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 99의 시대

2012. 1. 16. 13:07discourse & issue

 

“1%위한 사회 바꾸자” 세계 동시시위
뉴욕·로마·마드리드·서울 등 82개국 1500곳
수십만명, 자본탐욕 비판 “진짜 민주주의 원해”
비정규직 철폐·반원전…다양한 요구 쏟아져

등록 : 20111016 19:56 | 수정 : 20111016 22:35

 

 

 
» 마드리드광장 메운 보통사람들 전세계 82개국 1500여개 도시에서 ‘1%의 탐욕에 맞선 99%의 저항’ 시위가 열린 15일(현지시각) 스페인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델 솔’(태양의 문) 광장에도 시민 수만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스페인에선 살인적인 청년 실업률과 정부의 공공복지 지출 및 복지예산 축소 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지난 5월부터 이어져 왔으며, 이날도 마드리드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80개 도시에서 수십만명이 거리로 나섰다. 마드리드/AP 뉴시스
“진짜 민주주의를 원한다!”

 

분노한 99%의 외침이 전세계 도시를 뒤흔들었다. 지난 15일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은 뉴질랜드 오클랜드를 시작으로 서울과 도쿄 등 아시아 도시를 비롯해 런던·베를린·마드리드 등 유럽 도시, 뉴욕 월가와 맨해튼 등 아메리카 대륙에도 ‘보통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지난 5월 스페인 마드리드 광장에서 텐트 3채로 시작된 ‘분노한 사람들’(Los indignados)의 시위는 미국 ‘월가 점령’ 시위를 통해 현행 경제·정치 시스템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된 뒤 “전세계에 변화를 일으키자”는 연대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전세계 ‘동시 시위’는 특별한 지도부도 없이 지난 며칠간 인터넷 누리집(occupytogether.org)을 통해 자발적으로 기획된 것으로, 82개국 1500여개 도시에서 수십만명이 참가했다고 주최 쪽은 밝혔다. 서울에서는 금융소비자협회·투기자본감시센터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과 시민들이 여의도 금융위원회와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 등에 모여 금융자본의 횡포와 이로 인한 사회 양극화 문제 해소 등을 주장했다.

 

20만명이 집결한 이탈리아 로마에선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경찰과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다른 지역에선 대체로 평화적인 시위가 이뤄졌다. 유럽연합(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의 시위대 등이 오는 23일 시작되는 유럽연합 정상회의 때까지 머물며 분노한 99%의 목소리를 정치·경제 지도자들에게 전달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등 각국 시위대는 이날 동시 시위가 ‘끝이 아닌 시작’이라고 밝히고 있다.

 

각국 시위대의 요구는 ‘빈부격차 시정’, ‘반원전’(일본 도쿄), ‘정치부패 척결’, ‘수도 민영화 반대’(이탈리아 로마), ‘은행 구제 반대’(독일 베를린), ‘최저임금 인상’(뉴질랜드 오클랜드), ‘아프간전 종식’(미국 뉴욕), ‘비정규직 철폐’(서울) 등 들고 있는 깃발만큼이나 다양했다. 단일한 지도부도, 통일된 요구사항도 없는 이번 시위가 당장의 변화를 가져오긴 힘들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오히려 더 시위계층의 폭을 넓히고 저항을 지속시키는 힘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 다양한 요구를 지닌 시위대를 결집시키는 것은 ‘1%의 탐욕에 맞선 99%의 저항’이란 구호다. 영국 런던의 한 시위자는 “이젠 충분하다. 우리는 대기업과 은행 시스템의 이해에 기반하지 않은 진짜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외쳤다.

 

<뉴욕 타임스>는 언어와 지형, 규모 등이 다 다름에도 시위대가 최근 벌어지고 있는 빈부격차에 대한 좌절로 ‘뭉치고 있다’고 주목했다. 이런 전세계적 시위의 배경에는 2008년 금융위기 해결 과정에서 엄청난 국민의 세금이 구제금융으로 투입됐는데도 대다수의 삶은 복지혜택 축소와 치솟는 실업률로 벼랑 끝에 내몰려버린 현실이 있다. 위기를 해결해야 할 정치권은 무능하거나 ‘1%’의 대변자로 전락해버렸다는 회의와 불신감 또한 깔려 있다. 제프리 색스 유엔 사무총장 특보는 지난 14일 <허핑턴 포스트> 기고 글에서 “(시위대는) 상류층의 막대한 부를 문제삼는 게 아니라 그 부를 어떻게 축적했으며, 어떻게 쓰이느냐를 문제삼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양극화의 심화 속에서 파편화된 개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며 국제적 행동에 나서는 모습은 분명 새로운 현상이다. 런던 시위에 참가한 벤 워커(33)는 “지금 벌어지는 일이 진짜 흥분되는 이유는 국제적 연대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금융자본주의로 상징되는 기존 시스템에 균열을 가할 거대한 인식의 전환이 2011년 가을 전세계에서 시작되고 있다.

