 이참에 바꾸어야 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역사란 자신 삶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거울이 한 쪽만을 반사하는 절름발이라면 그 거울을 갈아버리고, 균형미를 갖춘, 좌우에 날개를 달고 안전한 비행을 할 수 있는 거울을 들여와야 한다. 그래야만 나를 똑바로 볼 수 있으며, 나라를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그림자에 꽁꽁 숨겨두었던 진보의 역사를 이제 세상에 공개해야 한다. 평가는 아마도 국민들 스스로가 할 것이다. 과거의 사형수가 이제는 대통령이 되어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대통령의 과거가 이제 재조명되듯, 가장 아래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움틀 되었던 민중의 역사도 재조명되어야 한다. 그래서 헌법에 명시되었듯 우리는 자랑찬 민주주의국가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북한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도 개방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모든 신문들은 예외 없이 김정일의 모습에 대해 호평을 하고 있다. 1년 전 가난한 국가의 독재자가, 주민들을 먹여 살리지도 못하는 능력 없는 독재자가 이제는 다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가 언론에 속은 것인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깜짝 변신을 한 것인지. 아마도 전자일 것이다. 통일의 대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준과 방법과 그 재료들을 공개해야 한다. 그리고 평가는 소수 언론이, 소수 학자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공론의 영역에서 익명의 다수가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
이외에도 우리가 버리거나, 바꾸어야 할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뒷정리와 함께 우리는 미래를 준비할 커다란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관용(똘레랑스)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를 바탕으로 연대하고, 연대를 바탕으로 전체를 이루어 나가는 관용의 정신이 필요하다. 누가 약해서 도와주는 동정의 그것과는 다르다. 주체 대 주체, 국가 대 국가라는 동등한 가치와 기준에 근거해 쌍방이 목표로 하는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에서 발휘되는 호혜와 공존과 평화의 가치를 가져야 한다. 관용이 통일의 자세여야 하고, 이 관용으로 통일의 어려운 여정을 극복해야 한다. 자본의 가치로 평가한다면, 통일은 아마도 못사는 동네와 잘사는 동네가 갈라진 세상일 것이고, 그것은 마음의 장벽을 쌓고 통일이 오히려 마음의 분단을 높이는 것이 될 것이다. 관용의 정신이 과거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맞물리는 그런 공론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흘러내렸을 기쁨의 눈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벅차온다. 그리도 오래 걸려야 했을까? 그리도 애절해야만 했던가?
만남에 목마르고, 반백년의 세월을 기다림 속에 애간장을 태우던 우리네 이산의 슬픔은 이제 망향의 귀신이 되어 구천을 헤매지 않아도 될 듯 싶다. 분단이 준 슬픔에 더 이상 괴로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련 듯 들려온다. "통일은 말이야 서울역에 가서 평양가는 기차표를 달라는 거야"라고 말씀하신 문익환 목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저 따스한 흙 속에서 기쁨의 춤을 추실거라 생각한다. 가히 명복을 빕니다.
언론은 남북정상회담 문제로 온통 도배질을 하고, 희망을 미래를 얘기하고 있다. 어찌 한민족 구성원들이 기뻐하지 않겠는가! 이 희열을 어찌 가슴에 묻어둘 수 있겠는가! 얼마 전만 해도 갖은 욕설을 던져되던 그들마저도 기쁨은 한결 같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뒤를 돌아볼 줄 아는 미덕을 익혀야 한다. 우리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의 인간적 권리를 묵살했던 분단의 잔흔들을 청소하지 않는다면, 다시 한번 그 잔흔들에 의해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하나는 국가보안법의 철폐다. 이제 우리는 일상에서 국가보안법의 법적 테두리를 넘어서 활동하고 있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국가보안법을 어기고 있으며, 국가의 최고 관료들이 법을 어기고 있다. 어차피 우리가 지향했던 것이 법적 틀을 무시하고, 그것을 돌파하려고 하는 것이었다면, 지금 아주 속 시원히 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회합, 통신, 고무, 찬양, 반국가단체 구성 등등'의 죄목 속에서 인권을 유린당하고, 가정을 파괴당했으며, 정신이 황폐화되었다. 이제는 그 법을 넘어서서 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즉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인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저 쓸데없는 검찰의 행태는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대학에 인공기를 단 것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것이라면, 검찰은 정상회담 남쪽 대표단 모두에게 똑같은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소위 말하는 '초법적 통치행위'라는 미명으로 권력자들만의 행동을 예외 조항화 한다면 이미 그것은 정당성을 상실한 것이며, 통일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가 외치는 대북포용정책은 그 설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보수우익에 의해 재단되고, 강점되었던 분단역사관을 이참에 바꾸어야 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역사란 자신 삶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거울이 한 쪽만을 반사하는 절름발이라면 그 거울을 갈아버리고, 균형미를 갖춘, 좌우에 날개를 달고 안전한 비행을 할 수 있는 거울을 들여와야 한다. 그래야만 나를 똑바로 볼 수 있으며, 나라를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그림자에 꽁꽁 숨겨두었던 진보의 역사를 이제 세상에 공개해야 한다. 평가는 아마도 국민들 스스로가 할 것이다. 과거의 사형수가 이제는 대통령이 되어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대통령의 과거가 이제 재조명되듯, 가장 아래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움틀 되었던 민중의 역사도 재조명되어야 한다. 그래서 헌법에 명시되었듯 우리는 자랑찬 민주주의국가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북한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도 개방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모든 신문들은 예외 없이 김정일의 모습에 대해 호평을 하고 있다. 1년 전 가난한 국가의 독재자가, 주민들을 먹여 살리지도 못하는 능력 없는 독재자가 이제는 다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가 언론에 속은 것인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깜짝 변신을 한 것인지. 아마도 전자일 것이다. 통일의 대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준과 방법과 그 재료들을 공개해야 한다. 그리고 평가는 소수 언론이, 소수 학자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공론의 영역에서 익명의 다수가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
이외에도 우리가 버리거나, 바꾸어야 할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뒷정리와 함께 우리는 미래를 준비할 커다란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관용(똘레랑스)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를 바탕으로 연대하고, 연대를 바탕으로 전체를 이루어 나가는 관용의 정신이 필요하다. 누가 약해서 도와주는 동정의 그것과는 다르다. 주체 대 주체, 국가 대 국가라는 동등한 가치와 기준에 근거해 쌍방이 목표로 하는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에서 발휘되는 호혜와 공존과 평화의 가치를 가져야 한다. 관용이 통일의 자세여야 하고, 이 관용으로 통일의 어려운 여정을 극복해야 한다. 자본의 가치로 평가한다면, 통일은 아마도 못사는 동네와 잘사는 동네가 갈라진 세상일 것이고, 그것은 마음의 장벽을 쌓고 통일이 오히려 마음의 분단을 높이는 것이 될 것이다. 관용의 정신이 과거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맞물리는 그런 공론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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