 

“1%에 세금, 99%에 복지” 거리 나선 ‘세계시민’

등록 : 20111016 20:13 | 수정 : 20111016 22:31

 

» 금융자본과 1%의 탐욕에 저항하는 전세계 동시다발 시위가 벌어진 15일 저녁,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과중한 대학등록금과 청년실업,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불공정성 등 우리 사회의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15일 벌어진 전세계 ‘보통사람들의 동시시위’는 2008년 이후 각국이 벌여온 위기 해결이 근본적 한계에 봉착했음을 선언하고 있다. 3개국 ‘99%’ 사람들의 사연과 양극화가 깊어지고 위기가 상시화된 세계경제의 구조적 문제, 그리고 ‘1%’만을 위한 시스템을 바꾸려는 실험 등을 3차례에 걸쳐 전한다.

 

“자본에 손과 발 묶였던 20대
우리가 새 민주주의 설계할 것”

“청년층 일자리 사라진다” 분노
텐트들고 ‘분노한 사람들’ 동참

 

벨기에 브뤼셀의 인세스대 연극학과에 다니는 클레망 롱거빌(22)은 15일(현지시각) 군중 사이를 바삐 오가며 ‘분노한 사람들’의 시위를 주도했다. 고함을 질러대며 다국적 참가자들을 이끈 그는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에 대해 “우리 세대는 미래를 설계할 수 없는 세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날 시위에는 롱거빌처럼 청년실업의 그늘 아래 놓인 20대들이 대거 참여했다.

 

롱거빌은 “유럽의 젊은 세대는 베를린장벽 붕괴(1989년)를 전후해 태어났다”며 “장벽 붕괴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가 완전히 승리했다’고 했지만, 지금은 그게 틀린 말이 됐다”고 말했다. 유토피아는 펼쳐지지 않았고, 극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실업의 고통에 시달리는 시대가 왔다는 얘기다. 그는 “스페인이나 그리스가 가장 심각하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유럽 지역에서 청년층을 위한 괜찮은 일자리는 갈수록 찾아보기 어렵다”며 자신들을 “손과 발이 묶인 세대”로도 표현했다.

 

» 22살 벨기에인 클레망 롱거빌

롱거빌은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하며 변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한댔지만 지금 약자들은 벌레처럼 짓밟히고 있다”며 “현 체제는 경제뿐 아니라 환경이나 문화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문제들을 타파하는 것은 기존 정치체제로는 불가능하며 ‘분노한 사람들’이 주창하는 직접민주주의가 “21세기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사람들끼리 친밀하고 정직한 대화를 나누는 게 정치이고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주장이다.

 

지난 6월 ‘분노한 사람들’의 취지를 접하고 집에서 텐트를 들고나와 이 운동에 합류했다는 그는 학교에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알리고 동참을 호소해왔다고 말했다.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번 집회를 준비했다고 한다.


롱거빌은 이번 시위에 참여하려고 다양한 나라에서 브뤼셀로 모여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하고 행동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매끄럽지 못했고 혼란스러운 면도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한데 모여 시대적 문제를 함께 고민한 것은 자신에게도 값진 경험이었다고 했다. 롱거빌은 “한국에서도 집회가 열렸냐”고 물으면서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같은 가치를 내세우며 행동에 나선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브뤼셀/글·사진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잘못된 사회시스템 안고치고
왜 ‘청춘’이 아파해야 하나요?”

학자금 이자·비정규직 고통
“대책 내라” 대한문 앞 나서

 

» 31살 한국인 송화선씨

“청춘이 왜 아파야 하죠? 하고 싶지 않은 고생을 왜 사서 해야 하나요?”

 

지난 15일 오후 6시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1%에 맞서는 99% 분노, 1015 국제 공동행동의 날’ 집회에 참가한 송화선(31)씨는 같은 날 전세계 곳곳의 거리에 선 젊은이들처럼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송씨는 “비싼 등록금, 청년실업 등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삶의 문제는 사회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인데,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있다”며 “‘낙오자’를 타박하는 사회 분위기가 싫어 나왔다”고 말했다.

 

송씨는 한 달 전 한 노동조합의 상근 간부로 취직하기까지 대학 졸업 뒤 꼬박 3년 동안 비정규직을 전전했다. 지방대에 다니다 2003년 서울의 한 사립대에 편입할 때까지만 해도 좀 더 나은 직장에 들어가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할 수 없이 받았던 1600여만원의 학자금 대출이 6년 동안 송씨의 발목을 붙들었다.

 

연 7%의 이자와 원금을 갚느라 재학중에도 매일 과외를 했고, 한 쇼핑몰에서 상자 접는 일도 했다. 이 와중에도 송씨는 토익 950점에 자격증도 3개나 땄지만, 정규직 일자리는 머나먼 희망일 뿐이었다.

결국 2007년 졸업 뒤 학자금 대출을 갚으려고 영화제 사무국에 사무보조로 취업했다. 잦은 야근에도 월급은 100만원에 불과했고, 4대보험 혜택도 받지 못했다. 1년 넘게 일을 했지만 사무국장이 바뀌자 해고됐고, 퇴직금도 받지 못했다. 한 달에 50만원씩 갚아야 하는 학자금 대출 상환이 석달치나 밀리는 바람에 친구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송씨는 이어 한 방송사의 사무보조로 월 100여만원을 받으며 1년 정도 일했지만 소속 팀이 해체되는 바람에 또 해고됐다. 다행히 실업급여를 한 달에 83만원씩 받을 수 있었지만, 그는 “이 사회가 내 노동력을 실업급여 수준으로밖에 인정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고 했다.

 

송씨는 ‘1%에게 세금을, 99%에게 복지를’이라는 팻말을 들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만 하지 말고, 청년을 위한 현실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며 “반값 등록금과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4대보험 감면 정책 등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또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모든 청년들이 거리로 함께 나와,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글·사진 최우리 박태우 기자 ecowoori@hani.co.kr


“해고 뒤 가치없는 사람처럼 돼
열심히 일했는데 뭔가 잘못됐다”

턱없는 실업수당에 가족과 절망
‘점령 시위’ 소식듣고 뉴욕 합류

 

» 59살 미국인 에릭 코베이

15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리버티 플라자 공원(주코티 공원)에서 만난 에릭 코베이(59)는 “2년 전만 해도 내가 이리될 줄 꿈에도 몰랐다”고 자조했다.

 

고급 가구 컴퓨터설계(오토캐드) 디자이너였던 그는 연봉 10만달러(1억1560만원)를 받았다. 그런데 2007년 11월 아내가 암으로 숨졌다. 불행은 겹쳐 오는지, 그 무렵 경기침체가 본격화되며 일감이 급격히 줄었다. 2008년 금융위기는 직격탄이었다. 고급 맞춤가구 수요가 사라지자 2009년 1월 회사는 직원 30%를 해고했다. 그도 35년을 일했던 회사에서 쫓겨났다.

 

그는 보스턴을 떠나 생활비가 적게 드는 지방도시인 노스햄프턴으로 이사했다. 정들었던 집을 32만달러에 팔고, 방 2개짜리 800스퀘어(22평)짜리 집에 딸(18)과 둘이 세들어 산다.

 

재취업을 위해 애썼지만, “뉴잉글랜드(미국 동북부 지방)에서 날 찾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주당 625달러(월 2800달러)의 실업수당을 받는다. 이 가운데 월세로 1200달러가 들어간다. 부족한 생활비는 집 판 돈에서 까먹는다. 그러면서 프리랜서로 가끔 일한다. 일하는 기간에는 실업수당이 안 나온다. 프리랜서 급여는 대개 실업수당보다 더 적다. 그래도 일이 생기면 마다하지 않는다. 실업수당은 99주까지만 나오기 때문이다. “70주가 넘었다. 5개월 정도 남았다. 그 이후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라며 그는 씁쓸히 웃었다. 12학년(고등학교 3학년)인 딸은 내년에 대학에 간다. 장학금 혜택을 못 받으면 학기당 2만5000달러가 들어간다.

 

‘다행히’ 의료보험은 저소득층 대상 메디케이드(공공의료) 혜택을 받는다. 그는 “메디케이드 대상자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해고 전, 그는 월 1200달러의 값비싼 민간 의료보험을 들고 있었다. 그는 “나 스스로 가치 없는 인간이란 생각이 많이 들고, 때론 막연히 화가 치민다. 평생 열심히 일했는데, 이게 뭔가? 뭔가 잘못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월가 점령’ 시위 소식을 듣고 노스햄프턴에서 이 운동에 가담했다. 이날은 자동차로 4시간을 달려 동료 5명과 함께 뉴욕 시위에 참가했다.

 

뉴욕/글·사진 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국경넘은 자발성·공감…“변화는 이미 시작”
모호한 목표 지적에도 전세계로 분노 확산
직접 민주주의 구현하며 ‘점진적 변혁’ 꿈꿔
“시애틀 시위는 일시적…지금은 외연 확장중”

등록 : 20111016 20:16 | 수정 : 20111016 22:52

 

» ‘다함께 점령하라’ 15일 세계 주요 도시 시위 현황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스페인의 텐트 시위 등에 영향을 받아 지난달부터 미국 뉴욕 리버티 플라자 공원(주코티 공원)에서 시작된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불과 한달여 만에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올해 초 아랍 국가에서 일어난 민주화 혁명인 ‘아랍의 봄’에 비유해 ‘미국의 가을’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월가 점령’ 시위는 이제 미국의 국경을 벗어난 전세계적 이슈로 확장되고 있다.

 

‘월가 시위’는 ‘아랍의 봄’은 물론 과거 어느 시위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여러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하나의 주제를 놓고 시민들의 시위가 유행병처럼 전세계에 급속도로 확장되는 양상은 역사상 이번이 거의 처음이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그만큼 세계가 좁아진 탓이기도 하지만 ‘1% 대 99%’라는 빈부격차 심화에 대한 공감과 분노가 전세계적 현상임을 반영한다.

 

‘월가 시위’의 가장 큰 특징은 지도자 없는, 직접민주주의에 의한 의사결정 구조다. 이는 ‘인터넷 광장’ 문화가 빚어낸 결과로 보인다. 리버티 플라자 시위대의 실무그룹 일원인 블랙 페더(19·대학생)는 “시위대 안에 리더십과 계급 서열이 없다는 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힘”이라며 “이것이 의사결정을 느리게 하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누구나 참가할 수 있게 한다. 전세계로 급속도로 확산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금융자본주의와 빈부격차 확대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 ‘월가 시위’의 외형은 평화적 운동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개발도상국에서 주로 일어나는 민주화 혁명과 가장 큰 차이를 나타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월가 시위’는 최대한 합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시위를 할 때는 수천명이 행진을 해도 경찰 저지선(폴리스라인) 안쪽 인도를 벗어나지 않고, 리버티 플라자의 위생 악화를 이유로 강제퇴거를 요구하자 스스로 대청소를 하며 타협을 시도했다. 또 “부자들을 잡아먹자”, “은행을 강탈하라” 등 일부 구호는 매우 과격하지만 말만 그럴 뿐, 이들의 저항은 피자 종이상자에 슬로건을 적어 흔들고, “부자 증세”, “월가 규제” 등 주장을 외치고, 행진하는 게 전부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던 ‘아랍의 봄’에 비해 비장함이나 절박함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한다. 하지만 15일 시위에 참가한 마디하 타히르(31·컬럼비아대 박사과정)는 “평화시위가 외연을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시위에 참가하는 어른들이 부쩍 늘어난 것도 평화시위가 가진 힘”이라고 평가했다. <분노하라!>의 저자 스테판 에셀도 최근 미국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평화시위의 힘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다.

미국의 많은 정치·사회학자들은 ‘월가 시위’에 대해 “언젠가 소멸하겠지만, 미국 정치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고 있다. 시위대는 ‘혁명’이라는 구호를 자주 언급하고 있지만, 이때 말하는 ‘혁명’이란 ‘급진적인 체제전복’ 성격을 지닌 일반적 의미보다, 오히려 ‘점진적 변혁’ 쪽에 초점이 더 맞춰져 있다.

 

반세계화 활동가인 나오미 클라인은 이번 시위를 1999년 시애틀에서 촉발된 반세계화 시위와 비교하며 “당시는 세계무역기구(WTO), 국제통화기금(IMF), 주요 8개국(G8) 등이 주최한 정상회의를 목표로 삼았는데, 이는 일시적이었다”며 “또 경제가 호경기였던 당시보다 극심한 경기침체에 빠져 있는 지금이 변혁을 위해선 더 좋은 시기”라고 말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는 최근 칼럼을 통해 ‘월가 시위’에 대해 “1968년 봉기 이후 미국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라며 “시위는 이미 성공했고 앞으로 오랫동안 그 유산을 남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지금은 신자유주의에서 포스트신자유주의 과정으로 넘어가는 중인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불확실한 포스트체제 속에서 정치적 주체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니까 시민들의 자발적 대응이 나오는 것”이라며 “자발성에 기초한 이런 형태의 운동은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뉴욕/권태호 특파원, 유선희 기자 ho@hani.co.kr